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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해주실 거죠, 오빠? (72/129)


72화. 해주실 거죠, 오빠?
2023.02.07.


원래 산타 역할을 맡았던 사회복지사가 눈길에 미끄러져 허리를 삐끗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도혁이 대타를 서게 된 것이었다.

재인의 간곡한 부탁으로 그럴듯하게 분장을 하긴 했다.

하지만.

하하하하!

하고 산타 웃음소리를 내려니 온몸에 닭살이 쫙 돋으면서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는 도혁이었다.


“암튼 난 못 해! 못 해!”

도혁의 반항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재인이 시무룩한 얼굴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팀장님, 제가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도 안 돼요? 그렇게 싫으시면 어쩔 수 없죠.”

“서재인 씨……?”

“산타 할아버지는 썰매 타고 오다 교통사고가 나서 루돌프랑 응급실에 실려 갔다고 하면 되죠, 뭐. 아이들이 산타 할아버지를 많이 기다렸는데 실망이 크겠어요, 그죠?”

 

 
재인이 사슴 같은 눈망울로 올려다보자, 도혁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었다.


“……그래도 이건 무리…….”

“팀장님, 잠깐 고개 좀 숙여보세요.”

“응?”

도혁이 무심코 고개를 숙였다.

재인은 가짜 수염을 끄집어 내리고는 자그마한 손으로 그의 두 볼을 감싸며 속삭였다.


“저도 크리스마스이브 날 밤에는 산타 할아버지를 꼬옥 만나고 싶었는데.”

그다음 순간, 한껏 발돋움한 재인이 도혁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도톰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닿자 도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화르륵 달아올랐다.

재인은 때를 놓치지 않고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결정타를 날렸다.


“산타 해주실 거죠, 도혁 오빠?”

오빠?

오빠아아아!!!!!!!!!!

도혁의 도파민이 한계 수치를 단숨에 뛰어넘었다.


“물론이지! 백번도 할 수 있어.”

대답과 동시에 도혁은 재인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재인이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입술을 덮쳤다.

그것도 잠시,

촉촉한 감촉에 젖을 새도 없이,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드르륵 문이 열렸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은 황급히 떨어졌다.


“어머, 차 팀장님 벌써 준비 다 끝나셨네요?”

김성희 원장이 현우를 데리고 들어왔다.


“갑자기 부탁드려서 당황하셨을 텐데 산타를 맡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김 원장이 고개 숙여 인사하자, 도혁은 언제 싫다고 했냐는 듯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말씀을요. 맡겨만 주십시오. 하하하하.”

“저랑 재인이는 먼저 가서 아이들이랑 기다리고 있을 테니, 10분 뒤에 여기 선물 보따리를 들고 오시면 돼요.”

김 원장은 재인을 데리고 나가면서 현우에게 신신당부했다.


“현우야, 산타 할아버지 잘 모셔 와야 해.”

문이 닫히자 현우가 콧방귀를 뀌었다.


“쳇, 웃겨! 산타 할아버지 따위가 세상에 어디 있다고.”

도혁은 시니컬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맹랑한 녀석이 신경에 거슬렸다.


“어이, 너도 어렸을 때는 산타를 믿었을 거 아니야?”

“그딴 거 없다는 거 유치원 때부터 알았거든요.”

하긴.

도혁은 산타가 없다는 걸 다섯 살 때 알아버렸다.

산타를 만나려고 자는 척하며 기다리다가, 선물을 가져다 놓는 아빠의 비서와 눈이 딱 마주치는 바람에.

비서 아저씨의 사색이 된 얼굴이 아직도 기억난다.


“넌 산타 할아버지에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냐?”

“소원을 빌어도 하나도 안 들어줬으니까.”

“무슨 소원이었길래?”

“…….”

순간 현우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도혁은 일부러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말하기 싫으면 됐어. 사실 하나도 안 궁금한데 그냥 물어본 거니까.”

현우는 도혁을 힐끔 쳐다보더니 입술을 삐죽였다.


“쳇! 재인이 누나는 이런 아저씨 어디가 좋다고.”

“잘생겼잖아.”

그 누구도 감히 반박할 수 없는 정답을 던지며 씩 웃는 도혁이었다.

* * *



“하하하하. 어린이 여러분, 반가웠어요! 그럼 다음 크리스마스에 또 만나요. 그때까지 채소도 골고루 먹고 건강하게 잘 지내기로 산타 할아버지랑 약속하는 거예요, 알았죠? 약속! 하하하하.”

