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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하게 해줘 (60/129)


60화. 하게 해줘
2022.12.27.



 
흡!

정곡을 찌르는 말에 재인은 말문이 딱 막혀버렸다.


‘그러게요. 누가 들으면 일부러 그런 줄 알겠네.’

변명하자면 그동안 몹쓸 망상에 시달리느라 깜빡 잊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일부러 모른 척하고 싶었던 건지도.

괜히 말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은 재인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는 법.

재인은 입술을 맞다물고 다시 전의를 다졌다.


“일이 많았잖아요. 바쁘게 살다 보면 깜박할 수도 있죠.”

“아, 깜박한 거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아우우우우!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재인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 암튼! 앞으로는 이러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아니면 당장 집을 나가겠어요!”

“농담도 참. 집도 없는데 어딜 가려고?”

“농담 아니에요! 노숙을 하고 말지, 이렇게는 불안해서 못 살겠다고요.”

재인이 단호하게 가출 선언을 하자 도혁의 눈썹이 움찔했다.

진심 100퍼센트인 그녀의 표정에 도혁은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일단은.


“알았어. 그만할게.”

“꼭이요!”

“물론.”

“그럼 저는 팀장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재인은 회사에서나 쓸 법한 멘트를 날리고 제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거실에 홀로 남겨진 도혁은 굳게 닫힌 그녀의 방문을 한참 바라보았다.

맞닿았던 감촉이 너무도 생생해서 다시 닿고 싶어 미치겠는데, 절대 안 된다니.

도혁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이 터졌다.


“나, 참. 고문이 따로 없군.”

 

* * *

다음 날 아침.

재인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조금 일찍 출근했다.

금요일인 데다 장거리 출장의 여파까지 더해져서 그런지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책상에는 재인의 휴대전화가 반듯하게 놓여있었다.

어제 도혁으로부터 성준이 자신의 휴대전화를 찾아 책상에 두었다는 얘길 들었었다.


‘김 실장님한테 또 폐를 끼쳤네. 꼭 식사 대접해야지.’

전원 버튼을 꾹 누르니 쉴 새 없이 띠링 띠링 울려댔다.

이틀 새에 부재중 전화만 20통에 메시지가 40통이 넘게 와 있었다.

연지와 도혁이 대부분이었고 규민과 나희, 유라도 있었다.

업무 관련 내용이 있는지 하나하나 꼼꼼히 체크하고 있는데, 누군가 재인에게 달려왔다.


“서 주임님!”

“아아, 연지 씨 일찍 왔네?”

“출장 같이 못 가서 죄송해요. 하필이면 사고가 나서.”

연지가 울상이 되어 사과했다.


“괜찮아. 엊그제 통화할 때 다 끝난 얘기잖아. 그날 연락 안 돼서 답답했지? 나도 미안해.”

“아니에요. 못 나간 제가 죄송하죠.”

“어디 아픈 데는 없고?”

“네. 멀쩡해요.”

연지가 생긋 웃으며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였다.


“다행이다.”

“출장은 잘 다녀오셨어요?”

“응, 두 군데 다 잘 보고 왔어.”

“다행이에요! 팀장님이랑은 분위기 좋으셨고요?”

연지가 눈을 반짝이며 묻자 재인은 간이 콩알만 해졌다.

촉이 좋은 연지에게 도혁과의 일을 죄다 들킨 것만 같아서.


“응? 뭐, 뭐가?”

“팀장님이 회사에서처럼 괴팍하게 굴지는 않으셨나 걱정돼서요. 제가 괜히 팀장님께 얘기해서 곤란하셨죠? 죄송해요.”

“아니야. 도와주려고 그런 건데, 뭐. 그리고 팀장님이 가셔서 일이 더 순조롭게 진행된 것 같아.”

그건 사실이었다.

도혁을 눈독 들인 해풍수산에서 아주 협조적이었으니까.


“서 주임, 팀장님이랑 단둘이 출장 갔었다면서요?”

별안간 재인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사무실에 들어선 나희가 잽싸게 재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거기서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죠?”

강나희, 그동안 안달이 났었구나.

얼마나 신경이 쓰였으면 오자마자 물을까.

재인이 대답이 없자 나희가 다시 재촉했다.


“아무 일도 없었냐니까요?”

