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지금부터 키스를 할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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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지금부터 키스를 할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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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지금부터 키스를 할 건데
2022.12.17.
객실 조명은 또 왜 이렇게 불그스름하고 어두운 건지.
너무 긴장한 탓인지 재인의 손바닥이 땀으로 눅눅했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뒷일이야 나중에 생각하고, 어떻게든 이 불편하고 어색한 상황을 빠져나가고 싶은 재인이었다.
‘하지만 어디로? 노숙을 할 수도 없고……. 아우, 피곤해 죽겠네. 그냥 쓰러져 자고 싶다.’
그냥.
자.
힘없이 반쯤 감겨 있던 재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 그러면 되겠구나.
‘내가 먼저 씻고 팀장님 샤워할 때 자버리는 거야! 자는 사람 붙잡고 무슨 얘기를 하겠어?’
재인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내리쬐는 순간이었다.
구겨져 있던 재인의 얼굴이 비로소 활짝 펴졌다.
그사이, 겉옷을 벗은 도혁은 넥타이를 풀어버리고 와이셔츠 단추를 끌렀다.
그래도 답답한지 소매를 팔꿈치까지 접어 올렸다.
은은한 조명 아래 남성미 넘치는 다부진 팔뚝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팔에 감겨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재인은 괜스레 명치가 간질거렸다.
“서재인 씨, 괜찮아?”
“네, 네?”
재인은 나쁜 짓을 하다 들킨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도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멍하니 서 있길래. 장거리 출장이라 피곤해서 그런가?”
“티, 팀장님. 제가 먼저 씻을게요!”
두서없는 대답에 도혁의 눈썹이 움찔했다.
재인의 의도는 다르지만, 문장만 놓고 보면 호텔에 작정하고 들어온 남녀 사이에나 할 법한 말이니까.
오로지 빨리 씻고 잠들겠다는 재인의 일념이 빚어낸 참사였다.
이거,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재인은 멋쩍게 웃으며 둘러댔다.
“아니, 그게…… 팀장님 말씀대로 멀리 와서 그런지, 좀 피곤해서요. 하하.”
“좋을 대로. 나는 잠시 정리할 것도 있고.”
도혁은 의자에 등을 돌려 앉고는 테이블에 노트북을 펼쳤다.
타다다닥. 타닥.
건조한 키보드 소리가 객실을 가득 채웠다.
금세 일에 빠져든 도혁을 보며 재인은 혀를 내둘렀다.
‘진정한 워커홀릭이시네. 괜한 걱정을 했나?’
아까 어두운 항구에서 데일 듯 뜨거운 눈빛으로 재인을 쳐다보던 도혁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조금 서운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인지.
‘어쨌든 계획대로 됐으니까 좋은 거잖아?’
술렁이는 가슴을 다독이며 욕실로 들어간 재인은 하마터면 까무러칠 뻔했다.
침대 옆 욕실 벽이 투명한 통유리로 되어 있는 게 아닌가!
‘맙소사! 갈수록 일이 커지네?’
황급히 욕실을 훑는 재인의 눈에 샤워기 주변에 걸린 하얀 샤워 커튼이 눈에 들어왔다.
등을 돌리고 앉은 도혁은 그새 일에 몰두한 듯했다.
‘휴, 다행이다!’
재인은 조심스레 샤워 커튼을 둘러치고 두툼하고 꽉 끼는 원피스를 벗었다.
그에게 보일 리가 없는데도 괜스레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게 빨리 자버려야지.’
빛의 속도로 샤워를 마친 재인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도혁은 여전히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 분주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저기, 팀장님……?”
재인이 머뭇머뭇 말을 걸자 도혁이 홱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그녀를 응시하는 도혁의 눈빛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동시에 재인의 머릿속에서 대피 경보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티, 팀장님도 씻으세요.”
그 틈에 잠 좀 자게요.
재인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도혁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휴우-.
재인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침대 왼쪽에 붙어 옆으로 누웠다.
등 뒤로 바닥에 물방울 튀기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들려왔다.
