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크리스마스이브는 누구와?
(65/129)
65화. 크리스마스이브는 누구와?
(65/129)
65화. 크리스마스이브는 누구와?
2023.01.14.
“아아, 좋을 때다. 10년 차 유부남은 서럽네요. 데이트는커녕 아들 녀석들이 놀자고 달라붙어서 쉬지도 못하는데.”
김 팀장이 행복한 불평을 늘어놓으며 넉살 좋게 웃었다.
따라 웃던 민우가 갑자기 아, 하더니 안경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인사과에 들를 일이 있는데 깜박 잊었네요. 저 먼저 가봐야겠습니다.”
민우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앞서 나갔다.
민우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지자, 김 팀장이 도혁에게 나직이 말했다.
“나 팀장님 아마도 곧 좋은 소식 있을 것 같아요.”
“좋은 소식이요?”
“크리스마스이브에 휴가도 냈어요. 여직원들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그날 남산 Y호텔 스카이라운지 예약하는 걸 본 사람이 있대요. 거기가 프러포즈 명소거든요.”
“프러포즈?”
순간 도혁의 관자놀이에 굵은 힘줄이 솟았다.
“여직원들이 속상하다고 아주 난리가 났어요. 나 팀장님이 은근 인기가 많잖아요. 아, 나도 그럴 때가 있었는데. 처음 입사했을 때는…….”
김 팀장이 소싯적 잘나가던 시절을 신나게 읊어댔지만, 도혁의 귀에는 아무 말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나민우가 크리스마스이브에 프러포즈 명소를 예약했다는 사실만 미치게 신경 쓰일 뿐이었다.
‘정말 서재인에게 고백이라도 하려는 건가? 설마 결혼 전제로 사귀자는 개수작을?’
절로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도혁은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흔들리는 정신줄을 가다듬었다.
‘아직 섣부른 판단은 일러. 나민우에게 다른 여자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거야말로 도혁이 가장 바라는 바였다.
하루빨리 재인의 눈앞에서 사라져줬으면.
그러다 별안간, 최악의 경우의 수가 떠올라 버렸다.
‘만약, 진짜, 서재인 씨에게 고백하는 거라면? 그리고 혹시라도 서재인 씨가 받아들인다면?’
젠장!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갑갑하고 미쳐버릴 것 같았다.
“차 팀장님, 괜찮으세요?”
“……!”
잔뜩 인상을 찌푸린 도혁을 보며 김 팀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져서요.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세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도혁은 곧장 사무실로 달려갔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일에 몰두하고 있는 재인이 보였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팀장실에 호출해서 크리스마스이브에 나민우와 만나기로 했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업무 시간에 사적인 감정에 미쳐 날뛰는 볼 성 사나운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직 아무것도 확인이 된 게 없는데 경거망동하지 말자. 일단, 침착하게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는 거야.’
도혁은 마음을 다잡고 회의 자료를 펼쳤다.
당장은 부장의 지시대로 팀원들에게 회의 내용을 전달해야 한다.
‘그래,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분해야…… 혹시 어제 나민우가 만나자고 전화한 건가?’
손에 쥔 서류가 심하게 구겨졌다.
어제저녁 전화 건 이를 확인하고 당황해하던 재인의 얼굴이 도혁의 뇌리를 스쳤다.
자칫 방심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왔다.
‘젠장! 나민우, 정말 성가시게 구는군.’
* * *
같은 날 점심시간, 재인은 규민과 식사를 하고 카페에 마주 앉았다.
몸이 허할 때는 보양식을 먹어야 한다는 규민의 손에 이끌려 삼계탕을 먹고 난 뒤였다.
“규민아, 잘 먹었어. 고마워.”
“뭐, 이 정도를 가지고. 평생 먹여 살릴 자신도 있는데.”
장난기 가득한 얼굴의 규민이 이제는 순수한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 말을 던졌다.
재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미룰수록 더 미안해져. 오늘은 꼭 얘기해야 해.’
어떻게 거절의 말을 꺼내야 할지 고심하고 있는 그녀에게 규민이 물었다.
“재인아, 크리스마스이브에 뭐 해? 심심하면 나랑 놀래?”
“……!”
가볍게 던진 말과 달리 규민은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더는 웃어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재인은 마음을 굳히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규민아, 미안해. 그날은 약속이 있어.”
