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괜찮아요, 키스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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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괜찮아요, 키스까지는
2023.01.21.
“그러니까, 그동안 민우 선배와 내가 서로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었던 거예요? 하, 기가 막혀서!”
재인은 소파에 앉아 팔짱을 낀 채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옆 소파에 앉은 도혁은 제가 생각해도 너무했다 싶었는지 겸연쩍은 얼굴로 재인의 눈치를 살폈다.
“미안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나는 또 나민우가…….”
“나민우우?”
“아니, 나민우 팀장님께서, ‘아까 얘기했던 거’라고 말씀하시니까, 크리스마스이브에 만나자고 하셨던 건가 싶어서……요.”
“그건 이달 마지막 날에 서연 언니 집에서 새해맞이 홈파티를 하자는 거였어요. 전 팀장님이 마음에 걸려서 고민해본다고 대답했던 거고요.”
자신이 마음에 걸렸다는 말에 도혁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런 줄도 모르고, 미안. 난 나 팀장님이 고백하려는 걸로 오해했어.”
“친한 선후배 사이일 뿐이라고 제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그러게. 친한 선배 언니와 사귀고 있을 줄이야. 두 분께는 나중에 제대로 사과할게.”
“당연히 그러셔야죠. 아무튼 이제 다시는 그런 오해하지 마세요. 아셨죠?”
재인이 나무라듯 눈을 흘기자 도혁은 눈을 내리깔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보는 고분고분한 모습이었다.
재인은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또 한 번 아까처럼 멋대로 굴면 안 참을 거예요.”
“갑자기 키스한 거? 미안해. 서재인 씨가 나를 좋아한다니 너무 기뻐서 그만.”
도혁의 입에서 키스라는 말이 나오자, 재인은 조금 전 낯 뜨거웠던 상황이 떠올라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 그것도 그렇고…… 오해해서 민우 선배한테 무례하게 구신 거요.”
“물론이지. 이제 그럴 필요가 없잖아? 서재인 씨가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는데. 그것도 아주 큰 소리로 말이야, 하하하!”
도혁은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표정으로 시원하게 웃어젖혔다.
재인의 얼굴이 불이 붙은 듯 빨개졌다.
네네, 엉겁결에 제가 큰 소리로 고백이란 걸 해버렸습니다, 난생처음으로.
신이 난 도혁과 달리 재인은 부끄러워서 어디라도 좋으니 숨고만 싶었다.
“서재인 씨, 그래서 말인데…….”
갑자기 도혁이 그녀의 옆에 바짝 다가와 앉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
거친 숨소리,
씩 올라간 입꼬리,
도혁은 어느새 야수로 돌변해 있었다.
“왜, 왜요?”
꿀꺽.
재인은 마른침을 삼켰다.
일단 묻기는 했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도혁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왜긴 왜겠어?
답을 알고는 있지만 민망해서 차마 문자화할 수 없을 뿐이지.
문득, 이번에는 도혁이 정말 멈추지 않을 것 같다는 낯 뜨거운 예감이 들었다.
좋아할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는데, 그 말을 해버렸으니까.
‘어떡하지? 미치겠네!’
생각만으로도 온몸이 간질거리고,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고,
발가락은 곱아들고,
숨은 점점 가빠지고.
‘안 되겠어. 일단 피하고 보자.’
재인은 갑작스러운 심신의 변화를 감당하기 버거웠다.
재인이 슬그머니 일어나려고 하는데, 갑자기 도혁이 소파에 놓인 그녀의 손을 그대로 잡아 눌렀다.
마치 그녀의 속내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왜, 왜 그러세요…….”
“서로의 마음은 충분히 알았으니, 아까 하던 거 이어서 해야지.”
말이 끝나자마자 도혁은 유일한 목적지인 앙증맞은 입술을 찾아 스윽 몸을 기울였다.
이미 그의 얄팍한 이성은 날아간 지 오래였다.
재인은 고개를 젖히며 다급히 말했다.
“배, 배고프지 않으세요?”
“전혀.”
도혁의 짙은 눈동자가 ‘이게 더 급해’라고 말하고 있었다.
두 입술 사이의 거리는 한 뼘 남짓.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에서 녹아들 것만 같은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성마른 도혁의 입술이 곧장 그녀의 입술 위로 내려앉으려는 찰나였다.
