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점점 더 좋아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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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점점 더 좋아져요
2023.02.11.
의사는 군기가 바짝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한세병원 조 원장님이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시고…….”
한세병원?
재인은 놀란 눈으로 도혁을 쳐다봤다.
한세병원은 국내 최고의 종합병원으로 진료 대기만 몇 달씩 걸리는 곳이었다.
휴대전화에 대고 현아의 상태를 상세히 설명하던 의사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네, 네, 그럼,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통화를 마무리한 의사가 도혁에게 다시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조 원장님, 감사합니다. 서울에 가서 뵙지요.”
도혁은 깍듯이 인사하고 전화를 끊었다.
의사는 놀란 눈으로 도혁에게 물었다.
“어떻게 조 원장님을 아십니까?”
“어쩌다 보니.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1시간 뒤에 의료헬기로 서울까지 이송하기로 했습니다.”
“헬기로요?”
재인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의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한세병원에서 지원해주기로 했습니다. 그쪽에 도착하면 곧장 정밀 검사부터 하고, 수술은 다음 주 중에 하기로 했습니다. 한세병원 소아심장과는 국내 최고이니 믿고 맡기셔도 될 겁니다.”
의사의 밝은 목소리에 재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에요. 그럼 어떻게든 빨리 수술비를 마련해야겠네요.”
“그것도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조 원장님이 한세병원 재단에 들어온 기부금으로 수술을 받게 해주신답니다.”
“네?”
제 귀로 듣고도 믿기지 않아, 재인은 넋이 나간 얼굴로 도혁을 바라봤다.
도혁은 담담한 얼굴로 의사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
.
.
“팀장님, 우리 현아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병실로 돌아온 재인은 도혁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도혁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재인은 그의 도움이 눈물 나게 고마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이번 일로 자신의 세상과 도혁이 사는 세상의 간극을 새삼 깨닫게 돼서.
이제 갓 제 마음을 확인한 재인은 차도혁 한 사람만 바라봤지, 그의 주변까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문득 서연이 민우와 집안 차이로 고충을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마음 편히 살려면 비슷한 집안끼리 만나는 게 좋은 것 같아. 너무 차이 나도 골치 아파. 재인이 너도 참고해.」
잊으려 해도 서연의 충고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그들보다 훨씬 차이가 나는 도혁과 자신은 넘어야 할 산이 얼마나 높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차도혁 씨와 끝까지 함께할 수 있을까?’
갑자기 도혁이 없는 세상을 맞이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며칠 사이에 그에게 깊이 빠져버린 재인이었다.
재인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을 애써 외면하며 도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현아를 안색을 살피던 도혁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자는 얼굴이 마치 천사 같군.”
“정말 그러네요.”
평온하게 잠든 현아를 보자 재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감사가 샘솟았다.
‘그래, 현아가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만으로 충분해. 그거면 됐어.’
그리고 이 순간, 도혁이 바로 눈앞에 있지 않은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금의 행복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재인은 몸을 기울여 도혁의 귓가에 속삭였다.
“팀장님, 어떡하죠?”
“뭐가?”
“팀장님이 점점 더 좋아져요.”
“……!”
잠시 멍하니 굳어 있던 도혁은 이내 재인을 와락 끌어안았다.
“어떡하긴, 평생 책임지면 되지. 전략적으로!”
장난스레 쿡쿡 웃는 목소리에 행복이 흠뻑 묻어나 있었다.
“아, 깜박할 뻔했다! 팀장님, 잠깐 놔주세요.”
재인은 도혁의 품에서 벗어나 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러고는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한 도혁에게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빨간색 포장지로 싼 납작한 상자였다.
“별건 아니지만,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날 위해 준비한 거야?”
도혁은 어린아이처럼 들뜬 표정으로 포장지를 뜯었다.
상자 속에는 은은한 무늬가 들어간 진회색 머플러가 들어 있었다.
“직접 짜 드리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서요.”
“고마워! 마음에 쏙 들어.”
머플러를 둘러맨 그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다행이에요. 급히 준비해서 마음에 안 들면 어쩌나 걱정했거든요.”
“서재인 씨가 주는 건데 그럴 리 없잖아. 꽃분홍색이라도 하고 다녔을 거야.”
재인은 도혁의 너스레에 웃음이 터졌다.
“어떡하지? 내 선물은 서울에 있는데.”
“괜찮아요. 이미 많이 주셨잖아요.”