자신이 샤워할 때 도혁도 같은 소리를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안 되겠어. 빨리 자버리자.’
재인은 눈을 질끈 감고 물소리를 막아보려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샤워를 마친 도혁이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란 재인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재빨리 자는 척을 했다.
도혁이 나오기 전에 잠들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물거품이 된 지 오래.
재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버라이어티한 망상에 시달리던 중이었다.
저벅저벅.
거침없는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도혁이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 가에 멈춰 서서 조심스레 물었다.
“서재인 씨, 자?”
재인은 아예 숨소리마저 죽였다.
“하. 그새를 못 참고.”
아쉬움이 가득 담긴 공허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역시 씻는 걸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걸 그랬군.”
본론? 대체 무슨 생각을 했길래?
가뜩이나 이불까지 덮고 있어 벌게진 재인의 얼굴 위로 비 오듯 땀이 흘렀다.
갑자기 객실이 고요해졌다.
이제 도혁이 자러 가려는 건가 싶었는데, 웬걸.
그는 아예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그 바람에 이불을 사이에 두고 재인의 가슴께에 도혁의 몸이 바짝 닿았다.
흡!
재인은 너무 놀라 숨이 멎을 뻔했다.
잠든 척하는 재인을 내려다보며 도혁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서재인 씨, 처음에 내가 팀장으로 왔을 때 기억하나? 그때 사람들이 너무 몰아붙인다고 불만이 많았었지.”
그걸 말이라고.
팀장님도 자각은 하고 있었구나.
그나저나 혼자 운전해서 피곤하실 텐데, 잠은 안 자고 뜬금없는 그 얘기를 왜 꺼내시지?
재인은 도혁의 태도가 아리송했다.
그녀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도혁은 계속 말을 이었다.
“한 번은 휴게실에서 팀원들이 악덕 팀장이라고 불평을 늘어놓는 걸 들었는데, 서재인 씨만 ‘그래도 팀장님이 제일 열심히 일하시잖아요.’라며 두둔하더군.”
아, 그때 기억난다.
팀장님이 부임한 지 며칠 안 됐을 때.
원래 모든 이의 좋은 쪽을 보려 하는 재인이었지만, 결국 한 달도 채 못 가 백기를 들고 차 팀장님 불평 여론에 동참했었다.
“그때부터였어. 서재인 씨가 다르게 보인 게.”
맙소사! 방금 이거 고백인 거지?
두근두근.
재인의 심장 박동에 슬슬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지금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초래한 게 그때였다니,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야근을 시켜도 늘 불평불만 없이 웃는 얼굴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볼수록 매력적이더군.”
와……!
누가 워커홀릭 차도혁 아니랄까 봐 일하는 모습이 예뻐 보였다니.
퇴사 충동과 싸워가며 굳건히 버틴 시간 동안, 팀장실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한 달 전쯤이었나. 야근하다 울었을 때는 정말 당황스러웠어. 내가 너무 심하게 몰아붙였나 싶어서.”
내가 한 달 전에 울었다고?
아, 할머니와 통화한 날을 말하는 건가 보다.
그날, 재인은 야근 중에 할아버지 제사라 할머니에게 전화를 했었다.
사정을 얘기했는데도 할머니는 다짜고짜 일부러 일 핑계로 내려오지 않는 거라며 쏘아붙였다. 원래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는 모진 말까지 덧붙이면서.
그 순간, 20년이 지났어도 ‘서재인’은 여전히 가족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서러운 마음에 울컥 솟구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어떻게 달래줘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는데, 금세 눈물을 훔치면서 씩씩하게 삼각김밥을 먹더라고. 재밌는 여자다 싶었어.”
그거야, 배가 고프면 기운이 없어서 더 슬퍼지니까.
응? 잠깐만.
그럼 회식할 때 얘기했던 이상형? 울면서 잘 먹는 여자?
그거, 나를 말하는 거였어?
취향 참 독특하다 싶었는데 그게 자신의 얘기였다니, 재인은 입이 딱 벌어졌다.
