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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날, 뭘로 보는 거야? (69/129)


69화. 날, 뭘로 보는 거야?
2023.01.28.


재인은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현관으로 달려갔다.


“팀장님, 이제 오세요? 저녁은요?”

“대충 먹었어.”

“많이 바쁘셨어요?”

“응. 출장 때문에 밀린 일이 너무 많아.”

도혁의 목소리에서 피곤함이 묻어 나왔다.

지친 기색이 더해진 준수한 이목구비를 보고 있자니, 재인의 안에서 감싸 안아 주고픈 충동이 일었다.

도혁은 들어올 생각은 안 하고 옅은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바라만 봤다.

설마 또 그때처럼?

재인은 고흥으로 출장을 다녀왔던 날, 도혁이 집에 들어서자마자 껴안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계속 이러고 싶은 거 참느라 혼났어.」

그 아슬아슬했던 순간을 떠올리자 재인은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그때 갑자기, 도혁이 재인에게 바짝 다가섰다.


“왜, 왜요?”

도혁은 부끄러워 머뭇머뭇하는 그녀의 머리 위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말했다.


“누군가 따뜻하게 맞아준다는 게 좋아서. 그게 서재인 씨라 더더욱.”

그 말을 끝으로 도혁은 씩 웃으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몇 시간을 기다렸는데 이게 다야?’

재인은 도혁이 그냥 가버린 걸 아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뭐야. 이러면 내가 꼭 뭘 바라는 것 같잖아.’

두근두근.

발그레한 얼굴이 점점 더 뜨거워졌다.

굳게 닫혀 있던 잠금장치가 풀리자, 재인은 차도혁이라는 남자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어 버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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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인 씨, 그만 일어나.”

도혁은 허리를 굽혀 소파에서 까무룩 잠이 든 재인을 흔들어 깨웠다.

재인이 눈을 떠보니, 도혁이 살짝 젖은 머리에 말끔한 모습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샤워하면서 피곤이 좀 풀렸는지 그의 얼굴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날 기다리고 있었어?”

“아, 아뇨! 텔레비전 보다 깜박 잠이 들었나 봐요.”

재인은 뭔가 기대해서 기다린 것처럼 보일까 봐 말을 돌렸다.

그러자 도혁이 텔레비전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졸린 와중에도 텔레비전 전원은 잘 껐네?”

“……!”

바보. 딱 걸렸잖아!

민망해서 말문이 막힌 재인에게 도혁이 무심히 말했다.


“아무튼 잘됐어.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는데.”

그의 폭탄 발언에 재인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할 일? 아아, 아까 출장 때문에 일이 많이 밀렸다고 했었지.’

그때는 도혁이 쓰러질 것처럼 피곤해 보여서 잠시 방심했었는데.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

지구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워커홀릭 차도혁이다.

재인이 이 집으로 이사 온 첫날부터 새벽 2시 반까지 붙잡고 부려 먹었던 그였다.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사귀는 첫날인데도 오붓하게 일할 생각을 해?’

재인은 서운한 마음에 도혁을 올려다보며 볼멘소리를 했다.


“팀장님, 그렇게 일만 하면 지겹지 않으세요?”

“전혀.”

말을 말자.

상대는 차도혁이다.

재인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도혁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부드럽게 허리를 감싸 안았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재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혁은 그녀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어딜 가려고?”

“일이 많다고 하셔서 노트북 가지러…….”

“내가 말한 건 그 일이 아닌데?”

“네?”

도혁이 입꼬리를 올리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재인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서재인 씨는 대체 날, 뭘로 보는 거야?”

그야, 그동안 차도혁 씨가 일하자고 말했을 때는 언제나, 정말 머리에 김이 나게 회사 일만 시켰으니까.

재인은 도혁의 뜨거운 눈빛을 감당할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일이 많이 밀렸다면서요.”

“회사에서 다 끝내고 왔는데? 혼신의 힘을 다해서.”

당연히 이러려고.

도혁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재인이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피, 피곤하실 텐데 어서 쉬어야죠.”

“안 피곤해. 전혀.”

“누가 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어제 성준이 들이닥쳤던 악몽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 시간에? 그리고, 아무도 못 들어와. 좀 전에 비밀번호 바꿔버렸거든.”

