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그깟 키스 한 번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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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그깟 키스 한 번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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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화. 그깟 키스 한 번 가지고
2023.02.04.
“오빠, 설마 팀장님한테 내 흑역사 떠들고 있었던 거 아니지?”
재인이 시환에게 장난스레 눈을 흘기며 말했다.
“흑역사? 나랑 뽀뽀했던 거?”
“뽀뽀?”
순간, 도혁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툭 불거졌다.
화들짝 놀란 재인이 시환의 등짝을 퍽 치며 말했다.
“오빠,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왜? 없는 얘기 지어낸 것도 아니잖아. 어렸을 때 나랑 결혼 약속했던 것도 기억나지?”
“유치원 때 얘기를 언제까지 우려먹을 건데?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빨리 들어가!”
재인은 도혁의 눈치를 살피며 싫다는 시환의 등을 억지로 떠밀었다.
그러자 가늘게 뜬 눈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도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서재인 씨, 코흘리개 적 일인데 뭘 그렇게 흥분하지? 고작 뽀뽀한 걸 가지고.”
‘고작’을 특별히 강조하며 씩 웃는 도혁의 얼굴에서 승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아우, 정말!
도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보여 재인은 낯이 뜨거워졌다.
시환은 못마땅한 눈으로 도혁을 쳐다보더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해꾼이 사라지고 드디어 재인과 둘만 남게 되자, 도혁이 재인과의 거리를 좁히며 바짝 다가섰다.
“유시환 씨한테 ‘오빠’라는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나오네?”
“그거야, 시환 오빠가 저보다 나이가 많으니까요.”
재인은 당연한 얘길 왜 하나 싶어 도혁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자 도혁이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시환 씨보다 내가 나이가 더 많은데 왜 나한테는 오빠라고 안 해?”
“네?”
재인은 입을 쩍 벌린 채 그대로 얼음이 되었다.
오빠? 도혁 오빠?
생각만으로도 온몸에 오소소 닭살이 돋았다.
“이제 사귀는 사이인데 계속 ‘팀장님’이라고 부를 거야?”
“……팀장님 맞잖아요.”
“그럼 회사 그만두면? 그때도 계속 팀장님이라고 부르려고?”
“그건…….”
도혁의 날카로운 지적에 재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도혁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우선 연습 삼아 한번 불러볼래? 도혁 오빠, 하고.”
히익!
재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돼, 됐어요!”
“그러지 말고 딱 한 번만.”
“지금 한가하게 이런 얘기할 시간 없어요. 팀장님께 부탁할 게 있어서 왔단 말이에요.”
“부탁?”
“네. 꼭 팀장님이 아니면 안 되는 일이라서요.”
“그게 뭔데? 서재인 씨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줄 수 있지.”
“정말이죠?”
도혁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재인의 눈이 반짝, 하고 빛났다.
* * *
같은 날 저녁.
유라는 몹시 불편한 얼굴로 고급스러운 중식당의 개별룸 안에 앉아 있었다.
‘여기 평소에도 예약 잡기 힘든 곳인데 크리스마스이브에 갑자기 어떻게 예약을 잡았지?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유라와 함께한 이는 지금 이 순간 그녀가 가장 피하고 싶은 남자,
김성준이었다.
며칠 전부터 성준에게서 ‘만나서 얘기하자’라는 메시지와 전화가 왔었지만, 유라는 너무 민망한 나머지 차마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조금 전, 성준이 퇴근하는 그녀의 앞에 불쑥 나타나더니, 할 얘기가 있다며 이곳에 데려온 것이었다.
할 얘기란 보나 마나 일요일 밤, 유라가 저지른 말도 안 되는 일에 관한 것이리라.
바로 차 안을 뜨겁게 달궜던 성준과의 열정적인 딥키스.
‘집에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는데 왜 그 장면만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거야!’
유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후회와 반성을 거듭했다.
술이 깨고 난 뒤 몇 번이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던가.
화려한 연애사를 자랑하는 유라였지만 결단코 누구와도 가볍게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랑.
하필이면 친구의 남자친구와 공적으로 얽혀 있는 김 실장님과.
그것도 성지훈 때문에 난리 친 바로 그날.
