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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팀장님, 소원이 뭐예요? (76/129)


76화. 팀장님, 소원이 뭐예요?
2023.02.21.



‘볼링공만 들었을 뿐인데, 어쩜 저렇게 멋질 수가 있지?’

재인은 남성미가 풀풀 풍기는 도혁의 다부진 팔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레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른 도혁이 드디어 자세를 잡고 멋지게 첫 테이프를 끊었다.


‘어? 어어어!’

재인은 눈으로 도혁의 공을 쫓다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

스트라이크를 칠 것처럼 기세 좋게 굴러간 도혁의 공이 곧장 도랑으로 빠졌기 때문이다.

다들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도혁은 그제야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볼링은 처음이라.”

그런 건 미리 얘기했어야지.


‘그래, 못 하는 것도 있어야 인간적이지. 팀장님이 볼링까지 잘하면 너무 심하게 완벽하잖아?’

이미 콩깍지가 단단히 씌인 재인이었다.

볼링공이 도랑에 빠지고도 당당한 도혁이 재인의 눈에는 마치 전장에서 승전보를 울리며 귀환하는 기사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소싯적에 공 좀 굴려봤다는 박 과장은 도혁의 실력에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아이참, 네일 받은 지 며칠 안 됐는데!”

손톱이 망가진다고 투덜대던 나희가 두 손바닥으로 볼링공을 들어 살포시 굴리자, 급기야 박 과장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

박 과장이 평소 업무 중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열정적인 모습으로 볼링에 임했지만, 혼자 힘으로 내기에서 이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볼링장을 자주 다닌다는 연지가 90점을 넘기고, 중반부터는 도혁도 도랑을 피해 제법 핀을 맞춰서 겨우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첫 게임이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고.

상품기획 1팀의 머리 위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그에 반해 상품기획 2팀은 고수들의 집합체였다.

민우는 오랜만에 치는 거라고 겸손해했지만 스트라이크를 세 번이나 날렸다.

특히 규민은 화려한 스핀 기술까지 선보이며 150점을 가뿐히 넘겼다.


“나 팀장님 홧팅!”

“와, 한 과장님, 최고!”

재인은 민우와 규민이 점수를 낼 때마다 환호성을 지르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럴 때마다 도혁의 눈가가 움찔거리는 것도 모른 채.

결국, 첫 게임은 상품개발 2팀의 완승으로 끝이 났다.


“급한 전화가 있어서. 잠시만 쉬었다 할까요?”

휴대전화를 확인한 도혁이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식은 박 과장님이 알아서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박 과장에게 법인카드를 넘긴 도혁은 약 3초 간 재인을 쓰윽 쳐다보다가 밖으로 나갔다.


 
응?

재인은 멀어져가는 도혁의 뒷모습을 보며 큰 눈을 깜박거렸다.


‘이건 분명…… 사인?’

사내연애의 정석 중의 정석, 회식 때 몰래 빠져나가서 단둘이 만나기?

스릴 넘칠 것 같아서 언젠가는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던 그거?

재인은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참느라 입술을 꾹 맞다물었다.


‘팀장님도 참, 별걸 다 하시네. 팀원들한테 들키면 어쩌려고.’

그러면서도 빨리 도혁과 단둘이 있고 싶은 마음에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재인이었다.

도혁이 밖에서 기다릴 걸 생각하자 1분, 1초가 애가 닳았다.

무슨 첩보 작전이라도 벌이는 것처럼 긴장돼 식은땀까지 다 났으니.

그러기를 10분 남짓.


“자, 자, 시원하게 한잔하시죠!”

테이블에 음료와 맥주, 푸짐한 간식거리가 차려지자, 박 과장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맥주를 쭉 들이마셨다.

다들 오랜만에 운동을 해서 허기가 졌는지, 식사를 하고 왔는데도 음식 사이로 부지런히 손이 오갔다.


‘지금이야!’

드디어 빠져나갈 타이밍이 찾아왔다.


“어? 엄마가 전화하셨네?”

재인은 모두가 먹는 데 집중하는 틈을 타, 전화하는 척하며 슬그머니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그런데 웬걸.

막상 복도에 나와 보니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도혁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너무 늦게 나왔나? 어디 계시지?’

재인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복도를 두리번거리던 그때였다.

벌컥!

갑자기 비상구 문이 열리더니 도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팀장님 여기 계셨어요?”

반가운 마음에 재인이 목소리를 높이자 도혁의 눈이 커졌다.


