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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손만 잡고 잘게 (74/129)


74화. 손만 잡고 잘게
2023.02.14.


두근.

어차피 나중에 같이 살게 되면?

계속?

앞으로도 재인과 함께 살 거라는 걸 티끌만큼도 의심하지 않는 듯한 도혁의 말에 재인은 가슴이 미칠 듯이 떨렸다.

재인은 새빨개진 얼굴로 말을 돌렸다.


“바, 바쁘셨을 텐데 언제 준비하신 거예요?”

“지난주 주말에 김 실장님과 직접 보고 골랐어.”

“이런 것까지 신경 쓰시고, ‘극한직업 김 실장님’이라도 찍으셔야겠어요.”

“고르긴 내가 거의 다 골랐어. 김 실장님은 어제 아침, 우리가 출발한 뒤에 도와주셨지. 아무튼, 이제 만들고 싶은 거 마음껏 만들어.”

“근데요, 저 이거 받으면 안 될 것 같아요.”

도혁은 예상치 못한 재인의 반응에 당황했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뇨. 정말 마음에 들어요. 근데…….”

재인이 말을 잇지 못하자 도혁이 재촉하듯 물었다.


“왜? 뭐가 문제지?”

“이렇게 큰 선물을 넙죽 받으면, 왠지 제가 책임져야 할 것 같잖아요.”

하아아.

긴장이 풀린 도혁의 입에서 맥없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럼 서재인 씨는 나, 책임지지 않으려고 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과분해서요.”

도혁은 재인을 끌어당겨 넓은 가슴팍에 품으며 나직이 말했다.


“마음 편히 받아줘. 그리고, 이건 덤.”

말이 끝나자마자 도혁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부드럽고 따뜻한 입술이 잠시 닿았다 떨어지는 짧은 순간, 재인은 온몸에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재인은 두근대는 가슴을 달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덤은 됐어요. 이거야말로 진짜 부담스럽네요.”

“뭐? 너무하네.”

도혁이 짓궂은 표정으로 울상을 지으며 애교를 부렸다.

대체 이 남자의 독설 넘치고 괴팍했던 모습은 어디로 사라진 거지?

재인은 달콤한 꿈속을 거니는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꿈에서 깨고 싶지 않은데.

차도혁 씨와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막연한 두려움이 어김없이 이어졌다.

재인은 애써 불안을 떨치며 도혁의 따뜻한 품에 얼굴을 묻었다.


“팀장님, 고마워요.”

 

* * *

12월 26일 토요일 저녁.

유라가 사는 단독 주택 앞에 고급 외제차가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내린 멀끔하게 생긴 남자가 재빨리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

단아하게 차려입은 유라가 다소곳이 차에서 내렸다.

엄마의 성화로 미용실까지 들러 단장을 해서인지, 오늘따라 더욱 매력적인 유라였다.


“유라 씨,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저도요. 조심히 가세요.”

유라가 손을 흔들며 차를 배웅하고 돌아섰을 때였다.

느닷없이 성준이 나타나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유라 씨, 선은 잘 봤습니까?”

“아우, 깜짝이야! 여긴 어쩐 일이세요?”

유라는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성준을 쳐다봤다.

그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헤어진 뒤로 연락이 안 돼서 설마설마했는데, 너무하시군요.”

“부모님 체면 때문에 안 나갈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제가 문자 보냈잖아요.”

“아, 그 밑도 끝도 없는 문자 말입니까?”

이틀 전 크리스마스이브 날 밤.

무언가에 홀린 듯 성준과 농도 짙은 스킨십을 하다 헤어진 유라는 곧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분명 키스는 성준과 했는데 성지훈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성준의 얼굴에 성지훈의 얼굴이 계속 겹쳐 보여서 황홀한 가운데 몇 번이나 흠칫 놀랐었다.

왠지 성준을 이용한 것 같은 죄책감마저 들었다.

앞으로도 그를 볼 때마다 성지훈이 떠오를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안 될 일이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성준에게 사과 문자를 보낸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다 제 탓이에요.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성준의 전화와 문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유라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죄송해요. 백번 넘게 생각해봐도 도저히 안 되겠어요.”

성준은 초조해 보이는 눈빛과 달리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유가 뭡니까?”

