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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걸 (75/129)


75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걸
2023.02.18.



 
뜻밖의 질문에 재인은 ‘혹시 엄마가 도혁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싶어 철렁했다.


“아, 아뇨. 곧 일본 갈 건데 만나긴 누굴 만나요.”

―그래? 어휴…….

엄마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 왜 그래요? 무슨 일인데요?”

―저기, 내가 화가 나서 그만…….

엄마를 화나게 한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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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낮, 엄마는 할머니를 모시고 친척 결혼식에 참석했다.

그런데 웬일로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명절이 아니고서는 다른 집안 행사에는 코빼기도 안 비치던 작은엄마가 식장에 나타난 것이었다.


“어머, 형님 그새 주름이 더 늘었네요? 그러게, 관리 안 받으면 폭삭 늙는다니까.”

“남이사. 동서는 서울에서 주름 관리받느라 바쁠 텐데 굳이 왜 내려왔어?”

언제나처럼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칼날이 날아다녔다.


“어머님 뵈러 왔죠. 어머님, 저 보고 싶으셨죠?”

“당연하지. 역시 나 생각하는 건 우진 에미밖에 없구나. 큰애 너는 왜 그렇게 말을 삐뚤게 받아들이니? 우진 에미가 걱정돼서 한 말을 가지고.”

할머니가 언제나처럼 작은엄마의 편을 들며 엄마를 나무랐다.

작은엄마는 할머니가 장손인 우진에게 땅을 다 물려주신다고 해서, 행여 마음이 바뀔까 봐 비위를 맞추는 데 혈안이었다.

엄마는 30년 넘게 갈고 닦은 내공으로 할머니의 편애를 귓등으로 튕겨냈다.

참다 참다 대들어도 보고, 인간적으로 하소연도 해보고, 이것저것 다해보고 내린 결론은 ‘무시가 최고’였다.

그저 뉘 집 멍멍이가 짖는 것이려니, 하고 넘기니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그때 갑자기 작은엄마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우리 우진이 나이가 벌써 서른넷이잖아요. 내년에 결혼하려면 미리 얼굴을 비춰둬야죠, 호호.”

“그게 진짜냐? 우리 우진이가 색싯감이 있어? 누군데?”

할머니가 몹시 반가워하며 물었다.


“부동산 부잣집 딸인데, 정말 다소곳하고 정숙한 아가씨예요. 그 집에서 병원도 차려주고 아파트도 해 오기로 했어요.”

“당연히 그래야지, 암. 우리 우진이 같은 인물에 의사 사위면 감지덕지지.”

엄마가 내공을 발휘해 작은엄마의 자랑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는데, 작은엄마가 가만히 있는 엄마를 건드렸다.


“형님, 재인이는 직급이 뭐였죠?”

“주임. 왜?”

훗.

작은엄마의 눈빛이 의기양양하게 바뀌었다.


“재인이랑 동갑인 우진이 신붓감이 같은 회사 대리던데, 서로 알려나?”

“잘난 대리한테 직접 물어보지, 그래?”

“듣자 하니 재인이 일본 갈 준비한다면서요? 그 나이에 멀쩡한 직장 때려치우고, 너무 무모한 도전 아니에요?”

재인의 얘기가 나오자, 엄마는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동서, 우리 재인이한테 쓸데없는 관심 좀 꺼. 그나저나 우진이 말귀 알아들을 때부터 의사 되라고 세뇌를 시키더니만, 아들 팔아 며느리 덕 좀 보려고 그런 거였구나? 성공했네, 축하해.”

“그럴 만한 능력이 되니까요. 형님, 재인이는 아직도 애인 없죠?”

작은엄마가 눈빛으로 쳐다봤다.

짜증이 난 엄마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받아치려고 하는데, 할머니가 혀를 차며 결정타를 날렸다.


“애가 얼마나 변변치 못하면 여태 애인 하나 없을꼬.”

뚝.

엄마는 그동안 간신히 잡고 있던 정신줄이 뚝 끊겨버리고, 버럭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왜 이래, 우리 재인이도 만나는 사람 있어!”

“정말요? 추석 때까지 없었는데?”

“키도 엄청 훤칠하고 잘생겨서 우진이는 그 사람 옆에 서면 보이지도 않을걸? 진짜 잘나가는 멋진 남자야! 부자에 직업도 좋아.”

“왜 그 얘기를 이제야 하실까? 갑자기 둘러대는 것처럼?”

엄마는 거짓말인 거 다 알고 있어, 라는 작은엄마의 눈빛에 뜨끔했지만, 주변 친척들의 눈이 있어서 후퇴할 수 없었다.


“내, 내 맘이지!”

