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오늘부터 1일
(6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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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오늘부터 1일
2023.01.24.
뜨끔.
촉이 좋은 연지의 레이더망에 걸릴까 봐 재인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으응? 그, 글쎄. 복권이라도 당첨되셨나?”
“어제는 하루 종일 저기압이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확 바뀌었어요. 어제 뭔가, 좋은 일이 있었던 게 확실해요.”
있었어. 있었는데 그냥 좀 넘어가자.
“알 게 뭐야. 자, 업무 시간 지났는데 이제 일 시작해볼까?”
“네에.”
연지는 발랄하게 대답하고는 모니터를 쳐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람이 갑자기 바뀌는 이유는 딱 한 가지뿐인데……. 팀장님 혹시 연애하시나?”
정답!
기습공격에 재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그때, 책상 위에 엎어져 있던 나희가 벌떡 고개를 들며 되물었다.
“뭐? 팀장님이 연애를?”
“강 대리님, 제 말은 확실한 게 아니라 그런 것 같다고요.”
“아아, 그런 거구나.”
얼굴에 안도의 빛이 스친 것도 잠시.
나희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팀장님, 설마 서재인한테 넘어간 거 아니야?’
그때, 나희의 시야에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모니터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재인이 들어왔다.
‘분명 뭔가 있었네, 있었어. 서재인, 이 내숭! 내가 지고는 못 사는데 두고 보자.’
도혁에게 차인 분풀이를 엉뚱한 데 쏟고 있는 나희에게 연지가 말을 걸었다.
“참, 강 대리님 그때 선봤다는 의사분이랑 잘 만나고 계세요?”
의사 얘기가 나오자, 나희는 옳다구나 싶었다.
‘그래, 나한테는 우진 씨가 있었지! 팀장님만큼 잘생기진 않았지만, 직업으로 보면 훨씬 낫다, 이거야.’
갑자기 의기양양해진 나희가 콧대를 세우며 말했다.
“그럼. 그쪽에서 좋다고 난리야.”
“그래서 오늘따라 피곤해 보이셨구나. 주말에 데이트하시느라.”
“으응, 그랬지.”
주말 내내 틈만 나면 어설픈 스킨십을 시도하는 우진 때문에 피곤하긴 했다.
그럴 때마다 도혁의 빛나는 얼굴이 떠올라서 피하느라 바빴던 나희였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결국.
나희는 팀장실을 쳐다보며 아쉬움을 삼켰다.
그런 나희를 연지가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분이 강 대리님을 엄청 좋아하나 봐요?”
“당연한 거 아니야? 만난 지 한 달 됐는데 하도 집에 인사를 가자고 그래서 주말에 다녀왔어.”
“어머! 남자분 부모님까지 만난 거면 곧 결혼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쪽은 하자고 재촉하는데, 생각 중이야.”
“어머, 부럽다! 그죠, 서 주임님?”
두 귀를 쫑긋 세운 채 모니터만 보고 있던 재인은 그제야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강 대리님은 좋겠어요. 축하해요.”
“저도 축하드려요, 강 대리님. 정말 잘 됐어요.”
연지가 생글거리며 거들었다.
“응, 고마워.”
우쭐해하던 나희는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이 이긴 것 같은데 진 것 같은 기분은?’
그새 집중 모드로 바뀐 재인과 연지를 보고 있으려니 영 찜찜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 나희였다.
* * *
훗. 후훗.
도혁은 서류를 검토하면서도 자꾸만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결국 서류를 내려놓고 드러눕듯 의자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봤다.
곧 재인의 얼굴들이 천장을 가득 채웠다.
환하게 웃는 얼굴, 당황해서 빨개진 얼굴, 어이없어하는 얼굴, 당차게 따지는 얼굴…….
「내가 좋아하는 건 팀장님이란 말이에요!」
눈을 꼭 감고 고백하던 사랑스러운 얼굴까지.
도무지 질리지가 않아.
‘이것, 참. 내가 생각해도 중증이네.’
재인과 사귀게 된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도혁이었다.
자신 때문에 제 명에 못 살겠다며 당차게 사표를 날렸던 재인이었으니까.
바라던 대로 유학 가기 전에 그녀의 마음을 얻어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또 다른 걱정이 뒤따랐다.
유학을 막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재인을 그냥 보내는 건 역시 불안하다는 것.
재인이 자신에게만 사랑스러워 보이는 게 아닐 테니까.
