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팀장님,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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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팀장님,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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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팀장님, 좋아해요!
2023.01.17.
도혁이 등을 보인 채 우뚝 멈춰 섰다.
돌아선 그의 짙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뭔데?”
“아, 그게…….”
막상 도혁의 눈을 마주하자, 재인은 말이 목에 걸려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결국 맥락 없이 일 얘기가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보, 보고서에 아무 문제도 없었나요? 수정 사항이라든지…….”
“없어. 할 말이라는 게 그거였어?”
도혁이 조금 맥이 풀린 얼굴로 빤히 쳐다보았다.
재인은 다시 한번 용기 내어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제가요…….”
“서재인 씨가.”
도혁이 그녀의 말을 나직이 따라 했다.
“팀장님을…….”
“나를?”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재인의 입에서는 또다시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기, 기다렸다고요. 배가 고파서 언제 오시나 했는데, 베이크 문 다녀오시느라 늦으셨던 거군요.”
재인은 떨리는 손으로 도혁이 사 온 디저트를 종이봉투째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도혁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스치더니 이윽고 허탈한 웃음이 이어졌다.
“그게 다야? 싱겁긴. 난 또, 나 좋다고 고백이라도 하는 줄 알았네.”
“네? 고, 고백은 무슨…….”
재인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우, 그냥 팀장님이 생각하는 게 맞는다고 묻어가지 그랬어. 입이 있는데 왜 말을 못 하니? 네 다짐은 다 어디 갔어?’
화장실 거울 앞에서 연습까지 했으면서.
재인의 속을 알 리 없는 도혁은 무심히 제 방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도혁과 재인은 소박한 밥상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된장찌개 맛을 본 도혁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그려졌다.
“아주 맛있군. 고마워.”
“네? 아…… 많이 드세요.”
재인이 얼떨떨한 표정을 짓자 도혁이 물었다.
“왜?”
“전에는 그런 말 안 하셨잖아요. 잘못 들은 줄 알았어요.”
“서재인 씨랑 살다 보니 변했나 봐. 나 책임져.”
“네? 제, 제가 왜 팀장님을……. 어찌 됐든 아주 바람직한 변화네요.”
도혁은 쑥스러워 고개를 숙인 재인을 지그시 바라보다 무언가 결심한 듯 천천히 입술을 뗐다.
“서재인 씨.”
“네?”
“이번 주 목요일 저녁에 같이 보낼까?”
“이번 주 목요일이라면…… 크리스마스이브?”
“맞아.”
쿵쾅쿵쾅.
좋아하는 도혁에게서 크리스마스이브를 함께 보내자는 말을 듣고야 말았다.
괜한 기대를 했다 무너질까 봐 애써 무심한 척했었는데.
가슴 한구석에서 몹시도 기다렸던 그 말을 듣자 재인은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하얀 눈이 내리는 크리스마스이브에, 멋진 야경이 펼쳐진 곳에서, 그의 코트 속에 폭 감싸 안겨 따뜻한 입맞춤을 하는 로맨틱한 장면이 재인의 눈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이내 정신이 번쩍 들면서 후회가 물밀듯이 몰려왔다.
‘원장님께 보육원에 가겠다고 약속해버렸는데 어떡하지? 지금 와서 못 간다고 할 수도 없고…….’
실망할 아이들의 얼굴을 생각하니, 재인은 후회하는 것 자체가 미안해졌다.
할 수 없이 무거운 마음을 안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죄송해요, 팀장님. 그날은 선약이 있어서…….”
재인의 말을 듣자마자 도혁은 늘 여유가 넘치는 나민우의 모습이 떠올라 미간을 확 찌푸렸다.
설마설마했는데 불길한 예감이 딱 맞아떨어졌다.
오늘 낮에 들었던 나민우가 크리스마스이브에 프러포즈 명소를 예약했다는 소문과 재인에게 할 말이 있다고 찾아왔던 일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도혁이었다.
나희가 했던 말도.
「지난주 월요일에 강 건너 카페에서 나 팀장님이랑 서 주임이 만나는 거 봤어요. 엄청 다정해 보이던데요? …… 누가 보면 사귀는 줄 알겠더라고요. 아무래도 나 팀장님이랑 서 주임이랑,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아요.」
그날, 재인은 분명 여자 선배를 만나러 간다고 했었는데.