“성준 씨를 보면 자꾸 성지훈이 생각나서요.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하! 그것 때문이라니……. 다른 이유는요?”

“없어요.”

같은 사람이니 당연히 생각날 수밖에.

이거야, 원. 얼굴을 바꿀 수도 없고.

성준은 꼬인 매듭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했다.

유라와 처음 키스한 이후, 성준은 그녀를 보낼 수 없음을 깨달았다.

고심 끝에 아무 문제 없이 유라와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진짜 ‘김성준’으로서 유라를 만나는 것.

김성준 자신으로서 유라를 찾아간 크리스마스이브.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유라와 로맨틱한 연애를 할 생각에 성준은 실로 오랜만에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을 느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또 다른 자신 ‘성지훈’에게 발목이 잡힌 것이었다.

성준은 성지훈이 자신이라고 얘기할 수도 없고 난감하기만 했다.


“유라 씨, 대체 성지훈 씨의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못 잊는 겁니까?”

“못 잊는다기보다는…… 아무튼 죄송해요.”

“곤란합니다. 전 책임지겠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자꾸 이러시면 더 미안하잖아요. 전 더 할 말 없으니 그만 들어갈게요. 죄송합니다.”

유라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곧장 벨을 눌렀다.

성준이 다급히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서른다섯 한심한 백수에, 갑자기 사라진 최악의 남자보다야 제가 훨씬 낫지 않습니까? 그런 무책임하고 이상한 사람은 깨끗하게 잊고 저와 다시 시작해요.”

성준의 말에 유라가 발끈하며 받아쳤다.


“저기요, 김성준 씨! 만난 적도 없는 사람을 뭘 안다고 그렇게 함부로 얘기해요? 제가 뭐라고 하는 건 그럴 수 있어도, 성준 씨까지 그러는 건 아니죠? 잠시였지만 제가 좋아했던 사람인데.”

“그러니까 그 성지훈이…….”

바로 ‘나’입니다!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한 성준은 머리가 지끈거려 이마를 짚었다.

그 순간, 부루퉁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던 유라가 성준을 향해 소리쳤다.


“스톱! 꼼짝하지 마요.”

성준은 흠칫 놀라 얼음이 된 채 멍하니 유라를 쳐다봤다.

잽싸게 성준에게 다가간 유라는 이마를 짚고 있는 그의 손을 낚아채 소매를 홱 걷어 올렸다.

고스란히 드러난 그의 손목에는 유라의 팔목에 걸려 있는 팔찌와 똑같은 커플 팔찌가 걸려 있었다.


“이건?”

“아……!”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성준이 아차, 하는 사이, 유라가 단정하게 빗어 올린 그의 앞머리를 흐트러뜨려 눈 위로 덥수룩하게 내렸다.


 
순식간에 유라의 눈앞에 어처구니없게 사라졌던 성지훈이 나타났다.


“성지훈?”

“아! 유라 씨, 그게…… 잠깐 제 말 좀…….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성준이 사색이 된 얼굴로 변명이라는 걸 시작하려던 그때, 인터폰에서 유라 엄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누구세요? 유라니?

갑자기 유라가 성준의 팔을 끌고 어둠 속으로 숨었다.


―아무도 없나? 또 누가 장난쳤나 보네. 쯧.

인터폰이 끊기고, 벽에 바짝 붙은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유라가 성준을 올려다보며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성준 씨, 아니, 지훈 오빠, 내가 만나면 어떻게 한다고 했죠?”

“……부숴버린다고…….”

“잘 기억하고 있네요? 자, 일단 어디 조용한 데 들어가서 변명이나 한번 들어볼까요?”

“유라 씨, 죄송합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시끄럽고, 따라와요.”

유라가 분노에 찬 걸음걸이로 앞장을 섰다.

휴우. 성준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



“가지 마.”

“안 돼요.”

“꼭 날 두고 지금 가야 해?”

“네.”

“너무하네. 서재인 씨, 원래 이렇게 매정한 사람이었어?”

기가 막혀서.

누가 보면 어디 멀리 가는 줄 알겠네.

어이가 없는 재인이었다.

크리스마스 연휴의 마지막 날인 일요일 밤.

