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9화. 왜 안 돼? 키스까지 한 사인데? (59/129)


59화. 왜 안 돼? 키스까지 한 사인데?
2022.12.24.



 
어제저녁.

도혁은 성준에게 차정환 대표의 근황을 전해 들은 뒤, 한 가지 부탁을 했었다.


「지금 녹동항에 있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방이 딱 하나만 남게 해주세요.」

역시 성준의 업무 처리 능력은 굉장했다.

도혁의 심정을 꿰뚫고 알아서 완벽하게 준비해주었다.

재인과 뜨거웠던 순간을 상기하며, 도혁은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덕분에요. 감사합니다.]

[다행입니다. 그럼 서울에서 뵙겠습니다.]

내막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재인은 풀리지 않는 의문을 품고 열심히 조식을 먹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팀장님, 어떠세요? 맛있지 않아요?”

“음. 맛있군.”

“안타깝네요. 엄청 맛있으니까 꼭 먹어야 한다고 리뷰라도 달아줘야겠어요.”

“그러든지.”

도혁은 사랑스럽게 입술을 오물거리는 재인을 애정이 듬뿍 담긴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 * *

오후 12시경, 재인과 도혁은 혜주의 안내로 무사히 공장 시찰을 마치고 해풍수산으로 돌아왔다.

도혁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뜬 걸로 보아 꽤나 만족스러운 듯했다.

재인 일행은 임 사장의 단골 식당에서 자연산 장어탕으로 점심을 먹고 완도로 떠날 채비를 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럼 검토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감사 인사를 건네고 차에 오르려는 도혁을 임 사장이 붙잡았다.


“차 팀장님, 어제저녁에 한 말 농담 아닙니다. 한번 잘 생각해보세요.”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도혁에게 거듭 당부하는 임 사장이었다.

도혁은 미소를 지으며 정중하게 대답했다.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말씀하신 건 어렵겠습니다.”

“왜요?”

임 사장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제보다 공을 들여 꾸미고 나와 미모가 한층 더 돋보이는 혜주의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도망간 사람이 돌아왔거든요.”

도혁은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차에 올랐다.

어정쩡하게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재인도 멋쩍게 웃으며 차에 탔다.

씁쓸한 표정의 두 사람을 뒤로하고 재인과 도혁은 완도를 향해 출발했다.

잠시 후, 도혁이 슬쩍 재인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마음에 들어? 서재인 씨 말대로 딱 잘랐는데.”

“다, 당연한 걸 가지고 무슨.”

“그게 다야?”

“뭐가요?”

재인은 일부러 뾰로통하게 대답했다.

도혁이 피식 웃으며 앓는 소리를 했다.


“서재인 씨, 너무하네. 칭찬 한마디 정도 해줄 줄 알았는데.”

“하!”

어린아이처럼 어리광부리는 차도혁이라니.

낯간지럽게 왜 이러실까.

재인은 화악 붉어진 얼굴로 괜히 마음에도 없는 말을 던졌다.


“그나저나 아쉽겠어요. 오늘 임 대리님 예쁘던데.”

“응?”

“역시 미인대회 출신이라 그런지 같은 여자가 봐도 엄청 예쁘더라고요.”

“뭐?”

“팀장님이 거절하실 때 정말 아쉬워하는 표정이었어요.”

“서재인 씨.”

흠.

잠시 뜸을 들인 도혁은 무심한 얼굴로 폭탄을 투하했다.


“한 번만 더 임혜주 대리 얘기하면, 입으로 막아버릴 거야.”

“네?”

대낮에, 그것도 달리는 차 안에서, 잘도 그런 낯 뜨거운 말을!

재인은 흠칫 놀라 도혁을 쳐다보았다.

맙소사!

도혁의 얼굴에 ‘100퍼센트 진심!’이라고 쓰여 있었다.

재인은 벌렁거리는 가슴을 붙잡고 다급히 받아쳤다.


“팀장님, 그걸 지금 협박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서재인 씨가 자꾸 쓸데없는 얘길 하니까 그렇지.”

“그거야…….”

