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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그 밤, 방은 하나뿐 (56/129)


56화. 그 밤, 방은 하나뿐
2022.12.13.



‘질투?’

재인은 도혁의 말을 듣자마자 감전된 듯 머리가 얼얼했다.

오늘 하루 종일 자신을 속 시끄럽게 만든 이상한 기분이 ‘질투’라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이었다.


“질투하는 거지?”

도혁이 재인에게 성큼 다가서며 다시 한번 물었다.

재인은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아, 아니거든요!”

“서재인 씨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들어가서 임 대리한테 관심 없다고 말할 수 있어. 어떻게 할까?”

그 말에 재인은 묘한 안도감과 승리감이 느껴져 당혹스러웠다.

도혁의 마음을 모른 척하기로 했으면서 그런 감정을 느끼다니, 반칙이었다.


“그,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도혁은 대답 대신 살며시 한 손으로 재인의 턱선을 따라 그리다가, 살짝 들어 올렸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도혁의 짙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재인은 숨이 턱 막혔다.

물결치는 재인의 눈동자를 지그시 들여다보며 그가 말했다.


“또 모른 척하려고?”

제대로 간파당한 재인은 마음이 소란스러웠다.


‘이대로라면…… 어서 피해!’

그래야 하는데 두 다리가 땅바닥에 뿌리내린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재인은 도혁의 뜨거운 눈빛을 감당하기 힘들어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제 턱에 닿은 그의 손끝에서 전해져 오는 뜨거운 열기는 피할 길이 없었다.

살며시 열린 재인의 붉은 입술 사이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빨리 가 봐야죠.”

“상관없어.”

“아, 아침에 팀장님이 공사를 구분하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고는 입꼬리를 올리며 덧붙였다.


“지금은 업무 시간이 아니거든.”

도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재인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탁.

건물 벽에 기댄 채 도혁이 재인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단단한 품에 폭 안긴 재인은 온몸에 짜릿한 전류가 흘렀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심장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미친 듯이 뛰었다.

어둠 속에서도 도혁의 섬세한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단정하게 다물린 그의 입술에 시선이 닿자, 재인은 흔들리지 말자고 했던 다짐이 무색하게 가슴이 설렜다.

마치 꿈속을 거니는 듯한 기분이랄까?

재인은 저도 모르게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 언젠가 한번쯤 꿈꿨던 로맨틱한 키스 신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얼굴을 스치는 청량한 바닷바람,

거친 파도 소리,

칠흑 같은 어둠 속 가로등 불빛,

그리고 눈앞의 눈부시게 멋진 남자,

컹컹. 컹. 컹.

난데없이 개 짖는 소리까지.

응?

재인은 별안간 발목에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무심코 내려다보니 그녀의 발목을 열심히 핥고 있는 작고 하얀 개가 눈에 들어왔다.


“꺄악!”

재인은 기겁하며 도혁에게 매달렸다.


“저리 가!”

도혁은 재빨리 재인을 안아 올렸다.


“아, 흰둥아! 일루 와!”

언제 왔는지,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가 나타나 흰둥이의 목줄을 잡아당겼다.

할머니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겸연쩍게 웃었다.


“언제 끝나는가 기다렸는디, 야가 눈치 없이 그새를 못 참고 달려들었구먼. 꼭 여기서 볼일을 봐야 해서 말여.”

“네?”

황당해하는 재인에게 할머니가 손가락으로 가로등 밑을 가리켰다.

그새 개가 전봇대 아래에 영역을 표시하고 있었다.


“암튼 처녀 총각, 방해해서 미안혀. 우린 이만 갈 테니께 하던 거 마저 하드라고.”

하던 거?

재인은 그제야 도혁의 품에 안겨 그의 목을 힘껏 끌어안고 있음을 자각하고, 빛의 속도로 땅 위로 내려왔다.


“아니에요!”

비명 같은 한 마디를 남기고, 재인은 가게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총각, 이거 미안혀서 어쩌나.”

할머니는 머리를 긁적이며 흰둥이를 끌고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도혁은 조금 전까지 재인이 서 있던 자리를 멍하니 쳐다봤다.

품 안에는 아직 그녀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이젠 하다 하다 개까지 방해를 하다니.’

허. 허허.

