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내 눈 똑바로 쳐다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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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내 눈 똑바로 쳐다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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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내 눈 똑바로 쳐다봐
2023.01.07.
“지훈 오빠가 뭐? 똑바로 얘기해봐.”
유라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지훈 오빠가 사라졌어!
“뭐? 어디로?”
이게 무슨 황당한 전개야?
―몰라. 같이 저녁 먹으려고 왔는데 옥탑방이 텅 비어 있어.
“하룻밤 사이에? 무슨 신기루도 아니고.”
―이제 나 어떡해! 성지훈, 이 나쁜 놈! 어떻게 말도 없이 사라져? 나랑 좋다고 커플템 두를 땐 언제고!
격양된 유라의 목소리에서 한이 느껴졌다.
“헤어지면 처치 곤란이라고 지금까지 한 번도 안 했던 커플템을? 너 아주 단단히 빠졌었구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아, 미안. 전화는 해봤어?”
―어젯밤부터 연결이 안 돼. 수신 거부했나 봐. 매일 밤 나랑 1시간 넘게 통화했으면서!
기가 막혀서.
유라가 속상할 만도 했다.
재인은 어린애 달래듯 유라를 다독였다.
“유라야, 당장은 속상하겠지만 곧 괜찮아질 거야. 그렇게 무책임하고 이상한 사람이랑은 어차피 오래 못 가. 빨리 끝나서 차라리 잘된 거지.”
―그런 거겠지?
“그럼. 그러니까 그만 울어. 내가 지금 나갈까?”
―아니야. 지금 만나봤자 울기만 할 것 같아. 내일 만나.
“그럼 내일 점심 같이 먹자.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기운 내고.”
―알았어.
십여 분 후, 유라는 마지막까지 울먹이다 전화를 끊었다.
유라와 옥탑방 남자의 만남에 지대한 공을 세운 재인은 그동안 유라가 잘못되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다.
사실, 옥탑방 남자가 어처구니없게 사라져버려서 고맙기까지 했다.
시간이 지나면 유라도 예전으로 돌아오겠지.
재인은 유라를 달래느라 제 얘기는 하나도 꺼내지 못했지만, 그저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또 방 안 가득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Rrrrrrr. Rrrrrrr.
‘유라가 그새 마음을 바꿨나?
그러나 이름을 확인한 재인은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한규민]
골치 아픈 문제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안 받으면 끊을 법도 한데 벨 소리가 줄기차게 울려댔다.
재인은 하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재인아, 몸은 좀 어때?
“많이 좋아졌어. 걱정 안 해도 돼.”
―정말 다행이다.
잠시 말이 없던 규민이 입을 열었다.
―지금 뭐 해?
“뭐 하긴. 집에서 쉬고 있지.”
―그럼 잠깐 너 보러 가도 될까?
“응? 아, 아니야. 지금 엉망이라……. 졸려서 자려던 참이었어.”
―그래? 내일은 어때?
내일? 일요일? 유라 만나야 하는데?
유라 상태가 좋지 않으니 같이 만날 수도 없고.
“내일은 선약이 있어서……. 월요일에 얘기하면 안 될까?”
―알았어. 어쩔 수 없지.
규민이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안해, 규민아.”
―저기, 재인아.
“응?”
―아니야. 월요일에 보자. 어서 쉬어.
규민이 전화를 끊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는데…….’
규민에게 갈수록 더 미안해져서 마음이 편치 않은 재인이었다.
‘휴우. 힘들어도 월요일에는 꼭 얘기해야겠어.’
* * *
“유라야, 여기! 여기!”
재인은 입구에 들어선 유라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일요일 오후, 번화가에 자리 잡은 이탈리안 맛집답게 넓은 가게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 사이를 유라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가며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걸어 들어왔다.
어제의 여파가 컸는지 얼굴도 부쩍 수척해 보였다.
“좀 괜찮아?”
“아니.”
“그럴 만도 하지. 배고프지? 아침은 먹었어?”
“아니. 도저히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어제부터 아무것도 안 넘어가.”
“2시가 넘었는데 아무것도 안 먹었단 말이야? 안 되겠다. 일단 먹자. 배고프면 기분이 더 우울해지는 법이야.”
“어떻게 말도 없이 사라져? 내가 그렇게 싫었나?”
“네가 어때서? 그 남자가 진짜 이상한 거지.”