“……!”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춰둔 도혁이었다.

더는 거칠 것 없는 도혁은 새초롬하게 닫힌 붉은 입술을 찾아 고개를 숙였다.

재인은 옷 너머로 전해져 오는 그의 거센 심장 박동을 느끼며 살포시 눈을 감았다.

이제야 비로소 한집에 사는 남녀 사이에 있어야 할 바람직한 ‘일’을 시작한 두 사람이었다.

* * *

다음 날 수요일, 낮 12시 정각.

도혁은 한정식집 ‘봄날’에서 오랜만에 차대산 회장과 마주 앉았다.


“식사는 내가 미리 주문해놨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맛깔스러운 음식들을 가득 차려놓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외모부터 성격까지 판박이처럼 꼭 빼닮은 두 사람이다 보니, 같이 있을 때면 종종 대화가 뚝 끊기곤 했다.

도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건강은 좀 어떠세요?”

“이래 봬도 아직은 쌩쌩하다.”

“다행이네요.”

도혁은 차 회장의 기력이 예전 같지 않아 늘 걱정이었는데, 오늘은 유독 괜찮아 보여 마음이 놓였다.

차 회장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도혁아, 너도 내년엔 대표로 취임해야 하는데, 그 전에 결혼을 하는 게 어떠냐? 주주들 보기에도 좋고.”

“또 그 얘기세요? 아직은 결혼 생각 없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순순히 물러설 생각이 없는 차 회장은 넌지시 떠보듯 도혁에게 물었다.


“너 정말 누구 만나는 사람이라도 있는 게냐?”

도혁은 할아버지가 뭔가 눈치챘나 싶어 간이 철렁했다.

목적을 이루는 데 가차 없는 차 회장이었다. 만약 재인에 대해서 알았다가는, 제대로 시작해보기도 전에 사달이 날 게 뻔했다.

재인과 만나는 것도 언젠가는 당당히 밝힐 계획이지만,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주주총회에서 차정환 대표의 비리를 밝혀 사건을 일단락시키고 자신이 힘을 가질 때까지는 숨죽이며 칼을 연마해야만 한다.

도혁은 냉정을 잃지 않고 차분히 대답했다.


“없습니다, 아무도.”

손자의 대답이 흡족했는지 차 회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엉뚱한 데 정신 팔린 바보가 아니라니 다행이구나. 결혼이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아무나 만나면 쓰나. 하하.”

도혁은 그런 차 회장을 씁쓸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누가 또 오기로 했습니까?”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3인용 테이블 세팅이 되어 있어 영 마음에 걸렸었다.


“아, 내가 귀한 손님을 초대했다. 올 때가 됐는데…….”

“귀한 손님?”

도혁은 퍼뜩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미닫이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다.


“차 회장님, 늦어서 죄송해요.”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도혁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도혁 씨, 안녕하세요.”

생긋 웃으며 차 회장의 옆자리에 앉는 여자는 고흥 출장을 가는 길에 휴게소에서 마주쳤던 서진물산 윤문식 회장의 딸 윤세정이었다.

우아한 투피스 차림의 세정은 청순하고 우아한 아가씨, 그 자체였다.


“이 녀석이, 인사를 했으면 답을 해야지! 워낙 무뚝뚝한 녀석이라, 세정 양이 좀 이해해줘요.”

차 회장은 나무라듯 도혁에게 눈짓을 보냈다.


“괜찮아요, 회장님. 제가 늦은 것도 있고, 도혁 씨 성격은 예전부터 잘 알고 있으니까요.”

“너그러이 봐줘서 고마워요. 역시 세정 양은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아가씨라니까. 하하.”

“저야말로 잘 봐주셔서 감사해요.”

세정의 애교 섞인 말투와 눈웃음에 차 회장은 기분이 퍽 좋아 보였다.

도혁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왜 이럴 줄 예상하지 못했을까.

할아버지가 갑자기 전화해서, 다짜고짜 점심 먹자며 시간 내라고 했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도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생각나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도혁아, 앉아라.”

차 회장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손자를 붙잡았다.


“손님 앞에 두고 이 무슨 무례냐.”

