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나, 팀장님 좋아하나 봐
(62/129)
62화. 나, 팀장님 좋아하나 봐
(62/129)
62화. 나, 팀장님 좋아하나 봐
2023.01.03.
재인은 아득해지려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고 도혁을 불렀다.
“……팀장님?”
순간,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던 그의 커다란 손이 움찔하더니, 도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인도 황급히 일어나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았다.
도혁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오, 오해하지 마!”
“네?”
“지금 이거 약속 어긴 거 아니니까, 집 나간다고 하지 말라고.”
아, 어제 약속한 것 때문에?
「앞으로는 이러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아니면 당장 집을 나가겠어요!」
「알았어. 그만할게.」
예상치 못한 도혁의 행동에 재인은 그만 풋, 하고 웃음이 터져버렸다.
도혁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웃지?”
“아니, 평소답지 않게 안절부절못하시는 것 같아서요.”
“내가?”
“네. 제가 나간다고 할까 봐 그렇게 겁나세요?”
“아…….”
도혁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덩달아 재인도 얼굴을 붉혔다.
“아, 암튼 팀장님이 약속을 지키려는 의지가 굳건하신 것 같아서 안심이 되네요.”
“다행이야.”
“뭐가요?”
“서재인 씨 웃는 걸 보니 좀 살아난 것 같아서.”
그러고 보니.
재인은 웃고 났더니 한결 몸이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원래 도혁과 있으면 웃기는커녕 무서워서 말도 제대로 안 나왔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재인은 더는 도혁이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같이 얘기하고 있으면 편안하고 즐거운 것도 같았다.
꾸미지 않고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냈을 때의 편안함이라고나 할까.
가끔 야수로 돌변할 때는 예외지만.
‘이 기분은 뭐지? 정말 이상한 건 나야.’
재인은 제 안에서 일렁이는 감정을 해석할 수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그때, 도혁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재인 씨, 지금까지 날 어떻게 생각해왔든 다 괜찮아.”
“네?”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중요한 건 앞으로니까.”
너무나도 진지한 그의 표정에 재인은 할 말을 잃었다.
“내 마음이 어떤지는 충분히 잘 알고 있을 테니, 이제 서재인 씨만 알면 돼.”
도혁은 몸을 기울여 재인의 이마에 손을 얹고는 나직이 속삭였다.
“자기 마음이 어떤지 말이야.”
“……!”
그 순간, 재인은 제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아직 미열이 남아 있군. 잠시만 기다려. 죽 가져다줄게.”
“아, 아니에요. 방에만 있기 답답하니 나가서 먹을게요.”
“그럼 그러든지.”
도혁이 씩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손잡이를 잡고 등을 보인 채 나직이 말했다.
“서재인 씨 말대로, 나 아까 겁난 거 맞아.”
“역시 그런 줄…….”
“하마터면 못 참을 뻔했거든.”
“……!”
휴우.
도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려는 찰나, 자책하듯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좁은 틈을 비집고 새어 들어왔다.
“굳건한 의지는 무슨…….”
고요한 방, 혼자 남은 재인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이미 가속 페달을 밟아 버린 심장박동 소리가 귓가에 크게 울렸다.
머릿속에는 도혁이 남긴 말들이 계속 맴돌았다.
그렇게 한참을 꼼짝하지 않고 큼지막한 눈만 깜박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당했다!’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지고 손이 바르르 떨렸다.
기껏 약까지 먹어가며 열을 떨어뜨린 보람도 없이 온몸이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팀장님, 아플 때 치고 들어오는 법이 어디 있어요? 이건 반칙이잖아요.’
그리고, 끝끝내 재인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 차도혁에 대한 진짜 마음을.
‘어떡해! 나 팀장님 좋아하나 봐!’
* * *
“서재인 씨, 괜찮아? 아까보다 안색이 더 안 좋은 것 같은데?”
도혁이 맥없이 죽을 먹고 있는 재인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꺾인 나뭇가지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없는 게 많이 이상해 보였다.
아무리 아프다지만, 음식 앞에서 시무룩하게 있을 서재인이 아니니까.
“죽이 그렇게 맛이 없어? 김 실장님이 낮에 한 그릇 뚝딱 먹었다고 그랬는데……. 그새 질렸으려나?”
“아, 아니에요. 별로 입맛이 없어서요. 그럼, 다 먹었으니 전 이만…….”