팀장님이 자꾸 이상하게 구시니까.

고백한 뒤로 거침없이 다가오는 도혁에게 적응하는 게 아직은 버거운 재인이었다.

재인이 입술을 꾹 다문 채 말이 없자, 도혁이 씩 웃으며 물었다.


“서재인 씨, 혹시 지금 질투하나?”

“아, 아니거든요!”

그러자 도혁이 재인에게 스윽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어젯밤에 나랑 키스했으면서, 너무한 거 아니야? 질투 좀 해주지.”

“팀장님!”

어쩜 이렇게 능글맞을 수가!

재인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를 가뿐히 넘기는 도혁이었다.

한참을 쿡쿡 웃던 도혁이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좋은 방법이 있어.”

“무슨 방법이요?”

“서재인 씨와 내가 진짜 사귀면 돼. 그럼 이런 일로 고민할 필요 없잖아?”

그의 입에서 ‘사귄다’는 말이 나오자 재인의 눈이 냄비 뚜껑만 해졌다.

팀장님과 사귄다고?

내가?

듣고도 믿기지 않고, 생각하자니 고장 나서 깜빡거리는 모니터 화면처럼 눈앞이 깜깜했다.


“그, 그건 안 돼요!”

“왜 안 돼? 키스까지 한 사인데?”

“팀장님, 부탁인데 제발 그 얘기 좀 그만하세요!”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단 말이에요.

재인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히려 열심히 손부채질을 했다.

하지만 도혁은 포기를 몰랐다.


“그만하면 사귈 건가?”

“아니요!”

도혁이 시무룩한 얼굴로 되물었다.


“왜?”

“몰라서 물으세요?”

기가 막혀서.

자기 입으로 기다리겠다고 한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가뜩이나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어서 혼란스러운데, 훅 밀고 들어오는 도혁 때문에 재인은 머리가 과부하로 터질 것만 같았다.

적어도 이런 상황에서 엉겁결에 휩쓸려 사귀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고.

방법은 딱 한 가지뿐.


“팀장님, 저는 너어어무 졸려서 잠 좀 잘게요.”

“뭐? 하던 얘긴 마저 끝내야지.”

“그럼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잠깐, 서재인 씨……?”

재인은 재빨리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몸을 바짝 붙였다.

잠시 후, 눈을 꼭 감은 그녀의 귀에 도혁의 허탈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까지.

재인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차도혁 씨, 은근 귀여운 구석이 있네.’

 

* * *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띠리릭.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도혁이 재인을 와락 끌어안았다.


“티, 팀장님!”

“계속 이러고 싶은 거 참느라 혼났어.”

두근.

도혁의 품이 너무 포근해서 재인은 못이기는 척 그대로 안겨 있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법.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놔주세요…….”

“싫어.”

도혁의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닿자 재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주차장에 들어섰을 때부터 이미 도혁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묻는 말에 대답도 제대로 안 하더니, 참느라 그랬던 거였어?’

재인은 코트 너머로도 느껴지는 도혁의 넓고 탄탄한 가슴에 폭 안겨, 일렁이는 자신의 감정을 진정시켜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때였다.

갑자기 짙은 오렌지 빛 조명이 꺼지더니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 도혁의 거친 숨소리만이 허공을 떠다녔다.

재인은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숨 막혀요.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녀의 한마디에 도혁은 순순히 팔에서 힘을 풀었다.

재인은 그 틈을 타 도혁의 가슴을 밀치고 겨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 순간, 다시 조명이 번쩍 들어왔다.

도혁은 달아나려는 재인의 팔목을 붙잡아 다시 끌어당겼다.

한쪽 팔로 가녀린 허리를 단단히 휘감으며 도혁이 말했다.


“잠깐만. 정말로 잠깐, 잠깐이면 돼.”

반쯤 감긴 고혹적인 눈이 갈구하듯 재인을 응시했다.

살짝 벌어진 도혁의 입술이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왔다.

재인은 저도 모르게 홀린 듯 눈이 스르르 감겼다.

도혁의 입술이 목적지에 내려앉으려는 찰나.