도혁은 호탕하게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크게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가는 도혁을 보며 재인은 생각했다.


‘차도혁 씨, 진짜 마음만 먹으면 끝장을 보는 사람이구나. 잘해도 너무 잘해!’

도혁은 일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산타 연기도 끝내줬다.

김 원장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재인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내내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시환도 좀 하는군,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재인은 선물을 뜯느라 신이 난 아이들에게 케이크와 간식을 나눠 주고 뒷문으로 살짝 빠져나갔다.

다용도실에 들어가니 도혁은 그새 옷을 다 갈아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팀장님, 정말 최고였어요! 이렇게 잘하실 거면서 엄살은.”

“서재인 씨, 나한테 이런 것까지 시켰으니 단단히 책임져야 할 거야.”

“치, 책임은 무슨…….”

“일단은 아까 하던 걸 마저?”

갑자기 도혁이 재인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그 바람에 앉아 있는 도혁의 얼굴에 그녀의 가슴팍이 살짝 닿았다.

꺄악!

재인이 기겁하며 도혁의 어깨를 붙잡고 밀어냈다.


“안 돼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어서 저녁 먹으러 가야죠.”

“배 하나도 안 고파.”

“아이참, 시도 때도 없이 이러시면 곤란해요.”

“아까 도혁 오빠, 하면서 먼저 불을 지른 게 누군데?”

새빨개진 얼굴로 재인이 수줍게 말했다.


“그거야, 어쩔 수 없이 전략적으로…….”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도혁의 마지막 인내심이 뚝 끊겼다.

도혁은 손을 뻗어 재인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럼, 전략적으로 책임져봐.”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 재인의 가슴이 두방망이질 쳤다.

도혁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재인의 얼굴이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졌다.

두근두근.

두 사람의 심장박동이 가파르게 빨라지던 그때였다.


“꺄악!”

밖에서 난데없는 비명이 들려왔다.


“현아아! 정신 좀 차려봐!”

“원장님, 현아가 쓰러졌어요!”

마주친 재인과 도혁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다음 순간, 사색이 된 재인이 밖으로 뛰쳐나갔고 도혁도 다급히 뒤를 따랐다.

조금 전까지 산타와의 만남으로 화기애애했던 공간이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원장님, 무슨 일이에요?”

재인이 김 원장에게 달려가 물었다.

김 원장은 기절한 듯 미동도 없는 여자아이를 안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한동안 괜찮았는데……. 갑자기 현아 심장에 무리가 갔나 봐. 시환아, 119에 연락했어?”

“네, 5분 뒤에 도착한대요!”

시환의 말에 김 원장이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리며 탄식했다.


“5분이나? 아, 어떡하지?”

“원장님, 현아 큰일 난 거죠? 현아 어떡해요?”

하얗게 질린 현우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뚝 떨어졌다.

너무도 똑 닮은 얼굴에, 쓰러진 여자아이가 현우의 동생인 것을 한눈에 짐작할 수 있었다.


“괜찮아, 현우야. 현아 괜찮을 거야.”

그 말을 하는 재인의 목소리도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는 현아의 모습에 가슴이 죄어드는 고통을 느꼈다.

그때, 도혁이 달려와 현아의 호흡을 확인하더니 다급히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호흡이 거의 없어요. 일단 심폐소생술부터 하시죠.”

“아아, 그, 그래야죠.”

원장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현아를 바닥에 눕혔다.

도혁은 숨을 불어넣고 신중하게 현아의 심장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 모두 가슴을 졸이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1초가 1분같이 더디게 흘렀다.

몇 분 후, 다행히 현아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왔다.


“아, 다행이다!”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재인은 이마의 식은땀을 닦는 도혁을 젖은 눈으로 바라봤다.

이윽고 119 대원들이 도착해 신속하게 30분 거리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현아를 이송했다.

* * *

마침내 현아의 검사가 끝났다.

산소호흡기를 달고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현아의 곁을 재인과 도혁이 지키고 있었다.

김 원장과 시환은 다른 아이들을 돌봐야 했기에 두 사람이 간호를 자청한 것이었다.


“그 녀석, 따라온다고 울고불고 난리였는데 이제 좀 진정이 됐으려나?”