무려 키스를 해버렸단 말인가.
성준과의 키스로 나름의 철칙이 보기 좋게 무너져 유라 자신도 무척 당혹스러웠다.
‘아무리 술에 취했기로서니, 어떻게 김 실장님을 성지훈으로 착각할 수가 있냐고! 이게 다 술 때문이야. 내가 다신 술을 마시나 봐라!’
유라는 괜히 술 탓을 하며 지키지도 못할 금주를 결심했다. 그러다 고개를 든 순간, 움찔 놀라고 말았다.
성준이 미소 띤 얼굴로 그녀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어서.
그의 이지적으로 잘생긴 얼굴 위에 자유로운 영혼 성지훈의 얼굴이 겹쳐졌다.
‘이러니 내가 성지훈이라고 착각을 했지. 닮아도 너무 닮았어.’
멋대로 착각하고 성준을 덮친 건 유라의 잘못이지만, 생각해보니 조금 억울했다.
그러나저러나, 사과는 그녀의 몫이라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유라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몰라 일단 어색하게 웃었다.
‘김 실장님이야말로 여기까지 데려왔으면서 왜 말이 없지? 대체 무슨 생각이야?’
뭐라고 한마디 할 줄 알고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속 시원하게 얘기하고 빨리 결론짓고 싶었다.
유라는 답답한 마음에 먼저 말을 꺼냈다.
“김 실장님, 일요일의 그 일 때문에 오신 거죠?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큰 실수를 했어요.”
“괜찮습니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성준의 입가에 모든 것을 포용해줄 것만 같은 온화한 미소가 그려졌다.
성준이 흔쾌히 사과를 받아주자, 유라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죄송해요. 메시지에 답도 안 하고 전화도 안 받아서 답답하셨죠? 너무 죄송하기도 하고,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 몰라서 대답을 못 하겠더라고요.”
“유라 씨가 그러신 듯해서 찾아온 겁니다. 차분하게 같이 얘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아서요.”
성준의 입장에서도 상사의 여자친구의 친구와 얽히게 되었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으리라.
불미스러운 사건이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끔 직접 만나서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 마무리는 제대로 하고 넘어가야지.’
유라는 깊이 고개 숙이며 사과했다.
“얘기할 게 뭐 있겠어요. 다 제 잘못이죠. 죄송합니다.”
“전 정말 괜찮으니 사과는 그만하셔도 됩니다.”
배려심 가득한 따뜻한 목소리.
유라는 갑자기 알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밀려와 성준을 빤히 쳐다봤다.
성준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때 그 키스, 저를 성지훈 씨로 착각해서 하신 거죠?”
“네. 변명 같겠지만 그런 실수는 맹세코 처음이었어요.”
“그렇군요.”
“제가 사귀기 전에는 절대 스킨십을 안 하는 게 원칙인데, 술을 많이 마셔서 그만.”
성준이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책임감 없는 관계는 맺지 않는 부분이 저와 비슷하시군요. 전 스킨십을 하면 무조건 책임지는 게 원칙인데.”
“아아, 그러시군요.”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이미지도 회복했겠다, 유라는 성준의 말을 별생각 없이 흘려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깔끔하게 마무리 짓는 것뿐.
유라는 배시시 웃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김 실장님, 그럼 서로 합의 하에 그때 제 실수는 없었던 일로 하기로 해요. 당연히 재인이와 차 팀장님한테는 절대 비밀이고요.”
“합의 못 합니다.”
“네?”
예상도 못 한 성준의 반응에 유라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반면, 성준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저는 실수가 아니었거든요.”
실수가 아니면 뭐야?
유라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키스했으니 최유라 씨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누가, 누구를 책임져?
유라는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 이후로 유라 씨 생각이 떠나지 않더군요. 오랜만에 한 키스라 그런지…….”
“스톱! 거기까지!”
유라가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성준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 사람이!
“김 실장님 지금, 제가 좋아한 남자가 도망갔다고 해서 저를 쉽게 보시는 거예요?”
“아닙니다.”
“근데 막무가내로 왜 이러세요?”
“조금 전에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전 스킨십을 하면 무조건 책임지는 게 원칙이라고.”
유라는 진심 그 자체인 성준의 눈빛에 흠칫 놀랐다.