“잘됐네요. 그럼 어머님 팔순 잔치 때 데리고 오세요.”

“……!”

“진짜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지만. 저도 우진이 신붓감 오라고 했거든요. 잘했죠, 어머님?”

“잘했다, 잘했어.”

할머니가 엄마에게 말했다.


“재인이가 얼마나 잘난 남자 만나나 보게, 어디 한번 데리고 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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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된 거야. 어디서 감히 우리 재인이를 건드려!

말을 마친 엄마는 아직도 분이 안 풀리는지 씩씩거렸다.

재인은 저 때문에 속상해하는 엄마를 보는 게 더 속상했다.


“엄마, 어쩌시려고요? 말한다고 바뀔 분들도 아니고, 화가 나도 그냥 무시하시지.”

―내가 잠깐 정신이 나갔었어. 저기, 그래서 말인데…….

엄마가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혹시 주위에 키도 훤칠하고 잘생긴 데다 직업도 좋고 엄청 부자라서 작은엄마랑 우진이 코를 납작하게 해줄 사람 없니?

“네?”

―없겠지? 아휴…….

본인이 생각해도 너무 질렀다 싶은지 엄마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딱 한 사람 있긴 한데…….’

재인은 자체 발광하는 도혁을 떠올렸다.

재인이 잠자코 있자, 엄마가 기운이 쪽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재인아, 미안해. 내일 출근할 애를 붙잡고 내가 괜한 얘기를 했다. 바빠서 못 왔다고 둘러대면 되지, 뭐. 못 들은 걸로 하고, 어서 쉬어. 우리 딸, 엄마가 많이 사랑해.

전화를 끊은 뒤, 재인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작은엄마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다.

할머니 팔순 잔치에 재인이 혼자 가면 그날 온종일,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게 뻔했다.


‘차도혁 씨한테 부탁해볼까?’

재인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친척들이 잔뜩 모인 곳에 도혁을 데려간다면?

곱지 않은 시선은 둘째치고, 곧바로 결혼식 날짜 잡으라고 난리 칠 게 뻔하다.

게다가 도혁의 성격에 부모님을 만난다면?

도혁이 먼저 나서서 결혼까지 밀어붙일지도 모른다.


‘아니야, 괜히 일만 커질 거야. 그날 짜증이 나더라도 몇 시간 참고 말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으면서도, 자꾸만 엄마의 한숨 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마음에 걸리는 재인이었다.

* * *

아쉽기만 한 나흘간의 달콤한 연휴가 끝나고, 재인과 도혁은 월요일 아침을 맞이했다.

재인은 먼저 출근하는 도혁을 배웅하며 물었다.


“팀장님, 혹시 1월 1일에 바쁘세요?”

도혁은 멈칫하더니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어쩌지. 그날은 본가에 다녀와야 하는데.”

“아, 그러시군요.”

어젯밤부터 고민하다 어렵게 말을 꺼낸 재인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바빠서 함께 가지 못했다는 게 사실이 되는 거니까.


“왜? 무슨 일 있어?”

“아, 아니요. 그냥 바람 쐬러 나갈까 했는데 바쁘시다니까 됐어요.”

“정말 그게 다야?”

“네, 신경 쓰지 마세요.”

재인은 애써 환하게 웃어 보였다.


“미안해. 중요한 일이라 빠질 수가 없네. 대신 주말에 데이트하자. 서재인 씨 가고 싶은 곳으로.”

“좋아요.”

도혁의 입에서 데이트라는 말이 나오자 재인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그럼 갈게. 회사에서 봐.”

 

 
도혁은 이제는 당연한 의식처럼 재인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고는 출근길에 나섰다.

재인의 할 말이 남은 듯한 표정이 마음에 걸렸지만, 새해 첫날에는 꼭 할아버지 차대산 회장을 만나야 해서 어쩔 수 없었다.

지난 주말, 도혁이 서진물산 파티에 가지 않아 화가 머리끝까지 난 차 회장이 집으로 쳐들어오겠다고 하는 것을 간신히 뜯어말렸다.

대신 차 회장은 1월 1일 오후에 자신의 집에서 직계 가족들이 다 모이는 식사 자리에 꼭 참석할 것을 명했다.

매년 초 연례행사로 작은아버지네 식구는 물론 고모네를 비롯해 다른 친척들까지 모이는 자리였다.

이제까지 도혁은 친척들 사이의 날 선 분위기가 싫어서 집안 모임에 잘 참여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도혁의 삶에 있어 중요한 결전의 날이었다.

차 회장이 전화를 끊기 전에 최후의 통첩을 날렸기 때문이다.


「그날 네 결혼 문제 담판을 짓자. 그러니까 꼭 오너라.」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도혁은 그날 할아버지에게 재인의 존재를 알리고 정략결혼을 엎어버리리라 다짐했다.