죽이 반도 넘게 남아 있었다.
도혁은 고개를 갸웃하며 제 방으로 걸어가는 재인을 불러 세웠다.
“흠. 서재인 씨, 내 얼굴 좀 봐봐.”
그 말에 흠칫 놀란 재인은 고개를 들기는커녕 냅다 도망치려 했다.
도혁이 재빠르게 그녀를 막아서며 말했다.
“서재인 씨, 그냥 가면 안 되지.”
“왜, 왜요……?”
“뭐 잊은 거 없어?”
“아…… 잘 먹었습니다.”
재인이 꾸벅 인사하고 옆으로 돌아가려 하자, 도혁이 다시 팔을 뻗어 다급히 막았다.
“그게 아니잖아. 약을 먹고 가야지!”
“네? 아…….”
재인은 여전히 바닥만 보며 식탁으로 다가가더니 도혁에게 등을 보인 채 약을 먹었다.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행동에 도혁은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방 안에서는 환하게 웃었던 재인이 몇십 분 사이에 생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조금 가까워졌다 싶었는데, 또 밀어내는 듯싶어 서운했다.
도혁은 도망치듯 주방을 빠져나가는 재인의 팔을 붙잡았다.
화들짝 놀란 재인은 도혁을 손을 떼어내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서재인 씨, 내가 뭐 실수한 거라도 있나?”
“……아니요.”
“그럼, 죽이 맛이 없었어? 내일 김 실장님께 만들어달라고 부탁해볼게.”
“……그게 아니라…….”
도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이르듯 물었다.
“자꾸 이상하게 굴어서 걱정되잖아. 뭔데 그래?”
“그냥 좀 피곤해서요.”
“안 되겠네.”
말과 동시에 도혁은 두 손으로 재인의 볼을 살포시 감싸서 들어 올렸다.
그의 손바닥에 따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이상하네? 열이 떨어진 것 같더니, 그새 더 올랐어. 힘들어서 그랬나 봐. 안 되겠다. 응급실에 가자.”
“괘, 괜찮아요. 약 기운이 떨어져서 그래요.”
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약을 먹었으니까, 잠들면 괜찮을 거예요.”
“그래도…….”
“이제 잘 거니까, 제 걱정은 마시고 편히 쉬세요.”
재인은 도혁에게서 벗어나 잽싸게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남겨진 도혁은 그녀의 사라진 곳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볼 뿐이었다.
* * *
토요일 한낮, 나희는 우진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교장으로 퇴직한 우진의 아버지 서영호는 조용한 인물로, 부인에게 꽉 잡혀 사는 게 눈에 보였다.
우진의 어머니 이정숙은 듣던 대로 보통이 아니었다.
교양이 넘치는 말투였지만,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뼈가 있었다.
“나희 씨같이 예쁜 아가씨를 만나서 그런가, 우리 우진이가 요새 엄마한테 소홀한 것 같아요. 호호.”
“우진 씨가 그럴 리가요.”
나희가 다소곳이 고개를 저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옆에 앉은 우진이 쑥스러운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아니, 엄마는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요?”
“확실히 달라졌거든?”
이정숙은 우진에게 살짝 눈을 흘기고는 나희에게 물었다.
“그런데 나희 씨 부모님께서는 우리 우진이를 흡족해하시나요?”
“아, 네. 무척 마음에 들어하세요.”
나희의 부모님은 이미 우진을 사위라고 주변에 얘기하고 다닐 정도였다.
“당연히 그러시겠죠. 그럼 듣자 하니 건물도 많으시다면서요. 그럼 병원 하나 내주는 것쯤은 일도 없겠네요?”
속내를 숨기지 않는 이정숙의 말의 나희는 흠칫 놀랐다.
그런 얘기가 나오리라 마음의 준비를 하긴 했지만 보자마자 치고 들어올 줄이야.
“아…… 네, 아마 그러실 거예요.”
“엄마,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나희 씨 부담스럽게 그런 말씀을 왜 하세요.”
우진은 말리는 듯하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우진이가 뼈대 있는 집안의 종손이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어요. 그래서 결혼해서 잘살기를 기대하는 눈도 많고요. 무슨 뜻인지 현명한 나희 씨는 잘 알겠죠?”
“그, 그럼요.”
혼수를 입이 딱 벌어지게 알아서 잘해오라는 압박이구나.