도혁이 재인의 손을 살며시 어루만지며 말했다.
“서재인 씨가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야. 그래서 나는 아무리 주고 또 줘도, 평생 다 보답할 수 없을 거야.”
“팀장님…….”
재인은 떨리는 손으로 도혁의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순간에 젖어 들었다.
* * *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서진물산 대연회장에서는 창립기념일 겸 송년 파티가 한창이었다.
북적거리는 연회장 곳곳에 각계의 유명 인사들이 눈에 띄었다.
차대산 회장은 서진물산 윤문식 회장의 가족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넉넉한 풍채와 달리 매서운 인상인 윤 회장은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도혁이 지난번 선 자리에서 세정을 바람맞힌 것도 충분히 못마땅한데, 오늘 같은 자리에마저 나타나지 않자 더는 서운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던 것이었다.
“도혁 군이 굉장히 바쁜가 봅니다. 저는 물론이고 우리 세정이도 많이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이, 아버지도 참. 제가 뭘요.”
세정은 꽉 어금니를 깨물며 일부러 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어제 낮에 그렇게 차갑게 끊어내고 나갔으니 도혁이 오지 않을 거라는 건 이미 짐작하던 바였다.
하지만 막상 아버지의 심기가 편치 않은 것을 보자 도혁에게 집안 전체가 무시당한 것만 같아 분했다.
“미안합니다. 어제는 온다고 했었는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나 봅니다.”
차 회장은 감감무소식인 도혁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일부러 더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이 일에 빠지면 아무도 못 말리거든요. 타고난 사업가라 여기시고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아무리 바빠도 혼담이 오가는 상황에서 예비 사위 얼굴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럼요. 제가 곧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차 회장은 자신의 뜻을 따르지 않는 도혁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떻게 해야 세정과의 혼담 자리에 앉힐 수 있을지 고심하느라 음식에 손도 대지 않았다.
그때, 호리호리한 반백의 남자가 차 회장에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차 회장님도 와 계셨군요. 요즘 건강은 괜찮으시지요?”
“아아, 조 원장! 덕분에 아주 건강하지.”
“다행입니다. 참, 조금 전에 도혁 군과 통화했습니다.”
뜻밖의 인물에게서 도혁의 이름이 나오자 차 회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래, 뭐라고 하던가?”
“지금 광주에 내려가 있던데요?”
‘광주’라는 말에 테이블에 앉은 이들이 깜짝 놀라 차 회장을 쳐다봤다.
차 회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일이 있어서 광주에 내려갔는데, 연말이라고 조 원장한테 안부 전화를 한 모양이구먼. 그나저나 자네, 요즘 병원은 좀 어떤가?”
말을 돌리는 차 회장의 눈빛이 싸늘하게 바뀌었다.
‘이런. 뭔가 실수한 건가?’
도혁의 부탁을 들어줬다고 티 내려던 조 원장은 곧장 수습에 들어갔다.
“덕분에 잘되고 있습니다. 도혁 군이 다음에 회장님 모시고 건강검진 받으러 오겠다고 하더군요. 어찌나 예의 바른 청년인지. 하하.”
경험을 통해 쌓아 올린 두 사람의 노련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윤문식 회장의 예리한 촉을 비켜 갈 수는 없었다.
“오늘 같은 날 먼 곳까지 내려가다니 아주 중요한 일인가 봅니다?”
“거기 있는 업체와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요.”
“아무리 바빠도 잠깐 얼굴 볼 시간은 있겠죠? 곧 새해고 하니, 신년 인사도 할 겸 다음 달 초에 자리를 마련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석연치 않은 표정의 윤 회장은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다.
차 회장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당연히 시간을 내야지요.”
“두 집안에 곧 경사가 있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미리 축하드립니다.”
조 원장의 인사치레에 웃어 보이긴 했지만 차 회장은 속내가 복잡했다.
아까 통화할 때 성준은 도혁의 행방을 모르겠다며 죄송하다고만 했었다.
‘김 실장이 도혁이 그 녀석을 감싸고 있는 게 분명해. 이놈은 대체 거기서 무슨 짓을 하는 게야?’
답답하지만 윤 회장의 눈치가 보여 조 원장을 붙들고 물어볼 수도 없는 상황.
차 회장은 조 원장에게 슬그머니 눈짓을 보내며 말했다.
“조 원장, 대산재단에서 한세병원에 기부 금액을 좀 늘릴까 하는데,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따로 상의하세.”