“일은 무슨 일요.”

말할 기운도 없으니 건드리지 말아줄래?

미열이 있는지 재인은 몸이 으슬으슬하고 머리까지 몽롱했다.


“갑자기 팀장님이랑 단둘이 출장을 왜 가요! 서 주임, 혹시 처음부터 그럴 계획이었던 거 아니에요?”

“이상한 소리 좀 그만해요.”

“서 주임님이 그러신 거 아니에요. 제가 갑자기 사고가 나서 팀장님께 부탁드린 거예요.”

연지가 재인을 돕겠다고 끼어들자 나희가 도끼눈을 떴다.


“연지 씨도 참 오지랖이다. 그깟 출장 혼자 가면 되지, 팀장님한테까지 연락을 왜 해?”

강나희, 신경 쓰이는 건 알겠는데 그만하자.

재인은 가뜩이나 힘들어 쓰러질 것 같은데, 나희까지 피곤하게 구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서 주임, 정말 팀장님이랑 아무 일도 없었어요?”

나희가 다시 심문하듯 캐묻자, 재인의 인내심이 뚝 끊겼다.
재인은 심각한 얼굴로 대답했다.


“강 대리님, 생각해봐요. 출장까지 갔는데 설마 아무 일도 없었겠어요?”

“뭐요?”

재인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나희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당연히 가공공장 둘러보랴, 계약사항 논의하랴, 제품 품질 검수하랴, 그 밖에도 일이 아주 많았죠. 누구 생각처럼 놀러 간 게 아니거든요.”

“뭐, 뭐라고요?”

풋.

연지가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느라 입을 막았다.

나희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러게 그만하라니까.


“전 출장보고서 써야 해서요. 이만.”

재인은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희를 상대하느라 기운이 쪽 빠졌는지 화면이 뱅글뱅글 도는 것 같았다.

머리가 너무 어질어질해서 눈을 꼭 감았다.

재인이 반차를 쓸까 고민 중이던 그때, 때마침 출근한 규민이 재인을 보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의 안색이 무척 어두웠다.


“서 주임, 잠깐 회의실에서 얘기 좀 할까요?”

“네? 알겠습니다.”

재인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회의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규민이 와락 재인을 끌어안았다.


“연락도 안 되고 걱정했잖아!”

“규민아, 왜 이래? 노, 놓고 얘기하자.”

재인이 규민의 팔을 두드리며 말했다.

쿵쾅쿵쾅.

놀란 가슴이 주체할 수 없이 뛰었다.

재인을 풀어준 규민은 지그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별일 없었어?”

“으응.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것 빼고는 순탄한 출장이었어.”

“그 말이 아니잖아.”

잠시 말을 멈춘 규민이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팀장님이랑…… 아무 일도 없었지?”

“다, 당연하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꿰뚫어 보는 듯한 규민의 눈빛에 재인은 양심이 무척 찔렸다.

규민이 말한 다른 일이 무얼 뜻하는지 알기에.


“두 사람 같이 출장 갔다는 얘기 듣고 이틀 내내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했는지 몰라. 그냥 내가 갈 걸, 하고.”

규민의 표정이 너무 괴로워 보여서 재인은 더 미안해졌다.


‘더 늦기 전에 솔직하게 얘기해야 해.’

재인은 마음을 굳히고 조심스레 입을 뗐다.


“저기, 규민아…….”

똑똑.

갑자기 들려온 노크 소리에 재인과 규민은 멀찌감치 떨어졌다.


“잠시 들어갈게요.”

문틈으로 연지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서 주임님, 팀장님이 물어볼 게 있다고 찾으시는데요?”

“팀장님이? 아, 알았어.”

“연지 씨, 서 주임은 지금 나랑 얘기 중인데요?”

규민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하자 연지가 해맑게 웃어 보였다.


“죄송해요. 팀장님이 하도 급하시다고 하셔서요.”

“그래도 내가 먼저…….”

“한 과장님, 출장 다녀온 건 나중에 다시 말씀드릴게요.”

재인은 눈치 빠른 연지가 이상한 분위기를 알아챌까 봐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남겨진 규민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똑. 똑.

곧장 팀장실로 향한 재인이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재인이 팀장실 안으로 들어가자,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도혁의 얼굴이 꽃처럼 활짝 피었다.