성준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상대를 쉽게 본 걸로 치면, 먼저 키스를 한 유라 씨 쪽이 아닙니까?”
“저기요, 김 실장님…….”
“김성준입니다. 맨 처음 족발 먹던 날처럼 ‘성준 씨’라고 불러주시죠.”
어쩜. 이렇게 닭살 돋는 요청을 저렇게 예의 바르게 하실까.
유라는 자칫하면 휩쓸리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번 정신을 바짝 차렸다.
“좋아요. 성준 씨, 물론 키스를 한 건 제 잘못이에요. 그건 이미 죄송하다고 사과했고, 김 실장님도 제 사과를 받으셨잖아요. 맞죠?”
“맞습니다.”
“그럼 끝난 얘기 아닌가요?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니고 스킨십 좀 했다고 책임진다는 게 말이 돼요?”
“제가 좀 올드해서요. 게다가 상대가 무척 마음에 들거든요. 키스도 정말 좋았고.”
점잖은 선비 같은 얼굴로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낯간지러운 말을 던지는 성준 때문에 유라는 할 말을 잃었다.
갑자기 성준이 그녀의 옆자리로 옮겨 와 앉으며 물었다.
“유라 씨는 제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
솔직히 성준은 자상하고 젠틀하고 멋짐 그 자체에, 무엇보다 얼굴이 완전 유라의 취향이었다.
문제는 성지훈이랑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것.
너무 짧아서 연애라고 하기도 뭣 하지만, 이별한 지 고작 며칠 뒤에 똑같이 생긴 남자와 연애를 시작하는 건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무슨 지하철 환승도 아니고.
유라가 몸을 뒤로 빼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저는 성준 씨한테 관심이 1도 없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 착각해서 실수한 것뿐이니까 책임지지 않으셔도 돼요.”
“그건 곤란합니다. 제 원칙에 어긋나서.”
아우, 답답해!
유라는 속이 터질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버럭 했다.
“어린애도 아니고, 그깟 키스 한 번 한 거 가지고 정말 이러시기예요?”
“그깟 키스?”
시종일관 침착한 모습을 잃지 않았던 성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쪽 눈썹을 끌어 올렸다.
화난 듯한 표정은 처음이라 놀랐는데, 그게 또 묘하게 멋져 보여서 유라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이럴 때가 아니지. 수습! 수습!’
유라는 전의를 가다듬고 강하게 밀고 나갔다.
“덮친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전 별로 좋지도 않았어요. 그러니까…….”
흡!
성준이 유라의 말을 가로막으며 너무나도 정중하게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촉촉한 입술이 살짝 닿았다 떨어지기를 몇 번을 반복하는 동안 유라는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녹아들 것만 같은 부드러운 입맞춤에 유라의 눈꺼풀이 스르르 감기려는 찰나, 성준이 뒤로 물러나며 물었다.
“이번에는 어땠습니까?”
유혹하는 듯한 은근한 말투.
유라는 가슴이 마구 술렁였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를 밀치고,
엄청나게 화를 퍼붓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하는데…….
그만, 유라의 입에서 본능에 충실한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너무 짧아서 잘……. 근데 곧 주문받으러 오겠죠?”
성준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예약할 때부터 30분 뒤에 들어오라고 당부해뒀습니다. 아주 중요한 얘기를 해야 한다고.”
“아…….”
마주 본 두 사람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새도 없이 끌어안고 서로에게 깊숙이 스며들었다.
* * *
도혁은 재인과 별사랑보육원의 다용도실 한구석에서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안 해! 절대 안 해!”
“팀장님, 할 사람이 팀장님밖에 없다니까요!”
“그래도 싫어! 그 유시환인가 뭔가 하는 사람보고 하라고 해.”
“시환 오빠는 애들이 다 눈치채서 안 돼요.”
“그러든가 말든가!”
“제 부탁이라면 뭐든 다 해주신다면서요?”
“이런 건 줄 몰랐지! 이건 너무하잖아!”
도혁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봤다.
새빨간 산타 옷,
툭 튀어나온 가짜 배,
덥수룩한 가발과 수염.
지금 그는 팔자에도 없는 산타 할아버지 역할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