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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끝까지 가보면 돼 (61/129)


61화. 끝까지 가보면 돼
2022.12.31.



 


“어, 유라야.”

재인이 전화를 받자 성준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휴대전화 너머에서 걱정이 가득 담긴 유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인아, 너 아파서 조퇴했다며? 괜찮아?

“응. 병원 다녀왔더니 많이 좋아졌어.”

―정말? 다행이다.

“근데 어떻게 알았어?”

―점심시간이라 규민이한테 연락해봤지. 네가 하도 연락이 안 되니 답답해서. 출장 가는 날 휴대전화 잃어버렸다며?

아……. 아침에 휴대전화를 켰더니, 유라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메시지가 주루룩 와 있었다.

그런데 출근하자마자 등 떠밀려 퇴근한 데다, 곧장 성준을 만나 병원에 들렀다가 돌아오느라 연락한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


“미안. 아침에 연락한다는 걸 깜박했어. 연락 많이 했던데 무슨 일 있어?”

―눈치챘어? 재인아, 이 언니가 중대 발표를 할 게 있다.

갑자기 유라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동시에 재인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너 설마?”

유라가 행복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지훈 오빠랑 사귀기로 했어. 벌써 5일째야.

맙소사!

불길한 예감이 딱 맞아떨어졌다.


“뭐, 5일째? 지훈 오빠아?”

재인은 너무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유라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재인아, 이 언니가 평강공주가 되기로 결심했다. 우리 지훈 오빠를 바보온달처럼 멋지게 잘 키울 거야.

“서른다섯 살이나 되는 다 큰 남자를 네가 왜 키워! 부모님 아시면 어쩌려고 그래?”

―그동안 엄마 아빠 기준 맞추느라 노력했으니 됐지. 다음 주에 선보라고 하는 것도 싫다고 했어.

“나중에 알면 난리 나실 텐데…….

―그걸 감수하고도 남을 정도로 외모가 완벽하게 내 취향이야. 지금까지 만난 남자들, 우리 지훈 오빠 외모랑 비교하면 다들 수산시장 직행이란 말이야.

“얼굴이 전부는 아니잖아. 내면을 봐야지.”

재인은 말하고 나서도 속이 뜨끔했다.

잘도 떠든다. 차도혁 씨 외모만 좋다고 말했으면서.


―얼굴뿐만이 아니야. 말투와 행동은 거친데 은근히 정중함과 배려심이 녹아 있는 게 완전 매력 있다니까.

“대놓고 정중하고 배려 넘치는 사람도 많은데 굳이?”

―지훈 오빠랑은 영혼이 통하는 느낌이라니까? 대화를 나눌수록 우리 지훈 오빠랑은 평생 지루할 틈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요리는 또 얼마나 잘하는지.

“아, 네 이상형이 요리 잘하는 남자지. 근데 백수잖아?”

―그건 우리 지훈 오빠가 아직 때를 못 만났을 뿐이야.

“말끝마다 ‘우리 지훈 오빠’네. 아주 제대로 빠졌구나?”

―응. 내일도 만나러 갈 거야.

연애할 때마다 언제나 갑의 위치에서 여유가 흘러넘쳤던 유라였다.

재인은 그런 유라를 안달하게 만든 성지훈이 누구인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 지훈 오빠라는 사람, 내가 직접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아. 그러니까 다음에 한번 보여줘.”

―베프인 너한테 당연히 젤 먼저 보여줘야지. 깜짝 놀랄걸?

“그래. 누군지 눈물 나게 궁금하다.”

―참, 규민이 목소리가 별로던데 무슨 일 있었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재인은 불현듯, 오늘 아침 회의실에서 규민이가 와락 끌어안았던 일이 생각났다.

처음 고백받았을 때 미안해도 바로 거절할걸.

괜히 일을 키운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일은 무슨…….”

―그래? 난 또, 규민이가 고백이라도 한 건가 했네.

“그, 그걸 어떻게 알았어?”

재인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역시. 지난번에 규민이가 너 만난다면서 이것저것 물어보는데, 왠지 그럴 것 같더라고. 너한테도 그때 물어본다는 걸 지훈 오빠 걱정하느라 깜박하고 있었네.

“고백을 듣긴 했는데…… 거절하려고.”

―왜? 차 팀장님 때문에?

“아, 아니야!”

―당황하는 거 보니 맞네. 너 설마, 출장도 차 팀장님이랑 둘이 갔니?

날카로운 유라의 질문에 재인은 제대로 허를 찔렸다.

최유라, 넌 내 친구지만 진짜 돗자리 깔아야겠어.


