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이번엔, 멈추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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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이번엔, 멈추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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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이번엔, 멈추지 않을 거야
2022.12.20.
키스.
도혁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오자, 재인이 마음속에 애써 쌓아온 장벽이 속수무책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그 틈을 타 그녀의 본능이 목이 쉬어라, 외쳤다.
솔직한 감정에 따라도 돼.
그렇게 닿고 싶어 밤잠을 설쳤던 그 달콤한 입술이 눈앞이 있잖아.
널 아주 많이 좋아한다잖아.
뭘 망설여?
하지만 차도혁인데?
전혀 미래가 그려지지 않는데?
분명 후회하게 될 건데?
재인은 또다시 날뛰는 상념들을 주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입술을 감쳐문 채 말이 없는 그녀에게 도혁이 말했다.
“셋까지 셀게. 싫으면 그 전에 말해. 하나.”
“저기…….”
“둘.”
“잠깐……!”
그 순간, 도혁이 재인의 말을 가로막으며 그녀의 입술을 뜨겁게 덮었다.
“읍!”
지난번 느꼈던 촉촉하고 부드러웠던 찰나의 감촉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밀어붙이는 도혁에게 재인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밀어낼 생각도 못 하고 그에게 단단히 붙잡힌 채 그저 주먹만 꼭 쥐고 있었다.
그사이 입술 사이를 파고든 뜨거운 열기가 잇새를 뚫고 들어와 그녀의 입안 구석구석을 휘저었다.
“음…… 으음……!”
처음 느끼는 말랑한 감촉에 재인의 몸이 움찔했다.
흠칫 놀라 달아나는 그녀를 도혁이 깊숙이 쫓아와 부드럽게 휘감았다.
쉴 틈 없이 전신에 휘몰아치는 야릇한 전율을 감당할 수 없어, 재인은 바짝 몸을 움츠렸다.
그렇게 도혁에게 정신없이 빨려 들어가던 찰나였다.
갑자기 재인의 손목을 쥔 손에서 힘이 빠졌다.
집어삼킬 듯 강렬하게 부딪쳐왔던 입술도 서서히 멀어졌다.
상체를 일으킨 도혁이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재인도 살며시 눈을 떴다.
그녀의 멍한 시선이 머물 곳을 찾지 못해 하릴없이 허공을 배회했다.
잠시 후, 재인이 뾰로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셋까지 센다면서요.”
“서재인 씨한테는 생각할 시간을 주면 안 되거든. 매번 달아날 궁리만 하니까.”
도혁이 코를 찡긋하며 씩 웃었다.
재인은 화악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손이 재인의 가녀린 턱선을 감싸 쥐고 고개를 돌려세웠다.
이제, 재인은 꼼짝없이 도혁의 눈빛을 온전히 받아내야 했다.
“이번엔 멈추지 않을 거야.”
도혁의 의미심장한 목소리에 재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싫다고, 당장 멈추라고, 그렇게 소리쳐야 하는데 입에 자물쇠라도 걸린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제 안을 가득 채웠던 열기가 싫기는커녕 너무나도 황홀해서.
“……저기, 그게…….”
재인이 머뭇거리자, 도혁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하. 살며시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미안. 더는 기다려줄 여유가 없어.”
이내 참을 수 없다는 듯 도혁이 다시 밀고 들어왔다.
전보다 더 깊고, 더 뜨겁게.
감당하기 버거운 황홀감에 재인은 그만 정신이 아득해졌다.
도혁은 그녀의 턱선을 감쌌던 손을 뒷머리 깊숙이 찔러 넣고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의 손가락이 귓불을 스치자 재인은 그동안 눌러왔던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도혁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제 안에 몰아치는 열기를 깊숙이, 더 깊숙이 받아들였다.
삽시간에 온몸에 퍼진 짜릿한 감각에 재인은 그만 눈앞이 아찔해졌다.
‘하아, 이러면 안 되는데…….’
지금 이 순간, 재인은 그저 파도에 휩쓸리는 모래알처럼 도혁의 손길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기고 싶었다.
어떠한 계산이나 두려움 없이.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간신히 붙잡고 있었던 그녀의 마지막 이성이 막 끊어지려는 찰나였다.