「팀장님, 저 저녁에 급한 약속이 생겼어요.」
「누굴 만나길래? 나 팀장인가?」
「그냥 여자 선배예요.」
「서재인 씨 말을 믿어보기로 하지.」
지난번 야근할 때도 재인은 민우와 차 마신 사실을 숨겼었다.
「혼자?」
「그럼요, 당연히 혼자 갔죠.」
재인을 믿고 싶지만, 자꾸 불쾌한 기억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도혁을 괴롭혔다.
그래서 오늘 저녁, 재인과 솔직하게 얘기를 해보려고 저녁을 같이 먹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도혁이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무슨 약속인지 물어봐도 돼?”
“아, 그게…….”
“혹시, 나민우와 만날 건가?”
“네?”
“말해봐, 그런 거야?”
도혁의 입에서 난데없이 민우가 튀어나오자, 재인은 당황스러웠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민우 선배는…….”
“그날 나민우가 Y호텔 스카이라운지 예약했다면서?”
“그거 완전 비밀인데 어떻게 아셨어요?”
재인은 도혁이 어떻게 민우의 비밀을 알고 있는지 영문을 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밀이라며 놀라는 재인의 반응에, 도혁은 두 사람이 크리스마스이브에 만나기로 했다고 확신했다.
심장을 비수로 후벼 파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지난주에도 여자 선배를 만난다더니, 나민우와 만났었지?”
“그걸 어떻게……?”
재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팀장님, 설마 제 뒤를 따라오신 거예요?”
“그렇게 한가하지 않아. 누가 친절하게 두 사람을 봤다고 알려주더군.”
“아, 그날 민우 선배를 만나긴 했는데…….”
역시 만났었구나.
오해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이 사라져버렸다.
도혁은 질투에 눈이 멀어 재인이 해명할 틈도 주지 않고 쏘아붙였다.
“나한테는 기다리라고 하더니, 뒤에서는 나민우랑 나를 두고 저울질했었나? 나랑 키스까지 했으면서, 나민우가 만나자고 하니 곧장 넘어간 거야?”
“뭐라고요?”
재인은 너무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좋아한다고 했잖아. 그것도 아주 미치도록! 왜 내 진심은 봐주지 않는 거야?”
절규하듯 내뱉는 말들이 재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티, 팀장님…….”
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시는 거예요?
재인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도혁의 얼굴을 보자 심장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그를 감싸 안고 어루만져 주고 싶었지만 애써 억눌렀다.
우선은 오해를 푸는 게 먼저였다.
“팀장님, 그날은 민우 선배가 Y호텔에서…….”
“내 앞에서 그 자식 이름 입에 올리지 마.”
듣기만 해도 얼어붙을 것처럼 차가운 도혁의 목소리에 재인은 말문이 막혔다.
Rrrrrrr. Rrrrrrr.
그 순간, 서늘한 정적을 깨고 식탁 위에 놓인 재인의 휴대전화에서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둘의 시선이 동시에 휴대전화로 향했다.
[나민우]
최악의 타이밍을 맞춰 전화한 민우 때문에, 도혁은 마지막 인내심마저 폭발해버렸다.
‘나민우, 이 자식이!’
재인은 전화를 끊으려고 다급히 휴대전화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전화를 받으려는 걸로 오해한 도혁이 더 빠르게 재인의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스피커폰을 눌렀다.
―여보세요? 재인아, 아까 얘기했던 것 말인데, 생각해 봤어?
아까 얘기한 거?
도혁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힘주어 말했다.
“나, 차도혁입니다.”
“아, 안 돼요!”
때늦은 재인의 외침이 허무하게 울려 퍼졌다.
스피커 저편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차 팀장님이 왜 재인이 전화를……?
“내가 서재인 씨를 아주 많이 좋아합니다.”
―네에?
재인은 다급히 도혁의 팔을 붙들며 휴대전화를 낚아채려 했다.
“팀장님, 그만하세요!”
“나민우에게 들킨 게 그렇게 속상해? 그렇게 이 자식이 좋아?”