그래도 전혀 위로가 안 되는 모양인지, 유라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분통을 터뜨렸다.
“아무리 싫어도 그렇지! 그냥 말을 하면 될 걸, 사람을 이렇게 개무시해도 되는 거야?”
“안 되지. 성지훈 참 몹쓸 사람이네. 빨리 알아서 다행이야.”
“성지후우우우운! 내 눈에 걸리기만 해봐라, 가만 안 둘 거야! 감히 나를!”
유라의 서슬 퍼런 눈빛을 처음 목격한 재인은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했다.
사귀기로 한 사람이 없어진 상처도 상처지만, 연애 고수로서의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진 충격이 꽤 큰 것 같았다.
유라는 그러고도 한참을 눈물을 글썽이다, 화내다를 반복했다.
좀 진정이 되었을 때, 재인은 조심스럽게 유라의 옆자리로 옮겨 앉아 어깨를 토닥였다.
“힘들겠지만 그냥 털어버려. 똥차 가고 벤츠 온다잖아. 곧 더 좋은 사람 만나게 될 거야.”
“……그렇겠지?”
분이 좀 풀렸는지 유라의 목소리가 한결 수그러들었다.
“당연하지. 못 먹어서 기운 없을 텐데 일단 주문부터 하자.”
“그래. 잘 먹고 힘내서 보란 듯이 성지훈보다 멋진 남자 만날 거야!”
그럼, 그럼! 성지훈 같은 남자를 앞으로 또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
재인은 하고픈 말을 꿀꺽 삼키며 빙긋 웃어 보였다.
“뭐 시킬래? 음……. 유라 너 루꼴라 피자 좋아하지?”
“아무거나. 입맛도 없어.”
조금 기운을 차린 것 같더니 유라가 다시 축 늘어졌다.
“그럼 내가 알아서 시킨다. 마실 건 뭘로 할래? 에이드? 커피?”
“차 팀장님.”
얼빠진 표정으로 유라가 중얼거렸다.
얘가, 음료수 고르랬더니 뜬금없이 왜 남의 팀장님을 찾아?
생각지도 못한 도혁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재인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곧이어 거짓말처럼 그녀의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서 주임? 최유라 씨도 있었네요?”
재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가 나는 쪽으로 홱 돌아봤다.
그곳에는 도혁이 화보 촬영하다 뛰쳐나온 것 같은 모습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도혁 못지않게 멋진 차림을 한 성준이 몹시 당황한 얼굴로 서 있었다.
.
.
.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재인은 맛있는 음식이 한가득 차려져 있는데도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었다.
“서 주임? 왜 안 먹고 보기만 합니까?”
옆자리에 앉은 도혁이 활짝 웃으며 재인의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었다.
재인은 어이가 없어서 그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팀장님, 김 실장님과 회의하러 가신다면서요?”
“가야지. 일단 식사부터 하고.”
“그러니까 그 식사를 왜 굳이 여기서, 그것도 저랑 같은 테이블에서 하시냐고요?”
“여기가 음식을 잘할 것 같아서. 그리고 여럿이 같이 먹으면 더 맛있으니까.”
너무나도 천연덕스러운 반응에 재인은 말할 의지를 잃었다.
갈수록 더 능청스럽게 구는 도혁에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재인이었다.
‘차도혁을 누가 말려. 처음부터 이러려고 차를 태워준 거구나.’
1시간 전.
도혁은 괜찮다고 마다하는 재인을 ‘성준과 회의하러 가는 길’이라며 굳이 약속 장소까지 데려다줬다.
그러더니 성준을 대동하고 나타나 ‘이왕 이렇게 만난 거’라며 자연스럽게 합석까지 한 것이었다.
애써 평온하게 웃고는 있지만 불편한 기색인 것으로 보아, 성준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임이 분명했다.
그의 옆에는 유라가 속상한 마음을 낮술로 달래며 성지훈에 대한 울분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미 와인을 서너 잔 마셨는데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아예 보틀로 주문해 마시고 있었고. 성준은 그런 유라를 상대하느라 여간 곤혹스러워 보이는 게 아니었다.
“김 실장님은 성지훈이랑 왜 닮아가지고, 기분 나빠요!”
“죄송합니다.”
“생각 안 하려고 하는데 더 생각나잖아요. 성지훈, 만나기만 해봐라. 부숴버릴 거야!”