“쉿!”

도혁은 제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재인의 팔을 잡고 비상구 안으로 끌어당겼다.

쾅!

문이 닫히자마자 도혁이 물었다.


“서재인 씨, 무슨 일이야?”

“팀장님, 오래 기다리셨죠? 들킬까 봐 몰래 빠져나오느라…….”

“기다리다니?”

도혁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재인은 순간 머리가 띵했다.


“네? 팀장님이 나오라고 사인을…….”

“내가 언제?”

“통화한다고 나가시면서 저한테 눈짓하신 거 아니에요?”

풋, 도혁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닌데. 조금 전까지 김 실장님과 통화했어.”

“아…….”

쥐구멍 어디 있니.

재인은 너무 창피해서 불이 붙은 듯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나마 비상구가 어두워서 새빨개진 얼굴을 들키진 않았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그래도 그렇지. 사람 무안하게 크게 웃고 말이야. 애초에 착각하게 만든 게 누군데.’

입이 댓 발 나온 재인은 도혁에게 눈을 흘기며 돌아섰다.


“아니면 됐어요.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서재인 씨?”

도혁이 나직이 이름을 부르며 재인의 팔을 붙잡았다.

앗, 하는 사이에 재인을 돌려세운 도혁이 그녀의 두 볼을 감싸고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두근.

훅 들어온 도혁 때문에 재인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스며들듯 닿았다 떨어지는 그의 입술 사이로 타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가긴 어딜 가?”

“팀장님……?”

재인의 눈에 어스레한 불빛 아래 몽환적으로 빛나는 도혁의 수려한 이목구비가 들어왔다.

두근.

재인은 가슴 한가운데가 죄어드는 듯한 압박감에 숨쉬기가 버거웠다.

여전히 그의 두 손에 붙들린 채 눈길만 돌리며 벽에 바짝 붙어 섰다.

그러자 도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다시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떨어지면 다시 닿고,

끝날 듯하다 다시 시작하고…….

쉴 새 없이 계속되는 입맞춤 사이사이 뜨거운 입김이 새어 나와 재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사인…… 보낸 거 아니라면서요.”

“사인, 보낸 거 맞아. 다행히 잘 알아들었네?”

“근데 왜 아니라고 하셨…… 으음.”

도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재인의 입을 막았다 뗐다.


“다른 남자들만 열심히 응원하고 말이야. 나한테는 해주지도 않고…….”

도혁이 볼멘소리를 하자 재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사실 재인은 도혁이 레인 앞에 설 때마다 애정이 듬뿍 담긴 응원을 보냈다.

물론 속으로만.

그렇다고 솔직하게 얘기를 하자니 왠지 낯간지러운 재인이었다.


“그거야…… 팀장님이랑 저랑 서로 다른 팀이니까.”

“알 게 뭐야. 아까 한 과장이 귓속말로…… 뭐라고 한 것 같던데?”

역시 신경 쓰고 있었구나.

재인은 감은 눈을 뜨지 않아도 도혁이 어떤 표정일지 훤히 보였다.

규민이 도혁을 자극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라고 곧이곧대로 얘기할 수도 없고.


“그냥…… 볼링 잘하냐고…….”

“그게 다야?”

“네. 그래서…… 질투하신 거예요?”

“어. 아주 많이.”

솔직하게 부딪쳐오는 도혁 때문에 재인의 가슴이 마구 일렁였다.

재인은 조금이라도 더 진심을 전하고 싶어서 그의 옷깃을 붙잡고 수줍게 입술을 맞대었다.

그러자 볼에 닿아 있던 도혁의 손이 움찔하더니 미끄러지듯 그녀의 등을 타고 내려가 가녀린 몸을 힘주어 감싸 안았다.

그렇게,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품 안에서 달콤한 꿈속을 거닐었다.


“팀장님, 이제 들어가 봐야죠.”

얼마나 지났을까.

이성을 되찾은 재인이 도혁을 멈춰 세우며 말했다.

꽤 시간이 흘러서 다른 사람들이 눈치챈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덜컥 밀려왔다.


“괜찮아.”

아직 꿈에서 깨고 싶지 않은 도혁이 나직이 속삭였다.


“안 돼요. 너무 오래 자리 비워서 찾겠어요.”

“우리, 그냥 이대로 사라져버릴까?”

도혁의 눈동자가 활활 타오르는 게, 재인이 ‘네’라고 대답하면 곧바로 뛰쳐나갈 기세였다.