“……맞아.”

―대박! 설마 그 큰 호텔에 방은 딱 하나뿐, 뭐 그런 거 아니지?

“어, 어떻게 알았어?”

재인은 간이 철렁했다.


―와, 설마설마했다. 영화든 소설이든 자고로 남녀가 어디 가면 방이 꼭 하나더라.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어쩜 레퍼토리가 그리 한결같냐?

“내 말이. 나도 그런 거 볼 때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일이 실제로 생기더라고.”

―그건 그렇고, 한 방에서 차 팀장님이 고백하면서 키스라도 한 거야?

“……!”

재인은 너무 놀란 나머지 숨이 턱 막혔다.

아무 대답이 없자, 유라가 다 알겠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너 아주 클리셰 범벅인 하룻밤을 보내고 왔구나?

“생각해보니 그렇네.”

―암튼 서재인, 첫 키스 졸업한 거 축하한다! 참 오래도 걸렸다.

호들갑스러운 유라의 반응에 재인은 얼굴이 불타오를 것처럼 뜨거워졌다.


“추, 축하는 무슨…….”

―그럼, 이제 차 팀장님이랑 사귀는 거야?

“팀장님은 그러자고 했는데, 내가 안 된다고 했어.”

―왜? 차 팀장님같이 멋진 남자가 고백했으니 다른 사람은 눈에 안 들어오는 거 아니었어?

“그게…… 키스는 되게 좋았거든? 다른 여자랑 있는 거 보면 싫기도 하고. 근데 팀장님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그건 또 잘 모르겠어. 그냥 외모에만 끌리는 건가 싶기도 하고.”

어차피 들킨 거, 재인은 복잡한 속내를 주저리주저리 읊었다.


“막상 사귀었는데 외모만 좋았던 거면 무를 수도 없고 어떡해? 같이 있으면 아직도 바짝 긴장되고 어려운 상사인데 사귄다는 게 말이 돼?”

―흐음…….

“사는 세상도 너무 달라서 잘될 것 같지도 않고. 어차피 일본 가면 끝일 텐데, 그럴 거 시작을 왜 하나 싶어. 근데 또 팀장님 얼굴 보면 흔들리고. 암튼 너무 혼란스러워. 나 어떡하지?”

대답을 기다리는데 아무 말도 없었다.


“유라야? 듣고 있어? 여보세요?”

그제야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유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인아, 그럴 때 좋은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역시 연애 고수 최유라!

재인은 기대로 가득 차 귀를 쫑긋 세웠다.


“그게 뭔데?”

―차 팀장님이랑 아예 끝까지 가보면 돼.

“뭐?”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가 혼란스러운 건 하다 말아서 그런 거야. 할 걸 다 해보면 더는 외모에 아쉬울 게 없잖아. 그럼 네 감정도 명료해질 거야. 더 이어갈지 말지는 그때 가서 생각해.

재인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최유라, 너 죽을래!”

―왜? 나름 피땀 흘려 쌓아온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인데?

앗, 몹쓸 상상을 해버렸다!


“야, 끊어!”

―워워, 진정하고. 차 팀장님, 괜찮은 사람 같으니까 잘해봐.

유라가 까르르 웃었다.

재인은 황급히 전화를 끊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휴,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혹 떼러 갔다가 도리어 열 개는 붙이고 온 기분이었다.

재인은 터질 듯 새빨개진 얼굴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어떡하지?”

 

* * *

한편, 성준은 거실 소파에 앉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연신 꾹꾹 누르고 있었다.

휴대전화에서 유라의 이름을 본 순간, 유라와의 관계를 재인에게 들킨 것만 같아 심장이 철렁했다.

친한 친구니까 분명 유라가 재인에게 성준과 사귀기로 했다고 얘기했을 것이다.

성준은 멋대로 사귄다고 선언한 유라에게 말려 엉겁결에 매일 밤 전화 통화까지 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거지?’

드르륵.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에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성준은 업무 외에 사적으로 사용하는 휴대전화를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지훈 오빠, 드디어 주말이 왔어요! 내일 장 봐서 갈 테니까 맛있는 거 해주세요.]

성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이거 골치 아프게 됐군.’

 

.
.
.

지난 월요일 밤.

유라가 성지훈, 사실은 성준의 옥탑방에 들어간 지 1시간이 흐른 뒤.

성준과 유라는 마주 앉아 고기를 구우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성준이 만든 된장찌개와 밑반찬을 맛본 유라가 감탄사를 연발했다.