난데없이 재인의 안에서 그녀를 흔들어 깨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멈추지 않을 거야.」
다시 키스하기 전, 도혁이 했던 말이었다.
‘잠깐. 이번에 멈추지 않겠다는 건……?’
촤라락.
별안간 책이나 영화에서 봤던 세세한 장면들이 재인의 머릿속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그리고 맨 위 정중앙에 타이틀 문구가 올라왔다. 두둥.
<이거, 감당할 수 있겠어?>
그것도 차도혁이랑?
순간, 재인은 번개를 정통으로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잇따라 막연한 두려움이 솟구쳤다.
그거야말로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될 테니까.
재인은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도혁의 손목을 꽉 붙들었다.
당황한 그의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재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급히 외쳤다.
“그만! 팀장님, 그만요!”
객실 안의 열기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식어버렸다.
재인은 두 손으로 있는 힘껏 그의 가슴을 밀쳐냈다.
갑작스럽게 떠밀린 도혁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서재인 씨?”
“더는 안 돼요!”
“왜?”
그의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잔뜩 묻어났다.
“몰라서 물으세요?”
“서재인 씨도 내가 좋다며?”
아직은 얼굴만이지만, 어찌 됐든.
도혁은 조금 억울한 눈빛으로 재인을 바라보다 하소연하듯 덧붙였다.
“서재인 씨도 키스를 받아줬다고 생각했는데 나만의 착각이었나?”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창피함에 이미 얼굴이 새빨개질 대로 새빨개진 재인은 눈을 꼭 감고 소리쳤다.
“아, 아무튼! 무, 무조건 안 돼요! 절대!”
그 순간, 도혁의 얼굴에 떠 있던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었다.
“아, 맞다. 모솔…….”
“꺄아아아악!”
재인은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이불을 홱 뒤집어썼다.
“아! 미, 미안. 놀라게 해서…….”
도혁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몰랐다.
“깜박했어. 미안해. 저기 내가 처음부터 이러려던 건 아니고, 아까 질투하는 것 같아서……. 그래도 내게 조금은 마음이 있나 싶었는데, 얼굴은 아주 많이 취향이라고 하니 들떠서 그만.”
도혁이 진땀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미안해. 내가 너무 성급했어. 서재인 씨 마음이 활짝 열리고, 내 얼굴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릴게. 괜찮아. 지금까지 잘 참았는데 더 참는 거야 가뿐하지, 얼마든지, 그러니까…….”
“……팀장님…….”
이불 속에서 가냘프게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마디만 더 하면 창문 열고 뛰어내릴 거예요.”
흠칫.
도혁은 황급히 입을 다물고 못다 한 말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잽싸게 조명을 끄고 침대 반대쪽으로 가 끝에 바짝 닿게 누웠다.
재인이 불편하게 자면 안 되니까.
휴우우우우.
깊은 밤 어둠 속,
아쉬움이 가득 담긴 도혁의 한숨 소리를 끝으로 뜨거웠던 찰나의 키스가 막을 내렸다.
하지만, 달아오른 열기를 삭이지 못한 도혁과 치사량의 자극을 맛본 재인의 잠 못 드는 긴긴밤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호텔 1층 카페테리아에 마주 앉은 도혁과 재인은 묵묵히 테이블만 쳐다보고 있었다.
맛깔스러운 음식들이 한가득 차려져 있는데도 누구 하나 선뜻 손을 대지 않았다.
피차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던 터라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와 있었다.
새벽에 누가 먼저라고 할 새도 없이 일찌감치 채비를 갖춘 재인과 도혁이었다.
간밤의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은 채.
도혁이 무슨 말을 꺼낼라치면, 재인이 홱 고개를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도혁은 할 수 없이 재인의 눈치만 살피며, 그녀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었다.
‘미쳤어! 미쳤어! 대체 어쩌자고 그런 거야!’
지극히 이성적인 상태로 돌아온 재인은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엄청난 일을 저질러버렸다.
일방적으로 당했다고 하기엔 자신도 적극적으로 호응했기에 할 말이 없었다.
저녁 식사 때 몇 잔 마셨던 술은 핑곗거리가 되지 못했고.
너무나도 맨정신이었고.
인정하기 싫지만, 도혁과의 키스는 아찔할 정도로 달콤했다.
떨어지는 게 아쉬울 만큼.