* * *

땅!

와르르!

시원한 소리를 내며 볼링핀이 쓰러졌다.

그날 저녁, 재인과 상품기획 1팀 팀원들은 회사 근처에 있는 ‘월드락볼링장’ 맨 안쪽 두 레인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모두 모일 수 있는 시간이 월요일뿐이어서 급히 결정된 송년회였다.

‘회식은 술’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던 박 과장에게 ‘술 얘기가 듣기 불편하다’고 말한 도혁 때문에 아주 건전하게 식사하고 볼링을 치러 온 것이었다.

사실 그 말은 도혁이 아슬아슬한 분위기였을 때 술을 핑계로 도망친 재인에게 찔리라고 한 말이었지만, 어찌 됐든.

오는 길에 때마침 상품기획 2팀과 마주쳤는데, 박상운 과장의 오지랖이 발동해 민우를 비롯한 상품기획 2팀 팀원 둘까지 회식에 합류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다른 팀을 핑계로 술을 마셔볼 꿍꿍이인 것 같았다.


‘나 때문에 술 마시는 것까지 눈치 보고, 박 과장님한테 괜히 미안하네.’

생각해보니 이 모든 게 도혁의 말 한마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마시면…… 참기 힘들 것 같아서.」

술을 마시면 못 참을 것 같다고 했던 도혁의 말의 진의를 알고 있는 재인은 제풀에 낯이 뜨거워졌다.

이제 참지 않겠다던 도혁은 키스까지는 괜찮다는 재인의 말을 충실히 받들어 사귄 이후로 시도 때도 없이 키스를 퍼부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기다리겠다는 약속을 지키느라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잘 참아내고 있었다.

그런 그가 믿음직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너무 힘들어 보여서 미안한 재인이었다.


‘그치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걸.’

재인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뒤편 계산대 앞에 서 있는 도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편, 도혁은 민우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말을 건네고 있었다.


“나 팀장님, 그때는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지난번 도혁이 재인과의 사이를 오해해서 민우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이후, 처음으로 마주한 자리였다.

민우는 경직된 도혁 얼굴을 보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재인이한테 대충 얘기는 들었습니다. 지난 일을 생각해보니 저라도 오해할 만하더군요. 하하.”

“아닙니다. 제대로 확인도 안 해보고, 제가 너무 경솔했습니다.”

“벌써 다 잊었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정 미안하면 우리 재인이한테 더 잘해주시고요.”

“당연하죠.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고.

전에는 민우가 ‘우리 재인이’라고 할 때마다 그렇게나 거슬렸는데, 이제는 너무나도 정감 있게 느껴지는 도혁이었다.


“차 팀장님, 31일 저녁에 저희 신혼집에서 조촐하게 홈파티를 할까 하는데, 시간 괜찮으시면 재인이랑 오시겠어요? 서연이가 몹시 궁금해해서요.”

“아, 그럼요. 그때 실례가 많았는데 제대로 사과도 할 겸 꼭 가겠습니다.”

“그럼, 그때 뵙죠.”

민우와 도혁은 활짝 웃으며 팀원들에게로 돌아갔다.

잠시 후, 두 팀은 치맥을 걸고 내기를 하기로 했다.


“5:5로 편을 나누려면 상품기획 2팀으로 두 명이 가야 하는데 누가 가죠?”

박 과장의 질문에 줄곧 묵묵히 있던 규민이 상품기획 2팀으로 자리를 옮기며 말했다.


“저랑 서 주임이 갈게요.”

“어? 어어?”

재인이 저항할 겨를도 없이 규민이 그녀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엉겁결에 상품기획 2팀 사이에 폭 끼인 재인은 얼떨떨한 얼굴로 도혁을 쳐다봤다.

도혁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갑자기 규민이 재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재인아, 미안. 이렇게 소심하게라도 팀장님한테 복수해야겠어.”

“뭐? 그럼 일부러?”

“이걸로는 성에 안 차지만 아쉬운 대로.”

“한규민, 너 정말!”

규민은 나무라는 재인을 보며 씩 웃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무슨 비밀 얘기라도 나눈 것처럼 보이도록.

곧 도혁의 미간에 세로줄이 깊게 패었고.

그 모습을 본 규민은 비로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재인에게서 떨어졌다.

재인은 난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마음이 편안해졌다.

고백을 거절한 뒤로 규민의 안색이 어두워 걱정했었는데 예전의 장난기 많은 친구로 돌아온 것 같아서.

그때, 도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매를 휙휙 접어 올렸다.

그러고는 전의에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규민을 쳐다보며 말했다.


“자, 그럼 시작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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