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서재인 씨는, 몰라도 너무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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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서재인 씨는, 몰라도 너무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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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서재인 씨는, 몰라도 너무 몰라
2023.01.31.
재인은 눈을 크게 뜨며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시환 오빠! 일본에서 언제 왔어?”
“어제. 방학이라 엄마랑 동생들 보고 싶어서 들어왔지.”
김 원장의 외아들인 시환은 현재 일본에서 국비유학생으로 석사 과정 중인 수재였다.
두 살 아래인 재인과는 어렸을 때부터 남매처럼 어울려 자란 데다, 같은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선후배 사이이기도 했다.
“지난번 메일에도 아무 말 없었잖아. 미리 얘기 좀 해주지.”
“너 깜짝 놀라는 거 보려고 그랬지.”
“실없긴. 2년 만에 들어온 건가?”
“응. 유학 간 뒤로 처음이니까.”
“암튼 오랜만에 오빠 보니까 좋다.”
시환은 환하게 웃는 재인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어쭈. 서재인, 그새 엄청 예뻐졌다? 사회 생활해서 그런지 촌티가 싹 벗겨졌는데?”
“나 원래 예뻤거든? 오빠야말로 몰라보겠다. 더 어른스러워졌는데?”
“인기가 너무 많아서 피곤할 정도야.”
“네네. 잘나셨습니다.”
김 원장은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재인아, 시환이가 너 온다니까 좋아서 입을 못 다물더라. 아들 녀석 키워놨더니 엄마는 안중에도 없어.”
“엄마는, 오랜만에 만나니까 반가워서 그렇죠.”
시환은 쑥스러운 듯 안경을 끌어 올렸다.
그때, 김 원장이 아이들에게 떠밀려 뒤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도혁을 가리켰다.
“재인아, 이분은 누구시니?”
“아, 같이 온다고 말씀드렸던 회사 팀장님이요.”
“어머, 이렇게나 젊은 분이었어? 와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팀장님, 인사하세요. 김성희 원장님이세요.”
“차도혁이라고 합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도혁이 미소 띤 얼굴로 깍듯이 인사했다.
김 원장이 재인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남자친구?”
“아유, 아니에요! 그냥 회사 동료예요.”
재인이 손까지 저어 가며 부정하자, 도혁이 못마땅한 얼굴로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다.
그런 도혁에게 시환이 다가가 씩 웃으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유시환입니다. 재인이랑은 어릴 적부터 친한 사이예요.”
도혁은 시환의 손을 힘주어 맞잡으며 말했다.
“차도혁입니다. 서재인 씨랑은 사귀는 사이고요.”
그 순간.
수십 개의 눈들이 일제히 재인에게 쏠렸다.
재인은 입을 딱 벌린 채 도혁을 쳐다봤다.
‘팀장니이이이이임!’
* * *
“팀장님, 비밀 지키기로 했으면서 10분도 안 돼서 약속을 깨면 어떡해요!”
점심 배식을 돕느라 국을 푸는 도혁에게 밑반찬 담당인 재인이 작은 목소리로 핀잔을 주었다.
재인은 도혁의 돌발 행동 때문에 김 원장과 시환에게 사정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부모님 귀에 들어가지 않아야 하는데.
남자친구가 생긴 걸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했지만, 동네가 좁아서 영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어.”
“뭘요? 그냥 ‘차도혁입니다’만 하면 되지, 쓸데없이 부연 설명을 왜 해요?”
도혁은 사실, 시환이 재인과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눌 때부터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악수할 때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환의 눈빛에서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도혁은 곧바로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짝짓기 시기에 암컷에게 선택받기 위해 경쟁하는 수컷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이랄까?
도혁은 사귀는 사이라고 소개할 때, 시환의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스치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흠. 서재인 씨는 몰라도 너무 몰라.”
“제가 뭘요? 계속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실 거예요? 암튼 소문나면 팀장님이 책임지세요!”