젊은 시절 냉혈한이라 불렸던 차대산 회장의 카리스마가 튀어나왔다.

차마 할아버지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도혁이 다시 자리에 앉자, 차 회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사람이 이렇게 있는 걸 보니 보기 참 좋네요. 세정 양, 다행히 도혁이도 만나는 사람 없다고 하니 앞으로 잘 부탁해요.”

“아이참, 제가 잘 부탁드려야죠. 잘 부탁해요, 도혁 씨.”

세정이 활짝 웃으며 말하는데도 도혁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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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후, 차 회장은 일부러 두 사람만 남겨놓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도혁 씨, 출장은 잘 다녀왔어요? 계속 연락 기다렸는데 바빴나 봐요?”

세정은 하도 혼자서만 웃느라 입가에 경련이 일 지경이었다.

내내 굳은 표정으로 입을 딱 닫고 있던 도혁이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윤세정 씨, 제가 분명히 결혼 생각 없으니 할아버지께 거절해달라고 말했는데요.”

“네, 그러셨죠.”

“그런데 대체 이거 뭡니까?”

“차 한 잔 사주면 생각해 본다고 했잖아요. 도혁 씨는 아직 차를 안 샀고요.”

세정은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도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 의사는 분명히 전했습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도혁 씨, 제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요?”

세정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애처로운 눈빛으로 도혁을 쳐다봤다.

도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니요.”

“그럼요?”

세정의 눈에 희망의 빛이 반짝였다.


“아무 감정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만나는 일 다신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그럼 이만.”

그 말을 끝으로 도혁은 밖으로 나가버렸다.


‘차도혁, 감히 날 무시해?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좋지도 싫지도 않은, 어찌 보면 타인에 대한 감정 중 가장 무서운 ‘무관심’.

세정은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 주먹을 꼭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도혁은 압도적인 미모와 대산그룹 후계자라는 타이틀 외에도, 깨끗한 사생활과 탁월한 경영 능력 덕분에 재벌가 사이에서 최고의 결혼 상대로 꼽혔다.

그와 결혼해 대산그룹의 안주인이 되는 순간 세정은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세정은 차도혁이 꼭 필요했다.


‘아무리 그래 봤자, 어차피 진행될 결혼이야. 네 생각이 어떻든 우린 결혼하게 될 거라고!’

오기가 생긴 세정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도혁을 꼭 손에 넣으리라 마음먹었다.

* * *



“팀장님, 제가 한 말 잘 알아들으셨죠?”

“물론.”

“절대, 절대 사귀는 티 내시면 안 돼요!”

“알았어.”

재인의 걱정스러운 눈길에 도혁은 자신만만한 미소로 화답했다.


‘왜 약속을 받아낼수록 더 불안하지?’

두 사람은 지금, 광주 별사랑보육원 앞에 서 있었다.

둘이서 처음으로 함께 맞는 크리스마스이브.

다른 연인들은 달콤한 데이트를 즐길 시간이지만, 아이들을 만나러 가겠다고 먼저 약속해버린 재인 때문에 도혁까지 먼 길을 따라나선 것이었다.

김 원장에게는 회사 팀장인 도혁이 보육원의 크리스마스 행사를 돕고 싶어 해서 같이 간다고 말해두었다.

아직 사귄 지 3일밖에 안 됐는데, 부모님 귀에 들어가면 당장 데려오라고 성화일 게 뻔하니까.

전에도 민우와 서연, 다른 대학 동기들과 함께 내려간 적이 있어서 특별히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을 터였다.

재인은 숨을 크게 들이쉰 다음, 천천히 보육원 안으로 들어갔다.


“어! 재인이 누나다!”

운동장에서 놀던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재인을 발견하고 크게 소리쳤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와 재인을 둘러쌌다.


“누나, 보고 싶었어요!”

“언니, 오늘 자고 가는 거죠?”

“응. 당연하지. 너희 보고 싶어서 왔는걸.”

순식간에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재인은 오랜만에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행복감을 맛보았다.


“재인이 왔구나! 와줘서 고맙다.”

김 원장이 웃으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뒤이어 원장실에서 나온 훤칠하고 온화한 인상의 남자가 재인을 보고 빙긋 웃으며 다가왔다.


“서재인,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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