도혁은 구급차를 뒤따라오던 현우가 생각나 마음이 무거웠다.


“현아가 안정을 찾았다고 연락했으니 괜찮을 거예요. 현우가 동생을 끔찍하게 생각해요."

“그런 것 같더군.”

“현아가 두 살 때부터, 둘이 함께 보육원에서 지냈어요. 현아는 선천적으로 심장이 안 좋아서 수술을 받아야 했는데, 부모도 없이 그걸 지켜보는 현우 마음이 오죽했겠어요.”

재인의 목소리에 애잔함이 묻어 있었다.


“……참 힘들었겠네.”

“이만하길 천만다행이에요. 아까는 진짜 잘못될까 봐 간이 철렁했거든요. 팀장님 덕분에 살았어요,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을 한 건데, 뭘. 보육원 아이들이 서재인 씨한테는 특별한 의미가 있으니 더더욱.”

“맞아요. 다 제 동생들 같아요.”

재인은 도혁에게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 함께 별사랑보육원에서 봉사를 해왔다’라고만 설명을 했었다.

보육원에서 자란 것이 창피해서 숨기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보육원 이야기를 할 때마다 사람들이 보냈던 동정 섞인 눈빛을, 혹시라도 도혁에게서 보게 될까 봐 망설여졌을 뿐.

하지만 이 순간.

재인은 도혁에게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저기…… 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

재인은 잠시 링거 줄을 타고 방울방울 떨어지는 수액을 쳐다보다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실은…… 저도 여덟 살에 입양되기 전까지는 별사랑보육원에서 자랐어요. 태어나자마자 보육원 앞에 버려졌다고 하더라고요.”

“…….”

“그래서 아이들을 보면 어렸을 때 제가 생각나서 더 정이 가요. 어떤 마음일지 아니까 안아주고 싶고요.”

도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재인은 그의 침묵에 덜컥 겁이 났다.


‘일부러 숨겼다고 오해하는 걸까?’

괜히 얘기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든 건 아닌지 후회가 밀려오던 그때.


“서재인 씨.”

도혁이 부드러운 눈길로 재인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동생들이 많아서 부럽군. 난 혼자라 늘 외로웠거든.”

“팀장님…….”

그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재인은 봄눈이 녹듯 마음이 녹아내렸다.

재인은 때 이른 봄바람에 일렁이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의사가 들어왔다.


“보호자분, 잠깐 얘기 좀 나누실까요?”

의사가 두 사람을 진료실로 부르더니 심각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일단 안정이 되긴 했는데, 아무래도 심장 수술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수술이요?”

‘수술’이라는 말에 재인은 덜컥 겁부터 났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현아는 선천성 심장기형이라 대동맥 협착뿐만 아니라 심장 세 곳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미 두 번이나 수술을 받았어요.”

“10년 전에 받은 수술로 그동안은 괜찮았겠지만, 성장 과정에서 혈관과 판막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지난 검진 기록과 이번 검사 결과를 검토했는데, 제 소견으로는 추가 수술이 더 필요하다고 보입니다.”

“그렇군요. 그럼 수술은 언제 받을 수 있나요?”

의사가 난감한 얼굴로 대답했다.


“죄송하지만, 좀 더 큰 병원에 가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워낙 민감하고 복잡한 수술이라서요.”

“그 정도로 심각한가요?”

“네. 될 수 있는 한 빨리 수술받는 게 좋겠습니다. 수술을 받아도 낫는다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지금보다야 좋아지겠죠.”

재인은 의사의 표정이 시종일관 어두워서 불안했다.


“저기, 수술비는 얼마나 나올까요?”

“워낙 복잡한 수술이라 못해도 천오백만 원은 들 겁니다.”

“그렇게나요?”

재인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기부금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는 보육원의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두 번의 수술도 어렵게 기금을 모아서 겨우 수술비를 충당한 것이었다.


‘갑자기 수술비를 어디서 구하지? 퇴직금을 미리 받을 수는 없으려나…….’

재인의 고심이 깊어지던 그때, 언제 나갔었는지 도혁이 문을 열고 진료실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그러고는 의사에게 제 휴대전화를 내밀며 말했다.


“선생님, 실례지만 잠깐 전화 좀 받아주시겠습니까?”

“아, 네. 여보세요?”

다음 순간, 엉겁결에 도혁의 휴대전화를 받아든 의사의 눈이 번쩍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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