“알았어. 서재인 씨는 내가 평생 책임질게.”
도혁의 표정이 진지했다.
프러포즈처럼 들리는 그의 말에 재인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제, 제 말은 그게 아니잖아요.”
“그럼 뭔데?”
“…….”
재인이 부끄러워 얼굴만 붉히고 있는데, 누군가 두 사람 앞에 불쑥 식판을 들이밀었다.
맨 처음 재인을 보고 반갑게 소리쳤던 중학생 현우였다.
재인은 식판에 비엔나소시지를 듬뿍 올려주며 말했다.
“현우야, 너 비엔나소시지 좋아하지? 누나가 특별히 너만 많이 주는 거야.”
현우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대뜸 물었다.
“누나, 이 아저씨가 진짜로 누나 남자친구야?”
“응. 맞아.”
재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현우는 원망 섞인 눈으로 도혁을 쳐다봤다.
그래. 내가 서재인의 남자친구다.
도혁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국그릇을 내밀었다.
“됐어요. 안 먹을래요.”
그의 손이 무색하게도 현우는 쌩하니 식탁으로 가버렸다.
“쟤가 왜 저러지? 국 없으면 밥 안 먹는 애가…….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재인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혼잣말을 했다.
도혁은 고개를 내저었다.
역시 서재인 씨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 자신의 치명적인 매력을.
‘한규민 과장 보내고, 나민우 팀장님 오해 풀어서 겨우겨우 서재인 씨 주변 좀 정리됐나 했더니. 이제는 갑자기 의뭉스러운 오빠가 튀어나오질 않나, 꼬맹이 녀석까지 알짱거리네?’
도혁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가만, 유시환도 일본에 있다고 했지? 유학 가면 서재인 씨한테 접근하는 거 아냐?’
아이들 식사를 도와주느라 이리저리 오가는 시환이 눈에 띄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도혁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꽤 괜찮은 남자였다.
불안해. 불안해.
‘안 되겠다. 보내기 전에 서재인 씨를 꼭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겠어.’
도혁은 다시금 진지하게 재인과의 앞날을 계획하겠노라 마음먹었다.
문제는 서릿발 같은 차대산 회장을 어떻게 설득하냐였다.
어제 도혁을 속이면서까지 세정과 만나게 한 차 회장이니, 쉽게 포기할 리도 없었다.
‘확실하게 잘랐으니 윤세정이 잘 알아들었겠지? 더는 골치 아픈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때, 재인이 멍하니 생각에 잠긴 도혁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팀장님, 국이요, 국!”
어느새 그의 앞에 국을 기다리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도혁은 그제야 허둥지둥 국을 퍼 주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세요?”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는 재인의 귓가에 도혁이 나직이 속삭였다.
“서재인 씨 생각.”
재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자, 장난치지 마세요.”
“정말인데.”
머릿속이 서재인으로 가득 찬 걸 보여 줄 수도 없고.
도혁은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재인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 * *
그날 오후 내내 도혁과 재인은 크리스마스 행사 준비를 하느라 서로 대화할 새도 없이 각자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도혁이 막 공연 무대 장식을 끝마쳤을 때, 성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도혁은 건물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네, 김 실장님. 말씀하세요.”
―도련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회장님께서 연락이 안 된다고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 못 간다고 전해주세요.”
―네? 회장님께서 오늘 저녁에 서진물산 연회장에서 만나자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듣긴 했지만 간다고는 안 했습니다.”
어제, 한정식집에서 만났을 때.
차 회장은 오늘 크리스마스이브에 서진물산이 주최하는 창립기념일 겸 송년회에 도혁이 꼭 참석할 것을 당부했다.
못 간다고 하면 꼬치꼬치 캐물을 게 뻔해서 도혁은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걸 차 회장 혼자 긍정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저한테도 한 마디도 없이 휴가까지 내서 어딜 가신 겁니까?
선약이 있다고 하면 뜯어말릴까 봐, 도혁은 성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려왔다.