나희는 제 옆에 앉은 우진을 슬쩍 쳐다보았다.
‘의대에 차석으로 입학했을 정도로 머리도 좋고, 집안도 대대로 양반 가문이고, 적당한 훈남에, 성격은 좀 마마보이 같지만 잘 다루면 되겠고…….’
남들이 보기에 충분히 부러워할 만한 조건이었다.
하지만, 우진의 집에 있는 내내 나희는 도혁에 대한 미련을 떨칠 수가 없었다.
‘역시, 이대로 팀장님한테 아무것도 못 해보고 떠밀리듯 결혼하기는 아쉬워.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나희 씨, 내 말 듣고 있어요?”
이정숙이 부르는 소리에 나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죄송해요. 뭐라고 하셨죠?”
“무슨 딴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지…….”
이정숙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스쳤다.
“다음 달 1일에 우진이 친할머니 팔순 잔치가 있다고 했어요. 그때 나희 씨를 소개하고 싶은데, 시간 어때요?”
“네? 팔순 잔치를 1월 1일에요?”
“우리 집안은 새해 첫날에 다 같이 모이거든요. 어머님 생신이 보름 뒤이긴 하지만, 모인 김에 축하하기로 했어요.”
“아, 네…….”
새해 첫날부터, 아직 결혼할지 말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남자의 할머니 팔순 잔치에 가야 하다니.
그렇지만 어렵겠다고 대답했다가는 제대로 찍힐 것 같았다.
나희는 내키지 않아 선뜻 알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머, 내가 너무 부담을 줬나요? 우리 우진이가 나희 씨같이 좋은 신붓감을 만나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그만.”
이정숙의 안색이 어두워지는 것을 본 나희가 다급히 말했다.
“아, 괜찮아요. 저도 참석할게요.”
“그럼 그럴래요? 역시, 나희 씨 처음 봤을 때부터 우리 집안사람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호호.”
교양 넘치는 웃음소리에 나희는 솜털이 오소소 일어났다.
‘이거, 보험 들어두려다 코 꿰이는 거 아니야?’
나희는 꼼짝없이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 * *
같은 날 늦은 오후.
재인은 자신의 방 안에서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었다.
다행히 몸이 한결 나아져, 내일쯤이면 가뿐하게 일어날 수 있을 듯했다.
문제는 재인의 고장 난 마음이었다.
‘아, 어쩌면 좋아. 앞으로 팀장님을 어떻게 대하지?’
아까 도혁과 같이 점심을 먹을 때도 어찌나 긴장했는지, 밥에서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도혁을 좋아한다는 것을 자각한 뒤로, 재인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서 어디론가 숨고만 싶었다.
별 감정 없었을 때는 맘껏 쳐다보고 감탄하던 도혁의 얼굴을, 정작 좋아한다고 인정하고 나서는 힐끗 쳐다보는 것도 힘들어하다니.
그뿐만 아니라, 감미로운 중저음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온몸이 다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도혁의 곁을 스칠 때 맡았던 향기는 또 어떻고.
볼에 닿았던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까지.
도혁의 모든 것들이 그녀의 오감을 자극했다.
그 흔한 짝사랑 한 번 안 해본, 국보급 모태솔로 재인으로서는 모든 것이 처음 겪는 생소한 일인지라 그저 당혹스럽기만 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냐고 유라한테 물어볼까?’
다음 순간, 재인은 마구 고개를 저었다.
‘괜히 얘기했다가 더 심란해질 게 뻔해. 또 이상한 소리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사귀면 된다고 말하겠지.’
도혁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유라밖에 없다는 게 이렇게 안타까울 줄이야.
재인은 침대 위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쳐다보다 슬그머니 휴대전화에 손을 뻗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아쉬운 대로 유라에게 전화하려고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을 때였다.
Rrrrrrr. Rrrrrrr.
텔레파시라도 통한 것처럼 유라가 전화를 걸어왔다.
재인은 반가운 마음에 냉큼 통화 버튼을 눌렀다.
“유라야, 나도 방금 전화하려고 했는데!”
―재인아…… 나 어떡해?
수화기에서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라가 우는 건 3년 전 BOC 밴드 팬미팅 이후 처음인데?
재인은 덜컥 걱정돼 다급히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지훈 오빠가, 흑흑, 지훈 오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