“보고만 있어도 좋고, 얘기하면 즐겁고, 같이 있으면 닿고 싶어서 미칠 것 같고…….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후.
도혁이 잠시 숨을 골랐다.
“내가 서재인 씨를 좋아한다는 거야. 아주 많이.”
꺄아아악!
예상했던 그 말을 직접 듣고만 재인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쿵쾅쿵쾅.
쿵쾅쿵쾅.
심장이 폭주 기관차처럼 내달렸다.
몸이 주체하기 힘들 만큼 바르르 떨렸다.
‘이제 어떡해! 난 몰라!’
재인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 순간,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자, 이제 서재인 씨 생각을 얘기해봐.”
그 말과 동시에 이불이 홱 젖혀졌다.
재인이 앗, 하는 사이에 도혁이 그녀의 어깨를 돌려 똑바로 눕혔다.
깜짝 놀란 재인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재인의 손목은 그의 두 손에 꽉 붙들려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어느새 도혁이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어 있었다.
쿵쾅쿵쾅.
쿵쾅쿵쾅.
재인은 미친 듯이 날뛰는 심장 소리가 도혁의 귀에 들릴 것만 같아 마음을 졸였다.
“안 자는 거 모를 줄 알았나?”
“……!”
“들켰으니 그만 눈 뜨지?”
도혁이 재촉하듯 말했다.
‘뜰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무리한 지시를 하는 도혁이 원망스럽기만 한 재인이었다.
자는 척하는 건 이미 물 건너갔다.
그렇다고 눈을 뜨자니 어두운 조명 아래 도혁과 눈을 마주쳐야 하는 민망한 상황이 펼쳐질 게 뻔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재인은 눈을 감은 채 목에 걸린 말을 간신히 쥐어 짜냈다.
“……왜 이러세요?”
도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이미 말했잖아. 이제 참지 않을 거라고.”
“그건 술…….”
……이 아니었죠.
재인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더는 모른 척 피할 수 없음을 받아들였다.
“눈 좀 떠봐.”
다시금 재촉하는 도혁의 목소리가 애절하게 들리는 건 착각일까?
‘그래,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눈을 못 뜰 이유가 어디 있어. 어차피 한 번은 얘기하고 넘어가야 했잖아. 그냥 솔직하게 말하면 되지.’
마음을 다잡은 재인은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떴다.
촉촉하게 젖은 도혁의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그 눈을 마주하자 재인은 심장에 저릿한 압박이 느껴졌다.
재인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간신히 끄집어냈다.
“떠, 떴어요. 왜요?”
방금 전까지 몰아붙이던 기세와 달리, 도혁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말해봐. 서재인 씨도 조금은…… 내게 마음이 있지 않나?”
“모, 모르겠어요.”
“거짓말. 넋 나간 듯 날 쳐다볼 때가 많았잖아?”
“그, 그건…….”
“그건 뭐?”
“……잘생겨서요.”
재인의 솔직한 대답에 도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적어도 얼굴은 서재인 씨 취향인 게 확실하군?”
“……네. 아주 많이요.”
너무 솔직했나?
도혁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다른 건?”
“모르겠어요.”
도혁의 얼굴에 잠시 황당한 표정이 떠올랐지만 이내 부드러운 미소로 바뀌었다.
“상관없어. 이제부터 알아가면 되니까.”
“돼, 됐죠. 이제 놔주세요.”
재인은 한시라도 빨리 이 낯 뜨거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도혁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질문이 하나 더 남았어.”
“……또 뭔데요?”
점점 더 죄어드는 긴장감에 재인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사뭇 진지한 얼굴로 도혁이 물었다.
“내 입술을 훔친 건 어떻게 책임질 거야?”
“네?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사고일 뿐이라고 했잖아요.”
“좋아. 그럼 내가 한 번 당했으니 한 번 갚아주는 걸로 하지. 공평하게.”
뭐라고?
소스라치게 놀란 재인은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도혁은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서 지금부터 키스를 할 건데, 괜찮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