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어쩌다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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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어쩌다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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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어쩌다 키스
2023.01.10.
겨울답게 일찌감치 어둑어둑해진 저녁 무렵, 성준의 차가 유라의 집 앞에서 멈췄다.
“최유라 씨, 그만 일어나시죠.”
성준이 곤히 잠든 유라의 어깨를 살며시 흔들어 깨웠다.
으으음.
잠에 취한 유라는 눈도 못 뜨고 몸을 뒤척거리다 고개를 운전석 쪽으로 돌리고는 다시 잠에 빠졌다.
오목조목한 그녀의 이목구비가 눈에 들어오자 성준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사랑스럽다.’
저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에 성준은 흠칫 놀랐다.
성준은 집에 가는 길에 들르면 된다며, 술에 취한 유라를 데려다주겠다고 자청했었다.
차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진 유라를 태우고 오는 내내 성준은 마음이 무거웠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상처받아 괴로워하는 그녀를 보니 심장이 죄어드는 것 같았다.
더는 흔들리지 않겠노라 굳게 다짐하며 곧장 이사까지 감행한 성준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유라와 다시 만나자, 그 다짐은 파도에 쓸린 모래성처럼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다음 주에 선을 본다고? 설마, 홧김에 진짜로 결혼하는 건 아니겠지?’
성준의 미간에 깊은 세로줄이 패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유라라 절대 아니라고 확신할 수가 없어서.
불쾌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지금 이 상황에서 네가 어쩔 건데?’
볼 장 다 본 듯 모질게 연락을 끊었으니, 이제 와 성지훈으로서 유라의 앞에 나타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성지훈, 만나기만 해봐라. 부숴버릴 거야!」
분노에 찬 유라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성준은 후회로 가득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옥탑방으로 이사하는 게 아니었다.
그랬다면 최유라를 만날 일도 없었을 텐데.
당연히 이런 고민을 할 일도 없을 테고.
어머니의 잔소리에 귀는 따가웠겠지만, 나름 만족스러운 독신 생활을 즐기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라를 다시 만난 지금.
성준은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음을 깨달았다.
무탈하게 원래의 생활로 돌아간다 해도 이제는 결코 이전처럼 만족스러울 수 없을 테니까.
어느새 유라가 그의 가슴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성준은 답답한 심정으로 잠든 유라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렇게 홀린 듯 유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기를 수십 여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위가 완전히 어둠에 둘러싸여 있었다.
성준은 아쉬움을 삼키며 유라의 어깨를 흔들었다.
“최유라 씨, 많이 늦었습니다. 그만 일어나세요.”
유라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으음, 누구…….”
힘겹게 고개를 든 유라가 아직 잠이 덜 깬 듯 몽롱한 눈빛으로 성준을 멍하니 쳐다봤다.
뒤이어 그녀의 입에서 짙은 알코올 냄새와 웅얼대는 소리가 뒤섞여 나왔다.
“이씨, 성지훈 이 나쁜 새끼…….”
“저기…… 최유라 씨?”
“어디 갔다가 이제 왔어!”
갈급한 외침과 함께 유라가 성준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최유라 씨, 이러시면…… 흐읍!”
성준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유라가 뜨겁게 입술을 부딪쳐 왔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성준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성준은 더는 참을 수 없어 유라의 등을 단단히 감싸 안았다.
“으음…….”
가냘픈 음성과 함께 그의 목에 걸쳐 있는 유라의 팔이 더 세게 감겨왔다.
성준은 망설임 없이 제 입술에 닿아 있는 보드라운 감촉을 입안 가득 머금었다.
냉철한 이성을 앞세우며 살아온 35년이 송두리째 날아가는 순간이었다.
누구의 비서도 아닌, 점잖은 매너남도 아닌, 한 남자로서 성준은 유라에게 깊숙이 파고들었다.
지금 이 순간, 성준의 머릿속은 오로지 제 품에 안은 미치도록 사랑스러운 한 여자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 사이를 가로막는 문제들은 어둠 속에 묻어둔 채.