‘서재인 씨를 평생 옆에 묶어두려면 역시 결혼밖에 답이 없겠지? 일본으로 가기 전에 약혼부터…….’
도혁은 시베리아 벌판을 연상케 했던 부모님의 결혼 생활을 지켜본 탓에, 결혼에 대한 기대가 손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재인과 함께라면 알콩달콩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생 재인만을 사랑할 자신이 있었다.
‘결혼하면, 서재인 씨 닮은 예쁜 딸을 하나 꼭 갖고 싶군.’
고작 사귄 지 1일 차, 도혁의 꿈은 대책 없이 커지고 있었다.
Rrrrrrr. Rrrrrrr.
돌연, 도혁을 망상에서 깨어나게 하려는 듯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도혁은 양쪽 눈썹을 모았다.
‘할아버지가 또 무슨 일로?’
도혁은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
“네, 할아버지.”
―그래, 나다. 도혁이 너, 내일 점심에 시간 좀 내라.
“무슨 일이신데요? 또 한세병원 VIP실에서 영양제 맞는 건 아니실 테고?”
도혁은 지난번 차대산 회장이 저를 불러내기 위해 꾀병 부렸던 일을 상기했다.
―흠흠. 내가 오죽했으면 그랬겠냐. 손자라는 녀석이 코빼기도 안 비치니 괘씸해서 그런 거지.
“그거야, 자꾸 할아버지가 결혼하라고 강요하시니까 그렇죠. 그리고, 지난주에 출장을 다녀오느라 일이 밀려서 한동안은 바쁩니다.”
―매정한 놈 같으니라고! 연말이 되니까 괜히 마음이 허전해서 오랜만에 손자랑 오붓하게 식사 한 끼 하려고 그런다. 그 정도도 못 들어주냐? 이러다 내 장례식 때나 보겠구나.
“…….”
차 회장의 나이가 벌써 올해로 여든이었다.
‘서릿발 같던 기세는 어디 가고…….’
도혁은 올해 들어 부쩍 약한 소리가 늘어난 할아버지에게 은근히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엄격하고 잔정 없는 할아버지였지만, 부모님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흠. 바쁘지만 할 수 없지.’
도혁이 한발 물러섰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회사 근처에 ‘봄날’이라고 내가 잘 가던 한정식집이 있어. 거기에서 내일 12시에 보자.”
“네, 알겠습니다.”
도혁은 전화를 끊고 책상 한쪽에 쌓여 있는 서류 더미를 쳐다봤다.
할아버지 덕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후에 이사님께 보고드릴 것도 있는데, 이런 식이면 밤을 새워도 못 끝내겠군.’
아쉽지만 재인에 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일에 몰두하기 시작한 도혁이었다.
* * *
그날 오후, 도혁이 이사에게 보고서를 올리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재인이 휴게실로 사뿐사뿐 걸어 들어가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런. 너무 귀엽잖아.’
도혁은 나비가 꽃향기에 이끌리듯 재빨리 따라 들어갔다.
다행히 휴게실 안에는 재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정수기 앞에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재인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서재인 씨, 컨디션은 좀 어때?”
갑작스러운 도혁의 등장에 재인은 그야말로 기겁을 했다.
“팀장님!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요!”
“미안해, 많이 놀랐어?”
“제발 미리…….”
재인은 도혁에게 한마디 하려고 고개를 들었다가, 숨이 턱 막혔다.
보기만 해도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촉촉한 도혁의 눈에 핑크빛 하트가 가득했다.
몹시 부담스럽긴 한데 왜 이리 멋져 보이는 건지.
두근.
재인은 심장이 또 간질거렸다.
도혁이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눈이 풀린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되물었다.
“미리, 뭐?”
“돼, 됐어요. 이제 괜찮으니까 어서 가세요. 누가 보겠어요!”
무언가에 쫓기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재인과 달리, 도혁의 시선은 오로지 그녀만을 향해 있었다.
“잠시만. 케이크는 맛있었어?”
“맛있었어요. 참, 티 내지 않기로 약속했으면서 그러시면 어떡해요.”
재인이 핀잔을 주는데도 도혁의 입가에는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왜? 서재인 씨 주고 싶어서 인심 썼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
역시 그런 거였어.
재인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연지 씨가 이상하게 생각하잖아요!”
“연지 씨가?”
“제가 뭐요?”
도혁의 등 뒤에서 들려온 해맑은 목소리.