질투심에 눈이 먼 도혁은 휴대전화에 대고 쏘아붙였다.
“절대 당신한테 서재인 보낼 생각 없으니까 꿈 깨! 그리고 다신 전화하지 마!”
“제발 그만해요!”
재인은 눈을 질끈 감고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내가 좋아하는 건 팀장님이란 말이에요!”
응?
그 순간, 도혁은 뇌 속 회로가 뚝 끊겼다.
‘지금 뭐라고……?’
그때, 스피커폰으로 서연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인아, 대체 무슨 일이야? 괜찮아?
응?
전혀 예상치 못한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도혁은 넋이 나간 얼굴로 눈만 껌벅거렸다.
좀 전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재인은 그 틈을 타 재빨리 휴대전화를 빼앗아 다급히 말했다.
“언니, 미안해요! 뭔가 오해가 있어서.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할게요. 민우 선배한테도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재인아, 그 사람 누구야? 이상한 사람 아니야?
“괜찮아요. 우리 팀의 차 팀장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혁의 뜨거운 입술이 재인의 입술을 집어삼킬 듯 덮어버렸다.
“읍!”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재인은 본능적으로 그에게서 벗어나려 가슴을 밀쳤다.
도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목덜미와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아 제 몸에 바짝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지난번 미처 풀지 못했던 갈증까지 보태 재인의 입술을 힘 있게 머금었다.
“읍! 으읍!”
재인은 숨이 막혀 다급히 도혁의 팔을 두드렸다.
그러자 목덜미를 잡은 손에서 힘이 빠지면서 마치 자비라도 베푸는 듯 도혁의 얼굴이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재인은 참았던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하아, 하아. 하아…….”
재인의 숨통이 트인 것도 잠시.
그녀의 선홍빛 입술에 시선을 빼앗긴 도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숙였다.
주춤하며 뒤로 물러서던 재인의 고개는 머리카락을 파고드는 뜨거운 손길에 붙들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참아왔던 열망이 폭발한 도혁은 다시 맞닿은 그녀의 입술을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재인은 정신없이 밀고 들어오는 그를 상대하느라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폭풍처럼 거칠게 몰아붙이던 도혁의 입술이 재인에게서 천천히 멀어졌다.
하아. 그녀의 입술이 아쉬운 듯 그의 입술을 따라 앞으로 쏠렸다.
그때, 재인의 귓가에 서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인아! 재인아! 말 좀 해봐! 괜찮은 거야?
갑자기 말이 없어진 재인이 걱정돼서, 서연이 여태 전화를 끊지 않고 있던 것이었다.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재인은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도혁과 키스했다는 걸 서연과 민우에게 들켰을까 봐.
재인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감싸며 애타는 서연의 부름에 답했다.
“언니, 저 괜찮아요.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무슨 일 생긴 줄 알았잖아! 너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너희 팀장님이라는 사람 혹시 스토커 아니니?
다짜고짜 휴대전화를 빼앗고서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고 소리쳤으니,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어도 충분히 오해할 만한 상황이긴 했다.
재인은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해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 거 아니에요, 언니. 걱정 안 해도 돼요.”
―정말이야?
“서재인 씨, 잠시만.”
갑자기 도혁이 전화를 가져가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공손히 말했다.
“안녕하세요. 인사가 늦었습니다. 대산F&G 상품기획 1팀 팀장 차도혁이라고 합니다. 절대 스토커나 이상한 사람이 아니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래도…….
“두 분께는 본의 아니게 실례가 많았습니다. 다음에 직접 뵙고 사과드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나민우 팀장님께도 반말해서 죄송하다고 꼭 좀 전해주십시오.”
―아, 네…….
너무나도 정중한 사과에 서연을 할 말을 잃은 듯했다.
“언니, 미안해요!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요.”
재인은 다시 한번 사과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도혁을 찌릿, 째려보며 버럭 소리쳤다.
“팀장님! 제 얘기는 들어보지도 않고 멋대로 그러시면 어떡해요!”
“서재인 씨, 정말 미안해. 내가 잠깐 질투에 눈이 멀어서 실수했어.”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도혁은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며 사과했다.
조금 전, 야수처럼 거칠게 밀어붙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순한 양이 되어버린 도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