“아, 선약이 있었구나.”
“약속 때문이 아니야. 규민아, 그동안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역시 넌 친구로밖에 느껴지지 않아. 정말 미안해.”
규민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잠시 재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팀장님 때문이지?”
재인은 간이 철렁했다.
“무, 무슨 소리야.”
“설마설마했는데……. 출장 가기 전부터, 두 사람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어. 팀장님이 바쁜 일정 제쳐두고 출장을 따라갔다는 걸 알았을 땐 제대로 뒤통수 맞은 기분이더라.”
“아…….”
“팀장님이 너 좋아하는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너도…… 팀장님이 좋아진 거지?”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재인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거야말로 규민을 기만하는 일인 것 같아서.
재인의 암묵적 동의에 규민의 눈동자에 서려 있던 마지막 희망의 빛이 사그라졌다.
“역시 그런 거구나. 네가 팀장님과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해서 안심했는데……. 내가 너무 방심했어.”
“……그땐 정말 그랬어.”
“알아. 네가 어떤 앤지 잘 아니까. 좀 더 일찍 다가가지 못한 게 후회될 뿐이야.”
“미안해.”
괴로워하는 규민의 앞에서, 재인은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규민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탓이 아니야. 7년 전에 널 잡지 못한 내 탓이지.”
“미안해.”
“미안하단 말 그만해. 그 말 한 번만 더 하면 너랑 친구 안 할 거야.”
“뭐?”
“괜찮다고. 고백했다 차였다고 친구의 인연까지 끊고 싶진 않아.”
“규민아…….”
“근데 좀 기다려줘. 한동안은 실연의 상처를 치유하느라 많이 힘들 것 같으니까.”
규민이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간다.”
“으응. 그래.”
희미한 미소만 남기고, 규민이 밖으로 나갔다.
재인은 그의 쓸쓸한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 * *
한편, 그즈음 사무실에서는 나희가 툴툴거리며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팀장님은 대체 어딜 가신 거야?’
나희는 오늘 작정을 하고 점심시간에 혼자 남았다.
도혁과 같이 먹을 도시락까지 미리 준비해서.
그런데 정작 도혁이 없었다. 점심시간 전에 밖으로 나가더니, 30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화장을 정리한 나희가 손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도 성에 안 차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팀장실 유리 벽에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긴 웨이브 머리를 한쪽 어깨 위로 늘어뜨리고, 쫙 달라붙은 명품 원피스로 육감적인 몸매를 한껏 살린 제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다.
“서재인이랑은 비교가 안 되지. 그동안 내가 맘만 먹으면 안 넘어온 남자가 없었다, 이거야. 기다려, 차도혁!”
나희가 의기양양하게 선포한 그때였다.
드르륵, 자동문이 열리면서 그토록 기다렸던 도혁이 카리스마 넘치는 자태로 걸어 들어왔다.
나희는 간드러지게 웃으며 잽싸게 도혁에게 다가갔다.
“어머, 팀장님! 어디 갔다가 이제 오세요?”
“볼일이 좀 있어서.”
도혁이 갑자기 왜 이래, 라고 말하듯 눈썹을 끌어 올렸다.
“팀장님, 식사는 하셨어요?”
“네.”
도시락은 패스.
나희는 한껏 눈웃음을 치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팀장님, 저 따뜻한 차 한 잔만 사 주시면 안 돼요? 상의할 것도 있고.”
우리의 미래에 대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나희를 보며 도혁이 무심히 답했다.
“바쁘니까 다음에 합시다.”
“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나희는 그녀의 미모에 혹하기는 고사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는 도혁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플랜 B 따위가 필요한 적이 없었던 나희였기에 다음 계획은 생각조차 해두지 않았다.
‘엄청 신경 썼는데, 이런 날 보고도 아무 반응이 없어?’
무시당한 충격으로 나희가 우물쭈물하자 도혁이 답답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 다른 용건이 있습니까?”
“……!”
서릿발같이 차가운 반응에 나희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녀의 자존심이 바닥을 친 그 순간,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 점심은 맛있게 드셨어요?”
언제 왔는지 민우가 사무실 앞에 서 있었다.
창피해서 쥐구멍에 숨고 싶었던지라, 나희는 민우의 등장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어머, 나 팀장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서 주임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왔는데 아직 안 왔나 보네요?”