재인은 재빨리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 이러다 음식 다 식겠어요.”
도혁이 멈칫하더니 굳은 얼굴로 물었다.
“그렇게…… 싫어? 서재인 씨도 날 좋아한다고 했잖아. 서로 좋아하는데, 닿고 싶은 게 당연한 거 아닌가? 뭐가 문제지?”
맞는 말이긴 한데요, 차도혁 씨가 진도를 너무 확 빼버릴 것 같다는 게 문제예요.
재인은 민망해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꿀꺽 삼켰다.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그녀의 안색이 어두워진 것을 본 도혁이 당황해하며 뒤로 물러났다.
“아아, 내가 너무 들떠서 혼자 앞서나갔네. 미안해, 이제 그만할게.”
도혁은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재인은 심장이 저릿하더니 이내 튀어나올 기세로 가슴을 두드려댔다.
“잠깐…….”
무언가에 홀린 듯 재인이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뜻밖의 행동에 도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곧이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괘, 괜찮아요. 키스까지는…….”
“서재인 씨…….”
말을 잇지 못한 도혁은 살며시 재인의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서로를 향한 마음을 확인해서일까?
이번에는 이전의 다급히 밀어붙이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부드럽고 여유가 넘치는 입맞춤이었다.
재인은 입안을 가득 채운 뜨겁고 달큰한 감각에 점점 의식이 아득해졌다.
그러나.
몽롱한 그녀의 귓가에 별안간 익숙한 벨 소리가 들려왔다.
재인이 깜짝 놀라 입술을 떼며 말했다.
“티, 팀장님, 이제 그만요. 전화가…….”
“신경 쓰지 마.”
지금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도혁은 그녀의 입을 다시 막아버렸다.
“흐읍!”
재인이 그만하라는 듯 그의 등을 마구 두드려댔다.
하지만 도혁은 멈출 수가 없었다.
얼마나 기다려왔던 순간인데.
그는 조금이라도 오래 재인과 닿아 있고 싶은 마음에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쉼 없이 밀어붙였다.
어느 순간, 한동안 계속 이어지던 벨 소리가 뚝 끊겼다.
그리고.
띠리릭.
도어록 해제되는 소리가 들리더니, 앗! 하는 사이에 현관문에 이어 중문까지 벌컥 열렸다.
동시에 재인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도혁의 가슴을 밀쳤다.
그 바람에 도혁은 거실 바닥에 꽈당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런 그들을 얼빠진 표정으로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젠틀한 모습의 성준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계신 줄도 모르고 실례했습니다.”
성준은 누가 봐도 ‘무슨 일을 벌이다 급하게 떨어진 게 분명해 보이는 두 사람’에게 황급히 사과했다.
하필이면 지금.
도혁은 억울해하며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흠흠. 김 실장님, 무슨 일입니까?”
“저랑 오늘 댁에서 만나기로 하셨는데 그새 잊으셨습니까?”
아, 서재인에게 정신이 팔려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아, 그랬었죠. 그래도 갑자기 문을 여시면 어떡합니까?”
“죄송합니다. 도련님은 아직 퇴근 전인 것 같고, 서재인 씨에게 전화를 세 번이나 했는데 받지 않으셔서요. 혹시라도 서재인 씨가 아파서 쓰러지신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 실례를 무릅쓰고 들어왔습니다. 다행히 괜찮으신 것 같군요.”
그 말에 도혁과 재인은 가슴이 뜨끔했다.
재인은 새빨개진 얼굴로 나무라듯 도혁을 쳐다봤다.
‘제가 벨 소리가 들린다고 했잖아요!’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뭐.’
도혁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멋쩍게 웃었다.
재인은 그저 한숨만 나왔다.
‘누굴 탓해. 키스까지는 괜찮다고 붙잡은 내가 잘못이지.’
미쳤어, 미쳤어!
민우 선배와 서연 언니만으로도 민망해 죽겠는데, 하다 하다 김 실장님까지.
너무 창피해서 사경을 헤맬 지경이었다.
재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 실장님, 안녕하세요. 전 그럼 이만.”
짧은 인사만 남기고, 재인은 냅다 제 방으로 뛰어 들어가 버렸다.