홀로 남겨진 도혁의 허탈한 웃음소리가 어둠 속을 떠다녔다.

* * *



‘아우우우, 이게 무슨 망신이야!’

자리로 돌아온 재인은 땅굴을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좀 전에 할머니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 순간.

허리를 감싸 안았던 도혁의 다부진 팔과 데일 듯 뜨거웠던 손의 감촉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절절한 그의 눈빛까지.


‘진짜 큰일 날 뻔했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재인은 숨이 턱, 막혔다.

동시에 깊은 자괴감도 밀려왔다.

굳게 다짐해놓고, 자진해서 눈까지 감은 게 한심해서.

유혹 앞에 이토록 나약한 인간이었다니.


“서 주임님, 혹시 열나세요?”

불에 덴 것처럼 빨간 재인의 얼굴을 보며 혜주가 걱정스레 물었다.


“겨울 바닷바람이 워낙 차서 아차, 하면 감기 걸리기 십상이라 조심해야 해요. 오늘은 일찍 쉬시는 게 좋겠어요.”

“네, 그럴게요. 고맙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마에서 미열이 느껴지긴 했다.

재인은 그게 진짜 열인지, 조금 전 상황 때문에 달아오른 것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차 팀장님이 오래 걸리시네요. 혹시 밖에서 못 보셨어요?”

“네? 모, 못 봤는데요. 어디를 가셨을까요. 하하.”

재인은 마치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해선 안 될 짓을 한 것만 같아 괜스레 가슴이 조마조마하던 그때, 때마침 도혁이 돌아왔다.


“오래 자리를 비워서 죄송합니다.”

“어머, 볼 빨개진 것 좀 봐. 차 팀장님, 밖에 너무 오래 계셨어요.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인데.”

혜주의 염려 섞인 목소리에 도혁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차 팀장님, 혜주가 목이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하하.”

“할아버지도, 참!”

혜주가 호탕하게 웃는 임 사장에게 눈을 흘겼다.

재인은 조금 전 자신을 바라보던 애타는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어느새 냉정을 되찾은 도혁을 보니 조금 약이 올랐다.

마음이 널뛰는 건 자기 하나뿐인 것 같아서.


‘팀장님은 어쩜 저렇게 포커페이스를 잘 유지해? 또 나만 혼자 오버하는 거야?’

재인은 답답한 속을 흘려보내고 싶어, 반쯤 차 있는 맥주잔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 * *

같은 날 저녁 8시경.

혜주의 차가 녹동항의 한 관광호텔 앞에 멈춰 섰다. 규모는 작지만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외관이 깔끔한 곳이었다.

혜주가 차 밖으로 나와 도혁과 재인을 배웅했다.


“작은 항구라 묵을 만한 곳은 여기밖에 없어요. 다른 곳은 모텔 수준이라 불편하실 거예요. 내일 아침에는 10시까지 모시러 올게요.”

“잠깐만요, 임 대리님! 아직 시간도 이른데 차 한잔 더 하고 가세요!”

재인이 다급히 혜주를 붙잡았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도혁과 둘이 남겨지는 게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고 싶지만 보시다시피…….”

혜주가 차 뒷좌석을 가리키며 멋쩍게 웃었다.

술에 취한 임 사장이 그새 뒷좌석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 그래도…….”

도혁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재인을 막아서며 말했다.


“임 대리님,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네, 푹 쉬시고 내일 뵈어요.”

혜주가 환하게 웃으며 차에 올랐다.

그녀의 차가 사라지자 도혁은 성큼성큼 호텔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찌할 도리 없이 재인도 주춤주춤 그의 뒤를 따랐다.

도혁은 로비를 가로질러 곧장 안쪽에 있는 프런트데스크 앞에 섰다.


“방 두 개 주세요.”

데스크에 있던 여자 직원이 도혁을 보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혁이 한쪽 눈썹을 끌어올리며 눈짓을 보내자, 직원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고객님, 죄송하지만 남아 있는 객실이 스탠더드룸 딱 하나뿐인데 어쩌죠?”

“뭐라고요?”

말도 안 돼!

재인은 제 귀를 의심했다. 이 무슨 삼류 영화에나 나올 법한 전개란 말인가.


“정말 없어요?”