 


“서재인 씨, 무슨 일이야?”

“네? 저한테 물어볼 게 있으시다면서요?”

“내가?”

“네. 연지 씨한테 그렇게 들었는데…… 아니에요?”

도혁이 멈칫하더니,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내가 불렀지.”

“뭘 물어보시려고요?”

도혁은 대답 대신 재인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왜, 왜 그러세요?”

“컨디션은 괜찮아? 안색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

“괜찮아요. 아직은요.”

설마 그걸 물어보려고 부른 거야?

재인은 괜스레 낮이 뜨거워져 고개를 숙였다.


“안 되겠어. 일단 이리 와봐.”

도혁이 재인의 손목을 끌어 소파에 앉히고는 바짝 다가가 앉았다.

갑작스럽게 그의 얼굴이 가까워지자, 재인은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놀란 토끼 눈으로 쳐다보는 재인에게 도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안 잡아먹을 테니까.”

“…….”

농담 섞인 도혁의 말에 재인은 심장이 간질거렸다.

코에서는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도혁이 커다란 손을 그녀의 이마에 얹었다.

재인은 깜짝 놀라 일어서려고 했지만,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이거 봐. 완전 불덩이가 따로 없군. 집에서 쉬라니까 뭐 하러 나왔어?”

오늘 아침, 재인과 마주친 도혁은 그녀의 안색을 살피고는 이렇게 말했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오늘은 집에서 쉬어. 병가 처리할 테니까.」

그런데 재인이 기어이 새빨개진 얼굴로 사무실에 나타난 것이었다.

재인은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도혁의 손을 치웠다.


“보고서 올리고 들어가려고요.”

“됐어. 다음 주 월요일에 제출해.”

“안 돼요. 일이 늦어지잖아요.”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몸을 먼저 챙겨야지. 지금 나가자, 병원부터 가야겠어!”

도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벌떡 일어났다.

재인은 황급히 그의 옷깃을 붙잡고 말렸다.


“팀장님이 그러시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해요. 조퇴하고 저 혼자 갈게요.”

“그래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답답하기만 해, 도혁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럼 지하주차장에서 기다려. 김 실장님한테 도와달라고 할 테니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서재인 씨.”

도혁이 걱정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거라도 하게 해줘.”

“……네.”

재인의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 * *



“좀 어떠십니까?”

침대에 누운 재인에게 성준이 걱정스레 물었다.

일찍 퇴근한 재인은 그의 도움으로 병원에서 주사를 맞고 약을 처방받아 집에 돌아왔다.

재인이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지난번 친구 온 거 들킬 뻔했을 때 도와주신 것도 감사한데, 휴대전화도 찾아주시고, 병간호까지. 계속 폐만 끼치는 것 같아 죄송해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 것까지 합치면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소리를 백번도 넘게 들은 것 같습니다. 할 일을 할 것뿐이니 부담 갖지 마시고 푹 쉬세요.”

성준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러고는 죽 그릇이 올려진 미니테이블을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직접 끓이려니 시간이 부족해서 사 왔습니다. 전복죽인데 드셔보세요.”

“어머, 배고팠는데 감사합니다.”

성준은 맛있게 죽을 먹는 재인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혼자면 아플 때 서러운데, 김 실장님 덕분에 살았어요.”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도련님이 어찌나 걱정하시던지, 퇴근할 때까지 꼼짝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재인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팀장님은 괜한 말씀을……. 바쁘실 텐데 이만 가보셔야죠.”

“오늘 병간호한 건 특별수당까지 쳐서 톡톡히 받아낼 거니까 괜찮습니다. 이래 봬도 고급인력이라.”

성준의 입꼬리가 활처럼 부드럽게 휘었다.

돌연 경쾌한 벨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재인은 휴대전화를 집으려고 침대 옆 협탁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미니테이블 때문에 움직이는 데 한계가 있어 헛손질만 할 뿐이었다.


“제가 가져다 드리죠.”

“아, 감사합니다.”

성준은 협탁으로 다가가 재인의 휴대전화를 집어 들다가, 움찔하며 떨어뜨렸다.


“김 실장님, 괜찮으세요?”

“아, 죄송합니다.”

성준은 황급히 휴대전화를 주워 재인에게 건넸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낯익은 이름이 떠있었다.

[최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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