* * *
그즈음, 재인과 도혁은 편안한 차림으로 식탁에 마주 앉아 있었다.
“유라가 계속 전화를 안 받네요. 잘 들어갔겠죠?”
재인이 초조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그러자 도혁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서재인 씨, 김 실장님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 아마, 술 취한 친구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한 남자일걸?”
“그건 그렇죠?”
“당연하지. 유라 씨 많이 취한 것 같던데, 아마 지금쯤 집에서 곤히 자고 있을 거야.”
“그렇겠네요. 제가 괜한 걱정을 했어요.”
그제야 재인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떠올랐다.
도혁이 그녀를 넌지시 바라보며 씩 웃었다.
“이제야 제대로 돌아왔군.”
“뭐가요?”
“서재인 씨가 이틀 만에 다시 내 눈을 똑바로 본다고.”
“아…….”
유라의 일로 정신이 없어서 잠시 잊고 있었다.
재인은 화악 붉어진 얼굴을 들킬까 푹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도혁이 따라 일어서서 재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또 도망가려고?”
“……아니에요.”
“그럼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돼?”
“……!”
재인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도혁이 변명하듯 말했다.
“걱정하지 마. 아무것도 안 할 테니까.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
이틀 전, 도혁 자신이 했던 말을 의식하는 게 분명했다.
「서재인 씨 말대로, 나 아까 겁난 거 맞아. 하마터면 못 참을 뻔했거든.」
재인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팀장님, 출장 다녀오느라 일이 밀려서 바쁘다면서요. 낮에도 못 하시고…….”
“잠깐이면 돼. 일은 조금 있다가 할 거야.”
“아, 그럼 저도 거들게요.”
“오늘까지는 푹 쉬어. 방심하다 병이 도지면 안 되니까.”
어느새 재인은 낯설기만 했던 도혁의 자상한 모습이 포근하게 느껴졌다.
‘그럼 잠시만……?’
재인이 못 이기는 척 다시 자리에 앉으려던 그때였다.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에서 경쾌한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발신자를 확인한 재인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팀장님, 저 들어가 봐야겠어요.”
“누구길래?”
재인은 대답 대신 고개만 꾸벅 숙이고는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를 황망히 쳐다보던 도혁은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조금 전, 무언가 감추려는 듯한 재인의 모습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혹시…… 나민우?’
* * *
방으로 돌아온 재인은 가쁜 숨을 고른 뒤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원장님, 안녕하세요!”
전화를 건 이는 그녀가 입양되기 전까지 머물렀던 별사랑보육원의 김성희 원장이었다.
수화기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인아, 잘 지냈어? 내가 쉬는 데 방해한 건 아니니?”
“괜찮아요. 원장님도 잘 지내시죠? 아이들은요?”
“우린 다 잘 지내지. 애들이 너 보고 싶다고 난리야.”
“아, 그래요? 저도 너무 보고 싶어요.”
재인은 입양되고 나서도 보육원에 봉사를 나가는 엄마 아빠를 따라다녔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어린아이들을 돌보고 공부도 봐주면서 정을 쌓아왔다.
“너희 부모님께서 이번 크리스마스이브에도 케이크와 빵을 보내주신대. 늘 마음 써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
“그래요? 아이들이 참 좋아하겠네요!”
행복해할 아이들의 모습이 벌써 눈앞에 선한 재인이었다.
그때, 김 원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재인아, 혹시 이번 크리스마스 때도 와줄 수 있겠니? 애들이 물어보라고 하도 성화라서.”
“아……!”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가 며칠 남지 않았다.
재인은 서울로 올라오면서 보육원에 자주 가지 못했지만,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잊지 않고 내려가서 행사를 도우며 아이들과 하룻밤을 보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선뜻 내려가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불현듯 떠오른 누구 때문에.
‘혹시라도 팀장님이 함께 있자고 하면 어쩌지?’