“팀장님, 잠시만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재인이 황급히 두 손을 뻗어 도혁의 입술을 막았다.

졸지에 목적지를 잃은 그의 입술은 허무하게 그녀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하아!

진짜 입술을 맞댄 것도 아닌데, 재인은 가슴이 떨려 진정이 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했는지 도혁이 미간을 좁히며 뒤로 물러섰다.

흔들리는 그의 짙은 눈동자가 ‘왜?’라고 묻고 있었다.

재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 기다리신다고 했잖아요.”

“응? 아, 그러긴 했지.”

“근데…… 이게 무슨 기다리는 거예요.”

“아, 내 말뜻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이러시면 어떡해요. 저희 아직…… 사귀는 것도 아니잖아요.”

도혁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 씩 웃었다.


“그럼 지금부터 사귀는 걸로.”

말을 마친 도혁이 재인의 손을 맞잡으며 그녀의 입술을 향해 다시 고개를 숙였다.

화들짝 놀란 재인은 그의 가슴을 짚으며 막아섰다.


“팀장님, 제 말 듣고 계신 거예요?”

“솔직히 하나도 안 들려.”

갈라진 목소리에서 지독한 갈증이 느껴졌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팀장님, 그만요!”

재인은 젖 먹던 힘까지 그러모아 있는 힘껏 그의 가슴을 밀쳤다.

쾅!

갑작스럽게 떠밀려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은 도혁은 등이 벽에 부딪혔다.

그사이 재인은 재빨리 현관에서 벗어나 거실로 내달렸다.


“……서재인 씨?”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돌아선 재인이 황망하게 서 있는 도혁을 향해 소리쳤다.


“팀장님, 설마 키스 한 번 했다고 앞으로도 당연히 해도 된다는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신 거예요?”

도혁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내가 이상한 건가?


“말도 안 돼!”

기가 막힌 재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어젯밤 일은 사고였어요.”

“사고?”

“네!”

“그럼 서재인 씨는 어젯밤 일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건가? 내가 좋아한다고 말한 것도?”

도혁의 얼굴에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다.

재인은 상처받은 듯한 그의 모습에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건 아니지만…….”

“그럼 뭐야?”

“……모르겠어요.”

예전에 이런 상황을 맞닥뜨렸다면, 결정이 훨씬 수월했을 텐데.

지금 재인의 마음은 그야말로 ‘??’ 상태였다.

그사이 도혁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서재인 씨, 그 모르는 걸 알게 되는 날이 오긴 오나?”

“……네?”

“모르겠다고 하는 건 좋아. 하지만, 사고였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도혁은 재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나직이 읊조렸다.


“나한테는 평생 가장 행복한 추억으로 남을 순간이었으니까.”

“팀장님…….”

그의 말 하나하나가 재인의 심장에 날아와 꽂혔다.

도혁의 묵직한 진심에 심장이 저릿해졌다.


“……죄송해요.”

“아니야. 나도 놀라게 해서 미안해.”

도혁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재인과의 거리를 좁히며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까 하던 거, 마저 이어서 할까?”

“네에?”

하여간 틈을 주면 안 된다니까!

재인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그를 막을 방법이 번쩍 떠올랐다.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는 도혁을 저지하며 재인이 다급히 외쳤다.


“잠깐만요, 팀장님! 이러시면 계약 위반이에요!”

“계약 위반?”

“계약서에 팀장님이 저를 이성으로 보지 않겠다는 조항이 있잖아요!”

도혁의 발걸음이 멈췄다.


‘됐어! 본인 손으로 계약서에 도장을 꽝! 찍었으니 천하의 차도혁이라도 물러설 수밖에 없겠지?’

보험 잘 들어둔 덕을 보는구나, 라고 재인이 생각하던 그때.

도혁이 한쪽 눈썹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이미 한참 전부터 위반하고 있었는데?”

“알긴 아시네요.”

“그런데, 그동안은 잠잠하다 왜 지금 와서 그 조항을 끄집어낸 거지?”

그것도 이미 키스까지 다 한 뒤에?

도혁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씩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