“네, 오면 나 팀장님이 찾으셨다고 전해드릴게요.”
“고맙습니다. 그럼 부탁 좀 할게요.”
민우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떠났다.
“서 주임이랑 나 팀장님, 정말 친한 사이인가 봐요.”
나희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도혁에게 말을 걸다 흠칫 놀랐다.
도혁이 서늘한 눈빛으로 민우가 사라진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별안간 어두컴컴한 나희의 머릿속에 번쩍 불이 들어왔다.
‘뭐야? 지금 나 팀장님이 서재인 찾았다고 신경 쓰는 거야?’
그동안 찜찜했던 일들이 전광석화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다음 순간, 나희는 분한 마음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서재인, 며칠 전에 나 팀장님이랑 끈적하게 만나고 있었으면서, 팀장님을 꼬셔? 팀장님은 지금 서재인한테 속고 있는 거야. 내가 가질 수 없더라도, 서재인 너랑 잘되는 꼴을 절대 못 봐!’
도혁에게 재인의 실체를 까발릴 적절한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때가 온 것 같았다.
나희는 일부러 부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난주 월요일에 강 건너 카페에서 나 팀장님이랑 서 주임이 만나는 거 봤어요. 엄청 다정해 보이던데요?”
“지난주 월요일?”
도혁의 미간이 마구 구겨졌다.
나한테는 아무 반응도 없었으면서 서재인 얘기에 저렇게 격한 반응이라니.
나희는 쓰린 속을 달래며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누가 보면 사귀는 줄 알겠더라고요. 아무래도 나 팀장님이랑 서 주임이랑,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아요.”
호호호. 나희가 간드러지게 웃자 도혁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강 대리.”
“네?”
“남 일에 신경 쓸 시간 있으면 일에 좀 더 신경 써요. 캐도 캐도 나오는 보고서 오타나 잡든지.”
“……!”
도혁은 먹구름이 잔뜩 낀 얼굴로 팀장실에 들어가 버렸다.
그의 뒷모습을 황망히 쳐다보던 나희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지금 나한테 화풀이한 거야?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닌데? 나만 나쁜 사람 됐잖아. 이게 다 서재인 때문이야!’
나희는 재인의 빈자리를 노려보며 괜한 분풀이를 했다.
* * *
‘팀장님이 오실 때가 한참 지났는데…….’
그날 저녁.
재인은 저녁을 차려놓고 도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고서를 제출하려 팀장실에 들어갔을 때, 뜻밖에도 도혁이 오늘은 일찍 퇴근해 집에서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다.
「오랜만에 서재인 씨가 차려준 밥 먹고 싶어.」
출장을 다녀온 뒤로 계속 재인이 아팠으니 오랜만이긴 하다.
자신이 한 밥을 먹고 싶다는 그 말이 왜 이리도 설레는지.
재인은 괜스레 볼이 발그레해졌다.
‘역시…… 솔직하게 얘기해야겠지?’
나도 차도혁 씨를 좋아한다고.
자꾸 부끄럽고 피하고 싶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시간이 흐른다고 달라질 감정이 아니니까.
재인은 스스로를 다독이며 자꾸 수그러드는 마음을 다잡았다.
잠시 후, 드디어 기다리던 도혁이 집에 돌아왔다.
“서재인 씨, 몸은 좀 어때?”
도혁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재인의 안부부터 물었다.
“덕분에 싹 다 나았어요. 감사합니다.”
“다행이다. 자, 이거.”
재인은 도혁이 내민 하늘색 종이봉투를 받아 들고 깜짝 놀랐다.
그 안에는 몽블랑과 바움쿠헨을 비롯한 다채로운 디저트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어머, 이건 ‘베이크 문’이잖아요!”
“디저트. 오다가 주웠어.”
무심히 던진 말에서 도혁의 진심이 느껴져 재인은 가슴이 뭉클했다.
자신을 위해 일부러 왕복 1시간이 넘는 베이커리까지 다녀오다니.
“맛있는 냄새가 나는군. 옷 갈아입고 올게.”
도혁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마음 졸이며 기다렸던 탓일까, 재인은 일렁이는 가슴을 더는 주체할 수 없어 그를 불러 세웠다.
“저기, 팀장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