“어머! 너무 맛있어요. 이렇게 잘생기셨는데 요리까지 잘하고. 음식점 차리면 손님이 줄을 서겠는데요?”

“뭐, 그 정도 가지고…….”

“전 라면이나 달걀프라이밖에 못해서 이상형이 요리 잘하는 남자였거든요. 우리 딱, 잘 만났네요.”

이전보다 더 홀린 듯한 눈으로 쳐다보는 유라 때문에 성준은 후회가 밀려왔다.


‘맛없게 만들걸. 아주 정이 뚝 떨어지게.’

하지만, 그건 타고난 미식가인 성준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일이었다.

유라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성준에게 물었다.


“저 지훈 오빠처럼 말 잘 통하는 사람은 처음이에요. 예술, 문학, 사회, 철학……. 어쩜 그렇게 모르는 게 없어요?”

“그냥 이것저것 들춰본 거지, 뭐. 일을 안 하니까 시간만 남아돌아서.”

“지훈 오빠는 다재다능해서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촉이 좋거든요. 그러니까 믿어도 돼요.”

유라가 응원하듯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새 백수 역할에 심취한 건지, 성준은 그 말에 왠지 가슴이 뭉클해졌다.

성준이 복잡한 심경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유라가 짝! 하고 손뼉을 쳤다.


“아, 깜박할 뻔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택배 상자들을 가져오더니 하나씩 뜯기 시작했다.

당황한 성준이 유라를 말렸다.


“친구 건데 막 뜯어도 돼요?”

“아, 이거 실은 제가 보낸 거예요. 여기 올 구실도 필요하고, 혹시 몰라서 커플템 좀 샀거든요.”

“뭐요?”

최유라에게 제대로 말려버렸다.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은 성준과 달리 유라는 아주 신이 난 표정이었다.

택배 상자에는 커플 머플러와 커플 니트 티셔츠 그리고 하늘색과 분홍색 실로 만든 커플 팔찌가 들어 있었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커플템 산 건 지훈 오빠가 처음이니까요.”

유라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배시시 웃었다.

발그레한 두 볼 위에 반짝반짝 빛나는 두 눈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성준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두근.

연애를 쉰 지 3년째, 실로 오랜만에 성준의 심장이 반응을 보였다.

유라에게는 지금까지 만났던 여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매력이 있었다.

마치 예측 불가능한 반전이 기다리는 추리소설을 읽는 기분이랄까?

성준이 자신의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에 당혹스러워하던 그때, 유라가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성준은 몸을 움찔하며 얼굴을 붉혔다.


“왜, 왜요?”

“지훈 오빠, 잠시만요.”

유라는 잽싸게 성준의 팔목에 팔찌를 감았다.


“이거, 우리 잘 만나게 해달라고 빈 소원 팔찌니까 저절로 끊어질 때까지 절대 풀면 안 돼요. 알았죠?”

유라가 성준과 커플 팔찌를 찬 팔목을 들어 보이며 생긋 웃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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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제멋대로라니까…….’

성준은 팔목에 찬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피식 웃었다.

하지만 이내 깊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만, 그만! 정신 차리자.’

성준은 한 번 더 아쉬움이 가득 담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멈춰야 해. 더 늦기 전에…….’

 

* * *

얼마나 지났을까.

재인은 이마에 포근한 무언가가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뜨자 도혁의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퇴근하자마자 그녀를 찾았는지 코트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아, 팀장님 오셨어요?”

“이런, 내가 깨운 건가?”

“……이제 일어나야죠.”

“멋대로 들어와서 미안해. 불러도 대답이 없길래 걱정이 돼서…….”

재인은 자신의 방에 도혁과 단둘이 있다는 걸 의식하자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괘, 괜찮아요.”

도혁이 여전히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아침보다 열이 떨어진 것 같긴 한데……. 약은 먹었고?”

“……네.”

재인은 떨어질 생각이 없는 도혁의 커다란 손이 부담스러우면서도, 걱정하는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져 가슴이 술렁거렸다.


“김 실장님은요?”

“조금 전에 가셨어.”

“김 실장님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재인이 부스스 몸을 일으키려 하자, 도혁은 그제야 이마에서 손을 거뒀다.

그리고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다시 눕혔다.

그 바람에 두 얼굴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재인의 얼굴에 익숙한 체향이 훅 끼쳤다.

재인의 가슴이 또 소란해졌다.


“하나도 안 괜찮아 보여. 그냥 누워 있어.”

“괜찮은데…….”

재인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어 보이려다, 그대로 굳어버렸다.

도혁이 넋이 나간 듯 그녀의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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