재인은 도혁의 품에서 벗어나며 핀잔을 줬다.


“네, 네, 그럼 둘이 사귀는 거 만천하에 소문나고 참 좋겠네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시고 어서 나가요.”

“진짜 가기 싫은데…….”

도혁이 주저하며 비 맞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눈빛으로 재인을 쳐다봤다.

불현듯 재인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으니.


“팀장님, 혹시 볼링 치기 싫어서 이러시는 거예요? 또 질까 봐?”

“날 뭘로 보는 거야? 그깟 거 내가 신경이나 쓸 것 같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도혁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재인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승부욕 넘치시는 분이 산산이 부서졌으니 자존심깨나 상했겠지.

차도혁 씨, 은근 귀여운 구석이 있단 말이야.


“그러게, 볼링도 안 쳐보셨으면서 왜 하자고 하셨어요? 미리 얘기했으면 다른 걸 했을 텐데.”

“그냥 공만 똑바로 굴리면 되는 줄 알았지.”

“아무리 그래도 저보다 못 하실 줄이야.”

재인이 킥킥거리자, 도혁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나저나 한 과장님 볼링 진짜 잘 치죠? 예전에 좋아한다고 듣긴 했지만, 그 정도인 줄은 몰랐어요.”

“그래서? 한 과장이 멋져 보이기라도 해?”

아차.

도혁의 얼굴이 굳어 있는 걸 본 재인은 황급히 수습에 들어갔다.


“그냥 그렇다고요. 물론 도랑에 빠지긴 했어도 제 눈엔 팀장님이 훠어얼씬 멋졌지만요.”

흠.

도혁이 한쪽 눈썹을 끌어 올리며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진짠데?

비웃는 걸로 들렸나?

재인이 2차 수습에 들어가려고 하는 찰나, 잠자코 있던 도혁이 입을 열었다.


“서재인 씨, 나랑 내기할까?”

“무슨 내기요?”

“내가 한 과장보다 점수 많이 나오면 소원 하나 들어주기. 대신 내가 지면 서재인 씨 소원 들어줄게.”

“내기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한 과장님이 이길 게 뻔한데.”

“그러니까 서재인 씨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거지. 어때?”

압도적?

재인은 도랑으로 시원하게 빠졌던 도혁의 볼링공을 떠올렸다.

아주 설득력 있네.


‘소원으로 할머니 팔순 잔치에 잠깐이라도 들러달라고 할까?’

재인은 잠시 갈등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나중에 딴소리하지 마세요.”

“누가 할 소리. 서재인 씨야말로 약속 꼭 지켜.”

“당연하죠.”

순간 도혁의 입꼬리가 씩 올라가더니 눈빛이 매섭게 번뜩였다.


“자, 몸 좀 풀었으니 본 게임에 들어가 볼까?”

“본 게임이라니요?”

도혁은 대답 대신 재인의 입술에 길게 입맞춤을 했다.

한참 만에 떨어진 도혁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긴장 좀 해야 할걸? 이제 볼링이 뭔지 확실히 감을 잡았거든.”

“……!”

“자, 이제 그만 가볼까?”

의기양양하게 앞장서는 도혁의 모습에 재인은 큰 실수를 저지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팀장님, 대체 무슨 소원을 비시려고요?”

“비밀.”

“아, 뭔데요?”

“글쎄.”

도혁은 보기만 해도 상쾌해지는 미소를 날리고는 볼링장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뭐야? 설마…… 짐작은 가는데 차마 문자화할 수 없는 그건 아니겠지?’

오싹.

재인은 두 볼을 감싼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에이, 괜한 걱정이야. 애초에 팀장님이 규민이를 이길 리가 없잖아? 절대!’

근데 왜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까.

허둥지둥 도혁의 뒤를 따르는 재인의 볼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 * *



“오랜만에 몸 좀 풀었더니 아주 개운하네!”

활기찬 목소리.

밤샘도 거뜬할 것 같은 생기 넘치는 얼굴.

잘생긴 얼굴을 가득 채운 부담스럽게 환한 미소.

3차로 치맥까지 걸친 긴 회식으로 피곤할 법도 한데, 집에 돌아온 도혁은 어쩐지 아침보다 더 쌩쌩해 보였다.

피곤해서 몸이 땅바닥에 붙을 것 같은 재인은 그런 도혁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생각했다.


‘이건 분명 사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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