황급히 입구 쪽을 쳐다보니 연지가 생긋 웃고 있었다.
도혁과 재인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심하게 흔들렸다.
연지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두 분 얘기 중이신데 제가 방해했나요?”
“아, 아니야! 얘기는 무슨. 팀장님께 케이크 잘 먹었다고 인사하던 중이었어.”
“맞아요. 서 주임이랑 케이크 얘기한 겁니다.”
재인이 대충 둘러대는 말에 도혁이 더 어색하게 맞장구를 쳤다.
“팀장님, 저도 잘 먹었습니다. 근데 엄밀히 말해서 서 주임님 덕분에 먹게 됐으니 감사 인사는 서 주임님한테 해야죠. 그치, 오빠?”
연지는 방해꾼인 자신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도혁에게 씩 웃어 보였다.
“오빠?”
말도 안 돼!
재인은 두 귀로 똑똑히 듣고도 믿기지 않아 입이 쩍 벌어졌다.
연지는 재인에게 다가가 살며시 귓가에 속삭였다.
“실은 차 팀장님이 제 사촌 오빠예요.”
“사촌 오빠? 팀장님, 진짜예요?”
도혁이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연지가 코를 찡긋하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서 주임님, 죄송해요. 일부러 숨긴 건 아니에요. 경영수업 받을 때는 철저한 비밀 유지가 원칙이거든요.”
“비밀이라면서 나한테 얘기해도 돼?”
“서 주임님은 어디 가서 얘기하실 분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두 분 사귀시니까 어차피 알게 될 거, 계속 숨기는 것도 웃기잖아요?”
연지의 입에서 사귄다는 말이 나오자 재인은 흠칫 놀라 도혁을 째려봤다.
티 내지 말랬더니 그새를 못 참고!
“아, 아니야! 난 말 안 했어.”
도혁이 억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연지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두 분 다 너무 티 나서 모른 척하는 게 더 힘들었어요. 어찌나 속이 터지던지.”
그랬구나. 우리 연지 씨, 다 눈치채고 있었던 거구나.
재인은 연지에게 딱 잡아떼려 애쓰다 번번이 당했던 일들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연지가 잽싸게 재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이제 둘이 있을 때는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재인 언니?”
“……으응.”
“그럼, 재인 언니가 무지무지 아깝긴 하지만, 앞으로 우리 도혁 오빠 잘 부탁드려요.”
재인은 도혁을 부탁한다는 말에 그와 사귀게 된 게 비로소 실감이 났다.
“야, 이연지, 너 그만 가!”
도혁은 쑥스러운지 연지의 등을 억지로 떠밀었다.
“알았어. 방해꾼은 사라져 줄게. 재인 언니, 오빠 과거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물어보세요. 전 언니 편이에요!”
연지가 까르르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재인은 비로소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연지 씨랑 사촌이었다니. 팀장님, 혹시 저한테 뭐 더 숨기는 거 없으세요? 미리 마음의 준비 좀 하게요.”
“……없어. 그런 거.”
잠시 주춤하던 도혁은 멋쩍게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서재인 씨, 나도…… 앞으로 잘 부탁해.”
꺅!
재인은 새빨개진 얼굴을 숨기려고 푹 고개를 숙였다.
* * *
그날 밤.
재인은 집에서 홀로 저녁을 먹고 거실 소파에 앉아 도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연인이 생겨서인지 온종일 구름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팀장실에 눈이 가고, 시도 때도 없이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온종일 가슴에서 나비가 팔랑팔랑 날개짓을 하는 기분이랄까?
「서재인 씨, 나도…… 앞으로 잘 부탁해.」
그 말을 하면서 쑥스러워하던 도혁을 떠올리자, 재인은 대책 없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쉽게도 휴게실에서 마주친 이후로는 자꾸 엇갈려서 도혁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퇴근할 때도 도혁이 자리에 없어서 기다리다 결국 그냥 나왔다.
재인이 보낸 메시지는 확인하지 않은 상태 그대로였다.
그리고 지금, 9시를 훌쩍 넘긴 이 시간까지도 도혁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바빠서야. 예전이랑 다를 게 하나도 없잖아?”
재인은 도혁과의 첫날이 허무하게 지나가는 것 같아 너무 아쉬웠다.
오늘부터 1일인데!
‘계속 여기 있기도 그렇고, 일단 방에 들어가 있자.’
휴우.
재인이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띠리릭.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렸던 도혁이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