본의 아니게 훼방꾼이 된 성준은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달콤한 키스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는 도혁은 그런 성준을 원망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다 서재로 향했다.
* * *
다음 날인 화요일 아침, 재인과 도혁은 가볍게 아침을 먹고 있었다.
어젯밤, 창피해서 저녁도 거르고 잠까지 설쳐 피로에 찌든 재인과 달리 도혁은 여느 때보다 더욱 활기가 넘쳐흘렀다.
“팀장님은 아주 푸우욱 주무셨나 봐요?”
재인의 뼈 있는 물음에 도혁은 너털웃음으로 화답했다.
“그럼. 서재인 씨가 나를 좋아한다니 근심 걱정이 싹 사라져서 잘 잤지. 하하!”
재인은 어이가 없어서 입이 쩍 벌어졌다.
지금 눈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헤벌쭉 웃고 있는 사람이 서슬이 시퍼렇고 무시무시했던 그 차도혁이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한 사람이라도 잘 잤다니 다행이네요.”
“왜, 서재인 씨는 잘 못 잤어?”
도혁의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얼굴을 보자 재인은 꾹꾹 눌러왔던 인내심이 폭발해버렸다.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창피해 죽겠는데 어떻게 잠을 자요! 팀장님이 다 책임지세요!”
재인이 버럭 화를 내는데도, 한껏 올라간 도혁의 입꼬리는 내려갈 줄을 몰랐다.
말을 말자.
재인은 이마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팀장님,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어요.”
“뭔데? 뭐든지 다 얘기해봐.”
“회사에서는 절대 티 내시면 안 돼요. 팀장님이 좋아하시는 ‘공사 구분은 철저히’, 아시겠죠? 들키면 낯부끄러워서 회사 못 나갑니다.”
“물론. 내가 공사 구분 하나는 철저하지.”
네네, 그러시겠죠.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출근 시간이라 일단 참는 재인이었다.
“꼭 약속하셔야 해요.”
“응, 약속하지.”
근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재인은 부디 제 예감이 빗나가기만을 빌었다.
“서재인 씨, 그럼 우리 이제 사귀는 거지?”
도혁이 진지하게 묻자, 재인은 발그레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만난 이래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재인이 모솔을 공식적으로 탈출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어느새 출근할 시간이 가까워졌다.
재인은 먼저 출근하는 도혁을 현관 앞까지 배웅했다.
“갈게.”
“네. 회사에서 뵙겠습니다.”
도혁은 현관문을 열고 나가려다 다시 재인에게 돌아왔다.
그러고는 쪽, 하고 재인의 입술에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다.
“서재인 씨, 이따 봐.”
씩 웃으며 문을 나서는 도혁에게서 빛이 났다.
재인은 문이 닫히고도 넋 나간 듯 서 있다 풋 웃음을 터뜨렸다.
‘차도혁 씨, 이렇게 갭이 크면 반칙이잖아요?’
* * *
“서 주임님, 좋은 아침이에요!”
재인이 사무실에 들어서자 연지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응. 좋은 아침. 근데…….”
재인은 ‘강 대리는 왜 이래?’라고 입 모양으로 물었다.
어제 도혁에게 무모하게 도전했다 무참히 깨진 나희는 빨랫줄에 걸린 시래기처럼 책상에 축 늘어져 있었다.
연지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자, 재인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 연지 씨, 이건 뭐야?”
책상에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쁜 조각 케이크와 커피가 놓여 있었다.
연지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팀장님이 팀원들한테 돌리셨어요. 무슨 기분 좋은 일이 있는지, 입이 귀에 걸리셨던데요?”
어쩐지 불안하더라니.
재인은 팀장실을 향해 슬쩍 눈을 흘겼다.
‘티 내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이러시기에요?’
들킬까 봐 간 떨리는 것도 있지만, 재인은 여러 의미로 곤란했다.
어린아이처럼 자랑하고 싶어서 티를 내는 도혁이 어이없으면서도 귀엽게 느껴져서.
‘이러면 뭐라고 할 수가 없잖아.’
재인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미소가 떠올랐다.
그걸 놓치지 않고 연지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물었다.
“서 주임님, 혹시 짐작되는 일 있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