재인은 방문 앞에서 도혁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도혁은 못내 아쉬운 듯 재인과 깍지낀 손을 풀지 못했다.

재인은 어린아이처럼 매달리는 도혁을 달래며 말했다.


“팀장님, 벌써 11시가 넘었어요. 내일은 출근하려면 빨리 자야죠.”

“자야지, 자야지, 그럼…….”

도혁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물었다.


“같이 잘까? 내 방까지 가려면 너무 먼데.”

“그걸 핑계라고? 됐거든요!”

재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도혁이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손만 잡고 자면 되잖아. 약속할게.”

“팀장님한테 한두 번 속아야죠. 됐습니다.”

“이번엔 진짜야.”

“네, 네, 그러시겠죠. 기다리겠다고 선언한 굳건한 의지의 소유자 차도혁 씨는 어서 방으로 가서 안녕히 주무세요.”

재인은 이대로는 끝이 없을 것 같아 도혁의 등을 떠밀었다.


“알았어. 그럼, 잘 자.”

쪽.

도혁은 재인의 입술에 뽀뽀하고 아쉬운 듯 뒷걸음질 치며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마저도 너무 멋있어서 재인은 하마터면 그를 붙잡을 뻔했다.

방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서도 가슴이 들떠서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도혁과 보낸 달콤한 순간들이 무한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주말인 어제오늘, 재인과 도혁은 처음으로 업무에 관련된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연인들처럼 같이 밥을 해 먹고, 손잡고 강변을 산책하고, 카페에서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누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그 모든 것이 두 사람에게는 처음 해보는 제대로 된 데이트였다.

재인은 도혁과 보내는 시간이 너무 편안하고 행복했다.

막상 사귀게 됐다가 상대에게 실망하면 어떡하지, 라며 고민하고 망설였던 과거가 아깝게 느껴질 만큼.

같이 있으면 불편하고 두렵기만 해서 열심히 피해 다녔던 그 차도혁 팀장님인데.


‘그랬던 팀장님과 잠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니, 정말 믿기지가 않아.’

불현듯 도혁의 단단한 가슴에 폭 안겨 입을 맞췄던 순간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키스 후에 귓가를 간지럽히던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까지.

재인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Rrrrrrr.

Rrrrrrr.

갑작스러운 전화벨 소리에 재인은 비로소 현실로 돌아왔다.


“엄마,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재인이 반갑게 전화를 받자 엄마의 쾌활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 끝나고 우리 딸 생각나서 전화했지. 별일 없지?

아주 큰일이 있긴 했는데요.

재인은 입이 간지러웠지만, 남자친구가 있다고 밝히기에는 아직 때가 일렀다.


“맨날 똑같죠, 뭐. 크리스마스 때 바쁘셨죠? 못 도와드려서 죄송해요.”

―너 없어도 잘 돌아갔으니 걱정 마. 오늘 김 원장님한테서 현아 얘기 들었어. 큰일 날 뻔했는데 회사 팀장님이 도와주셨다며? 감사하다고 꼭 인사 잘 드려.

더는 별말이 없는 걸 보니 김 원장이 비밀을 잘 지켜준 것 같았다.


“그럼요. 그나저나 대목이라 무리하셨을 텐데 엄마 아빠 건강 잘 챙기세요.”

―너야말로. 참, 정초에 있는 할머니 팔순 잔치 때 내려올 거니?

아, 맞다!

그동안 정신없이 많은 일을 겪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당연히 가야죠.”

―그래. 달가운 자리는 아니겠지만…….

엄마가 씁쓸하게 말했다.

재인의 입양을 결사반대했던 할머니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재인을 못마땅해했다.

그래도 사랑하는 남편을 낳아주신 분이라 속상해도 제 할 도리는 하는 엄마였다.

재인은 엄마가 자기 때문에 신경 쓰는 게 더 속이 상했다.


“괜찮아요. 그 얘기 하러 전화하셨어요?”

―응? 아니, 그게 말이지…….

엄마는 당황한 듯 얼버무리다 입을 딱 다물었다.


“왜요? 뭐 다른 하실 말씀 있으세요?”

재인이 재촉하자 엄마는 그제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재인아, 혹시 너 요새 만나는 사람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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