“……죄송합니다.”
대체 김 실장님은 무슨 죄야.
재인은 성준에게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다.
“김 실장님 불편해하시는 것 좀 봐요. 팀장님 멋대로 이러시면 어떡해요?”
재인이 핀잔을 주자, 도혁이 그녀의 귀에 대고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서재인 씨가 날 피해 다니니까 그렇지. 금요일 밤부터 나랑 눈도 잘 안 마주치잖아.”
“제가 언제…….”
재인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도혁과 있으면 너무 긴장되고 떨리는데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자꾸만 도망쳤으니까.
“아니라고? 좋아, 그럼 내 눈 똑바로 10초만 쳐다봐.”
“돼, 됐어요.”
“봐, 지금도 못 보잖아. 대체 왜 그러는 거야?”
“…….”
두근두근.
재인은 도혁의 차를 타고 오는 내내 가슴이 간질거리고 답답해서 혼났는데, 지금 또다시 같은 증세가 시작되었다.
재인이 말문이 막혀 진땀만 흘리고 있는 그때, 구세주처럼 유라가 발그레한 얼굴로 도혁에게 말을 걸었다.
“차 팀장님, 같은 남자니까 한번 얘기해보세요. 우리 지훈 오빠가 왜 갑자기 말없이 사라진 것 같아요?”
“죄송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유라 씨와 만나고 싶지 않아서겠죠.”
도혁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즉각 팩폭을 날렸다.
재인과 성준의 눈이 동시에 주먹만 해졌다.
“그러니까 왜요?”
유라가 울상을 지으며 다시 묻자,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도혁의 2차 팩폭이 이어졌다.
“싫으니까요.”
“역시 그런 거구나…….”
유라의 눈에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처럼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 사람이! 그걸 누가 몰라서 말을 안 하는 줄 아나?’
겨우 마음 추스르고 있는 애를 대놓고 후벼 파다니.
재인은 다급히 도혁의 옆구리를 찌르며 작게 말했다.
“그걸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이런 건 정확하게 알려줘야 해. 그래야 빨리 털어버리지.”
“네, 아주 자알하셨습니다. 유라 울면 팀장님 책임이에요.”
“내가 뭐…….”
뚝. 뚝.
기다렸다는 듯이 유라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제야 도혁도 미안했는지 당황해하며 사과했다.
“아, 유라 씨 죄송합니다. 울리려던 건 아니고, 그냥 객관적 사실을 말한…… 흡!”
화들짝 놀란 재인이 도혁의 입을 틀어막으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강렬한 눈빛을 쏘면서.
팀장님, 부탁인데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그때, 갑자기 묵묵히 지켜만 보던 성준이 목소리를 높였다.
“최유라 씨가 싫어서 그런 거 아닙니다! 절대!”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성준에게 쏠렸다.
성준의 얼굴에 아차, 하는 기색이 스쳤다.
유라가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성준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걸 김 실장님이 어떻게 아세요? 성지훈도 아니면서…….”
“아. 그, 그건 그렇지만…… 왠지 성지훈 씨도 그랬을 것 같아서요.”
성준은 어색하게 웃다 목이 탔는지 물 한 컵을 단숨에 비웠다.
유라가 콧물을 훌쩍거리며 입술을 삐죽였다.
“저도 다 아니까 괜히 저 위로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게 더 비참하단 말이에요.”
“위로하려는 게 아닙니다. 분명히 성지훈 씨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겁니다.”
“맞아, 맞아.”
재인도 성준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재인에게 옆구리를 찔린 도혁까지.
그제야 유라가 피식 웃으며 눈물을 훔쳤다.
“즐거운 일요일에 괜히 민폐를 끼쳤네요. 죄송해요. 털어놨더니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아요.”
“아닙니다. 힘내십시오.”
성준이 복잡한 시선으로 유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유라야, 그런 이상한 사람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 나타날 거야.”
“맞아, 그럴 거야.”
유라는 갑자기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휴대전화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저예요, 엄마. 다음 주에 선보라고 하신 거 나갈게요.”
선?
성준이 움찔, 하며 유라를 쳐다봤다.
유라가 비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알았어요. 잘해볼게요.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라니, 봐서 맘에 들면 결혼해버리죠, 뭐.”
“……!”
유라가 홧김에 폭탄선언을 했다.
그리고.
성준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진 것을 그들 중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