“네. 요새 연말이라 단체 관광객이 많아서요. 하나 남은 객실도 오늘 갑자기 취소된 거예요.”

재인은 한겨울에 이 먼 곳까지 여행 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녀와 달리 도혁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차분하게 말했다.


“할 수 없군요. 그럼 그걸로 주시죠.”

“안 돼요!”

재인이 도혁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팀장님, 그러지 말고 다른 곳에 가보죠.”

“다른 곳?”

도혁의 얼굴에 귀찮은 기색이 스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제발요! 방만 두 개라면 쓰러져가는 폐가라도 좋아요.’

직원이 안타깝다는 얼굴로 말했다.


“다른 곳도 아마 상황은 마찬가지일 거예요. 금요일인 데다 시간도 늦어서요.”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팀장님, 어서 가 봐요.”

재인이 앞장서서 관광호텔 밖으로 나갔다.

도혁은 직원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마지못해 재인을 따라나섰다.


“어? 저기, 고객님……?”

프런트데스크 직원이 점점 멀어져가는 도혁의 뒷모습을 황망히 바라봤다.

.
.
.



“네? 방이 하나도 없다고요?”

인근 모텔 로비에 재인의 절망적인 외침이 울려 퍼졌다.


“사장님,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재인이 애원하듯 쳐다보자, 주인아주머니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단체 손님이 들이닥쳐서 어쩔 수가 없네요. 죄송합니다. 근데 다른 데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벌써 다섯 번째 거절이었다.


‘맙소사! 이건 꿈일 거야!’

녹동항이 이렇게 인기 많은 관광지인 줄은 미처 몰랐네.

재인은 머리도 아프고 다리는 더 아파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이러다 길에서 밤을 새우겠군.”

도혁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사이 시간은 밤 9시를 넘기고 있었다.


“죄송해요, 팀장님. 근데 이제 어쩌죠?”

“처음 갔던 곳이라도 다시 가봐야지. 아직 방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도혁이 무덤덤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다시 처음 들렀던 호텔로 걸어가면서 재인은 생각했다.


‘팀장님은 이 상황이 아무렇지도 않나?’

분명 기가 막힌 상황인데도, 도혁은 오히려 여느 때보다 의연해 보였다.

재인은 괜히 혼자만 난리를 치는 것 같아 민망해졌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꼼짝없이 도혁과 한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야만 하는 지금.

얼굴이 하얗게 질린 재인은 머릿속도 하얘졌다.


“다리가 많이 아픈 것 같은데, 서재인 씨는 여기서 기다리지.”

호텔 로비에 들어선 도혁은 그녀를 소파에 앉히고 홀로 프런트데스크로 향했다.


“하나 남은 그 객실, 주세요.”

“고객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차도혁입니다.”

그러자 직원이 활짝 웃으며 반갑게 맞았다.


“역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도혁은 재인이 들을까 걱정돼 직원에게 조심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직원은 슬쩍 재인을 쳐다보더니 도혁에게 작게 속삭였다.


“죄송합니다. 예약하신 분이 엄청나게 멋진 분이 묵고 가실 거라고, 바로 알아볼 거라고 하셨는데 진짜였네요. 아까는 그냥 가셔서 아닌 줄 알고 당황했어요.”

“그렇게 됐습니다.”

“저희 호텔 객실을 만실로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이따 특별 서비스 올려 보내드릴게요.”

그 말에 도혁이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방해하지 마, 절대!

마치 으르렁거리는 것 같은 그의 눈빛에 직원이 움찔 놀랐다.

도혁은 직원에게 다시 한번 당부의 눈빛을 보내고는 천천히 재인을 향해 돌아섰다.

* * *

객실 문을 열자 그레이 톤의 좁지만 아늑한 공간이 펼쳐졌다.

도혁은 재인이 들어갈 수 있게 문을 잡고 옆으로 비켜섰다.

그런데도 그녀는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문가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이미 엘리베이터에 단둘이 탔을 때부터 정신이 반쯤 나간 재인이었다.


“계속 밖에 서 있을 건가?”

“네? 네,니요!”

도혁의 말에 떠밀리듯 들어간 재인은 객실 안을 보고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설마설마했는데.

침대가 딸랑 하나뿐이었다.

침대 하나 그리고, 차도혁.


‘맙소사! 누가 꿈이라고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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