처음 입술이 맞닿았던 그때부터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줄곧 바라왔던 순간이었다.
차도혁에 대한 온갖 망상에 시달리다 못해 꿈을 꿀 정도였으니.
문제는, 도혁과의 미래가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는 거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차도혁이란, 퇴사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악덕 팀장이었을 뿐이니까.
그런 도혁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는데.
솔직히 설렜다.
하지만 정작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재인이었다.
단순히 도혁의 외모에 끌린 건지,
정말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 건지.
아니면 처음 입술이 맞닿은 남자라서 그런 건지.
어젯밤 밤새 고민해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같은 마음으로는 어떠한 결정도 내려서는 안 된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재인이 주저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팀장님…….”
“서재인 씨.”
도혁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를 막아섰다.
“미안한데, 내 말 먼저 들어줘.”
“네? 아, 팀장님 먼저 말씀하세요.”
도혁은 재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난 어젯밤 일, 절대 없던 일로 하지 않을 거야.”
뜨끔.
재인의 눈을 주먹만 해졌다.
없던 일로 하자고 말하려고 했더니?
돌이킬 수 없음을 알지만, 어찌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만큼 무작정 질러볼 심산이었다.
“나의 전부를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릴게. 그러니까, 서재인 씨도 날 진지하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이었다.
“내 얘긴 다 끝났어. 서재인 씨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
재인은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없던 일로 하자고 해봤자 씨알도 안 먹힐 게 뻔하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었다.
“팀장님,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처음에 저를 정말 스파이라고 의심하셨어요?”
“아니.”
“그럼 왜 계약을 하신 거였어요?”
“붙잡으려고.”
그런 거였구나!
재인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머리가 얼얼했다.
그리고 비로소 모든 의문이 눈 녹듯이 풀렸다.
스파이로 몰아가 동거를 제안한 것도,
계약 기간 동안 이성을 사귀지 말라는 억지스러운 조항도 내세운 것도,
규민을 갑작스레 출장 보낸 것도,
민우를 의심하며 멀리하라고 고집부린 것도,
모두가 단 하나의 사실을 전제하고 있었다.
차도혁은 서재인을 좋아한다.
「그렇게 커피가 좋으면 얼마든지 사줄 테니 나랑 마셔요. 버젓이 회사 앞 카페에서 다른 팀 팀장이랑, 그것도 업무 시간 외에 만나면 좋지 않은 소문이 돌 거라는 생각 안 해봤습니까?」
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자, 재인의 분노 버튼을 눌러 사표를 던지게 만든 도혁의 그때 그 말.
괜한 생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했는데, 곱씹어 보니 재인이 민우와 함께 카페에 간 것을 본 도혁의 질투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했다.
“그럼 프로젝트 얘기는요? 그것도 핑계였어요?”
“아니. 프로젝트 얘기는 전부 사실이야. 반드시 성공시켜야 해.”
심각한 표정으로 보아 도혁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속여서 미안해. 하지만, 어떻게든 서재인 씨를 붙잡고 싶었어.”
“저도 책임이 있죠. 제 발로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을 테니까.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이네요.”
“운명이야.”
차분하게 가라앉은 도혁의 눈빛이 그의 진심을 말해주고 있었다.
뭐라도 답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재인은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실은 도혁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더 있었다.
‘어제 휴게소에서 마주친 윤세정 씨와는 무슨 사이예요?’
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재인이었다.
그랬다간 정말 질투로 보일 테니까.
도혁의 눈빛은 여전히 재인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재인은 몸 둘 바를 몰라 괜스레 주위를 둘러보았다.
카페테리아에는 그들을 제외하고 딸랑 남녀 두 커플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조식 먹는 사람이 별로 없네요? 예약이 꽉 찼다더니.”
“……그렇군.”
“조식이 맛없다고 소문났나?”
재인은 고개를 갸웃하며 차려진 음식을 먹어 보았다.
“어? 엄청 맛있는데? 팀장님도 드셔보세요.”
“…….”
또 딴 데로 샜군.
도혁은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재인을 바라봤다.
묵묵히 음식을 입에 가져가는 그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그려졌다.
드르륵.
때마침 도혁의 휴대전화에 성준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도련님, 어제 일은 잘 마무리하셨습니까?]
도혁의 한쪽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덕분에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