“서재인 씨와 같이 있습니다. 자세한 건 올라가서 말씀드리죠.”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성준이 말했다.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습니다. 회장님이 가만히 계시지 않을 텐데 괜찮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잔소리 듣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게 아니라…… 서재인 씨가 걱정돼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성준의 우려 섞인 목소리에 도혁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서재인 씨 일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김 실장님은 지금까지처럼 모르는 척해주세요.”
―죄송합니다만, 그러기 힘들어졌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조금 전에 회장님께서 전화로 지시하셨습니다. 도련님이 숨겨둔 여자가 있는 건 아닌지 비밀리에 알아보라고요. 결혼을 한사코 마다하는 게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하시면서요.
할아버지가 내 뒷조사를?
지금껏 도혁의 사생활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던 차 회장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어떻게든 윤세정과의 결혼을 밀어붙이겠다는 뜻이었다.
도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젠장. 옥죄기로 작정을 하셨군. 시간이 좀 더 필요한데…….’
그나저나 성준도 중간에서 입장이 곤란할 터였다.
성준의 아버지는 차대산 회장과 도혁의 아버지 차인환을 보필한 믿음직한 인물이었다.
도혁의 아버지와 성준의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같이 세상을 떠난 뒤, 차 회장은 성준을 각별하게 챙기고 신뢰해왔다.
그런 성준이기에 차 회장의 뜻을 저버릴 수 없었을 텐데.
의외였다.
“할아버지가 몰래 알아봐 달라고 하셨는데 제게 얘기해버렸으니, 나중에 김 실장님이 곤란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때, 휴대전화 너머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 회장님께는 죄송하지만, 전 도련님 편이거든요. 도련님이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그 오랜 시간을 도혁과 함께해온 성준이었다. 언제나 곁에서 묵묵히, 든든한 형처럼.
도혁은 그의 진심 어린 말에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성준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가 서재인 씨를 무척 좋아하거든요. 서재인 씨가 상처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김 실장님까지?
누구라도 재인과 같이 지내다 보면 좋아할 수밖에 없으리라.
도혁은 열렬한 응원을 받은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졌다.
“저,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딱 일주일만 눈감아 주십시오. 그 안에 어떻게든 결판을 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모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오늘 일도요.
“김 실장님,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보이지는 않지만 성준이 미소를 짓고 있음이 느껴졌다.
―아참, 도련님,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김 실장님도…… 메리 크리스마스.”
생전 입 밖으로 잘 꺼내지 않는 말을 하고 나니 괜스레 쑥스러운 도혁이었다.
전화를 끊고 안으로 들어가려고 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날이 정말 춥네요.”
언제부터 있었는지 시환이 불쑥 튀어나와 말을 걸었다.
“그렇군요.”
두 사람은 먼 곳을 응시한 채 잠시 나란히 서 있었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시환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차도혁 씨라고 했죠? 재인이 참 좋은 애예요.”
“잘 알고 있습니다.”
“실례지만, 재인이랑 사귄 지는 얼마나 되셨죠? 지난달에 메일 보낼 때까지는 분명 혼자였는데.”
“오늘로 사귄 지 3일 됐습니다.”
하!
시환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터졌다.
“제가 한발 늦었네요.”
역시 도혁의 직감이 딱 맞아떨어졌다.
시환은 재인의 남자친구인 도혁 앞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재인이 잘 부탁합니다. 부디 마음 아플 일 없게.”
부디?
묘하게 신경이 거슬리는 말에 도혁은 눈썹을 꿈틀하면서 받아쳤다.
“걱정하지 마세요. 서재인 씨는 내가 책임집니다, 평생.”
그러니까 넘볼 생각 마!
“두고 보죠.”
시환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도혁을 쳐다봤다.
파바박!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
눈싸움이라도 하듯 누구 하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두 사람 지금 뭐 해요?”
도혁과 시환은 동시에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신경전의 원인제공자 재인이 사랑스럽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