“감사합니다, 차 회장님! 그럼 연락드리겠습니다.”
조 원장은 화색이 도는 얼굴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 * *
이튿날, 크리스마스 당일.
재인과 도혁은 보육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보내다 늦은 오후가 돼서야 떠날 채비를 했다.
시환이 옷가지가 들어 있는 작은 가방을 재인에게 건네며 말했다.
“재인아, 서울 올라가면 이것 좀 엄마한테 전해줄래?”
어젯밤, 한세병원으로 옮겨지는 현아를 급히 따라가느라 김 원장이 미처 챙기지 못한 짐이었다.
“알았어. 올라가자마자 병원에 들를게.”
“고마워, 부탁할게.”
시환은 못내 아쉬운 얼굴로 재인을 바라봤다.
“재인아, 이다음은 일본에서 보겠구나.”
“그렇네. 시환 오빠, 잘 가고 그때 연락할게.”
재인은 시환과 악수하고 아이들을 한 번이라도 더 보겠다며 자리를 떠났다.
시환과 도혁, 두 남자만 남아버린 상황.
시환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도혁에게 인사를 건넸다.
“차도혁 씨, 현아를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건 그렇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던데, 재인이 혼자 보내기 불안하시겠어요.”
시환이 짓궂은 표정으로 씩 웃었다.
도혁은 한쪽 눈썹을 끌어올리며 응수했다.
“전혀. 날파리 꼬이는 것쯤이야 신경도 안 씁니다.”
“재인이한테 잘해주세요. 재인이 눈에 눈물 나면 애써 참아왔던 제 이성이 끊길지도 모르니까요.”
“그럴 일 절대 없을 테니 꿈 깨시죠. 부디 일본 미인 만나서 행복하시길.”
사뭇 진지한 도혁의 표정에 시환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재인이가 남자 보는 눈은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어제는 싫었는데 오늘은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경계가 조금은 허물어진 도혁이었다.
시환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재인이 여덟 살 때까지 여기에 있었던 건 아시죠?”
“압니다.”
“부모님은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집안사람들이 재인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래서, 입양 가서도 어렸을 때 마음고생을 많이 했어요.”
“…….”
“그러니까, 재인이 많이 아껴주고 든든하게 지켜주세요. 잘 부탁합니다.”
시환의 진심에 재인이 대한 안쓰러움이 더해져 도혁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저씨, 재인이 누나 절대 울리지 마요! 울리면 가만 안 있을 거예요.”
언제부터 있었는지, 갑자기 현우가 도혁의 앞에 불쑥 튀어나왔다.
너까지?
도혁은 상기된 얼굴로 진지하게 으름장을 놓는 현우를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웃지 마요! 진짜예요.”
“이런. 너무 무서운걸. 오늘 밤 잠은 다 잤네.”
“장난 아니라니까요! 암튼 아저씨……. 아니.”
발끈하던 현우가 갑자기 조용해지더니 꾸벅 고개를 숙였다.
“산타 할아버지, 제 소원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현아랑 평생 잊지 않을게요.”
도혁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현우를 토닥이며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현아는 건강해질 거야. 다 잘될 거니까 안심해도 돼. 약속할게.”
* * *
“어머, 이게 다 뭐예요?”
집에 돌아온 재인은 눈이 번쩍 뜨였다.
넓지만 텅 비어서 광활하게 느껴졌던 주방이 오븐과 발효기, 반죽기 등 제과 제빵에 필요한 기구들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크리스마스 선물. 서재인 씨가 바빠서 베이킹 할 새가 없다며.”
언젠가 재인이 지나가는 말로 했던 말이었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니.
그러고 보니 도혁은 몇 번이나 세심한 배려로 재인을 놀라게 했었다.
배고프다고 하는 걸 듣고 호텔 레스토랑에 데려가고,
춥다고 하니 코트를 벗어주고,
짐이 무거울까 봐 약속 장소까지 차로 데려다주고,
재인이 깰 때까지 차에서 1시간 넘게 기다려주고,
좋아하는 베이크 문에도 데려가고…….
그때는 제멋대로에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라고 투덜댔었는데.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좋아해서였다는 것을 알게 된 지금, 재인은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걸 다요? 저 곧 일본 가는데 아깝잖아요.”
도혁이 무심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깝긴. 어차피 나중에 같이 살게 되면 계속 서재인 씨가 쓸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