그동안 친구들이 연인과 크리스마스 같이 보낸다고 들떠 할 때도 재인은 별생각이 없었다.
그런 그녀의 가슴에 갑자기 핑크빛 기대가 새록새록 자라나고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며칠 남지 않은 지금.
도혁은 아직까지 아무 말도 없었다.
혹시,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으려나?
하지만, 아직 팀장님이랑 사귀는 것도 아니잖아.
어쩌면, 팀장님은 아무 생각도 없는데 괜히 혼자 헛물만 켜고 있는 건지도.
재인이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느라 잠시 대답을 잊은 사이, 김 원장이 당황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아아, 미안해. 부담 주려던 게 아닌데……. 재인이 너도 사생활이 있을 텐데, 괜한 걸 물어봤어. 크리스마스 잘 보내고, 다른 때 한번 들르렴. 애들이 기다리니까.”
그 말에 재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뒤이어 만나러 갈 때마다 기뻐서 문밖으로 뛰어나와 안기던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재인이 못 간다고 했을 때 실망할 아이들의 얼굴도.
“아니에요, 원장님. 저 갈 수 있어요!”
“정말이니? 아이들이 정말 기뻐하겠다! 고마워, 재인아.”
“뭘요. 제가 애들 보고 싶어서 가는 건데요.”
“그럼 그때 보자. 기다리고 있을게.”
“네, 그때 뵈어요.”
재인은 전화를 끊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이들을 보러 가기로 한 건 백번 생각해도 잘한 결정이었다.
그런데 도혁을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혹시라도 뒤늦게 도혁이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자고 하면 뭐라고 해야 할지.
보육원에서 자란 걸 부끄럽게 여기거나 숨기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의 삶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을 뿐.
* * *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서 끝내겠습니다. 팀원들에게 논의된 사항들 잘 전달해 주세요.”
이 부장의 말을 끝으로 팀장급 회의가 끝이 났다.
가뜩이나 몸이 찌뿌둥한 월요일 아침, 2시간 넘게 쉴 틈 없이 진행된 회의로 다들 초주검이 된 상태였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쌩쌩한 이가 단 하나 있었으니, 바로 워커홀릭 차도혁이었다.
회의실을 밖으로 나온 도혁에게 민우가 친근하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차 팀장님은 체력이 대단하시네요. 전 기운이 쪽 빠졌는데.”
“아닙니다.”
도혁은 어제의 불길한 느낌이 아직도 남아 있어 민우에 대한 경계를 강화했다.
‘어제 서재인 씨한테 전화한 사람, 아무래도 나민우 같은데……. 지난번 전화도 그렇고, 친한 선후배라는 핑계로 주말 늦은 시간까지 계속 전화를 걸다니. 역시 마음에 안 들어.’
“곧 크리스마스네요. 시간 참 빨리 가죠. 차 팀장님은 뭐 특별한 계획 있으세요?”
“아, 뭐…….”
도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 크리스마스에는 할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다른 기업 송년 파티에 끌려가 얼굴 비추느라 성가셨던 기억이 다였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분명 다를 것이다.
서재인과 함께할 거니까.
그때, 둘 사이에 마케팅팀 김정호 팀장이 끼어들었다.
“차 팀장님, 아무리 일이 좋기로서니, 설마 크리스마스에도 일하시는 건 아니죠?”
“아닙니다.”
일과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이 자자한 도혁에게서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오자, 김 팀장은 눈빛을 반짝이며 다시 물었다.
“오, 혹시 데이트라도?”
재인과 크리스마스 데이트라.
도혁은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끌어내리며 대충 얼버무렸다.
“뭐, 그런 거죠.”
“오오, 정말인가 보네요? 나 팀장님은요?”
“저도 당연히 데이트해야죠.”
민우는 쑥스러운지 괜스레 안경을 올리며 멋쩍게 웃었다.
‘데이트? 설마 서재인 씨랑 할 생각인 건 아니겠지?’
도혁은 민우를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