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혹시 질투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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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혹시 질투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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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혹시 질투하는 건가?
2022.12.10.
“할아버지! 그런 질문은 왜 하세요!”
당황한 혜주가 핀잔을 주자, 임 사장이 껄껄껄 웃으며 사과했다.
“제가 주책이었군요. 궁금한 건 못 참아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결혼은 안 했습니다.”
“그러시군요.”
임 사장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걸 지켜보는 재인은 심기가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었다.
마치 금은보화를 짊어지고 제 발로 도적 소굴에 들어간 기분이랄까.
‘오늘 왜 이러지? 팀장님을 보는 사람마다 과도한 관심을 보이네?’
재인은 옆에 앉은 도혁을 흘낏 쳐다보았다.
잠시였지만, 그의 섬세하면서도 남자다운 이목구비가 재인의 눈에 아로새겨졌다.
‘정신 차려, 서재인! 하여간 쓸데없이 잘생겨서.’
재인은 괜스레 양손을 꽉 맞잡으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 * *
“생산라인과 저장창고를 둘러보셔서 아시겠지만, 이 업계에서 이만한 시설 갖춘 곳이 없습니다. 저희랑 손잡으시면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검토한 뒤에 연락드리겠습니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임 사장과 도혁은 웃는 얼굴로 악수를 했다.
회의를 마치고 나니 어느새 5시가 훌쩍 넘었다.
도혁은 잠시 생각한 뒤 말을 꺼냈다.
“덕분에 2차 가공과정은 잘 봤습니다. 1차 생산라인도 직접 확인하고 싶은데 지금 볼 수 있을까요?”
갓 채취한 다시마와 미역 등 해초를 다듬고 선별하는 작업은 생산지인 거금도에 있는 1차 가공공장에서 진행되었다.
“그럼요. 시설이나 위생 상태를 확인하고 가셔야 안심이 되시겠죠. 여기서 30분밖에 안 걸리니 바로 출발하시죠.”
임 사장의 말에 재인이 화들짝 놀랐다.
“팀장님, 지금 출발해도 완도까지 가려면 시간이 빠듯할 것 같은데요?”
오늘 밤은 완도에서 묵은 다음, 이튿날인 목요일 오전 10시에 그쪽 납품업체와 미팅을 할 예정이었다.
임 사장이 걱정하는 재인을 안심시켰다.
“지금 출발하면 8시 전까지 충분히 돌아올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도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재인은 할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하여튼 일에 있어서는 철저하시다니까. 에휴.’
도혁과 재인은 임 사장과 함께 혜주의 차를 타고 곧장 거금도로 향했다.
Rrrrrrr. Rrrrrrr.
막 거금도로 가는 길목인 녹동항에 들어섰을 때, 임 사장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뭐라고? 어쩌다 그런 거야!”
심각한 표정으로 통화를 마친 임 사장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이고, 죄송해서 이를 어쩌죠? 생산라인에 문제가 생겨서 수리해야 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내일이면 정상 가동된다고 하는데, 죄송하지만 내일 보시면 안 되겠습니까?”
“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재인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정말 드문 일인데 하필이면 지금…….”
“아닙니다. 그럼 내일 보는 거로 하지요.”
내일이라는 도혁의 말에 재인의 눈이 커졌다.
“팀장님, 내일 10시 미팅은 어쩌고요?”
“사정 얘기하고 오후로 연기해줘요. 지금 바로.”
도혁의 표정에서 반드시 1차 가공공장을 눈으로 확인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보였다.
“네. 알겠습니다.”
재인은 힘없이 대답했다.
정말 아침부터 일진이 사나운 날이다.
휴대전화 분실에, 연지의 사고에, 피하려고 몸부림쳤던 도혁과는 출장까지 함께 오게 된 데다, 가공공장 설비 고장까지.
‘잠들 때까지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하루가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재인이었다.
* * *
잠시 후, 재인 일행은 녹동항에서 제일 큰 횟집 2층의 창가에 앉아 있었다.
임 사장이 단골집이라며 안내한 이곳은 탁 트인 바다가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내려다보였다.
작은 항구 특유의 운치가 있어 낭만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아침도 거르고 점심도 대충 때운 재인은 싱싱한 회와 해산물이 가득한 푸짐한 상차림에 입이 딱 벌어졌다.
그 앞에서 재인은 모든 고민을 잠시 내려놓고 일단 먹기로 했다.
“임 사장님, 하나같이 정말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다행입니다. 많이 드세요, 허허.”
임 사장은 사람 좋게 웃고는 맞은편에 앉아 묵묵히 식사하는 도혁에게 넌지시 물었다.
“실례지만, 차 팀장님은 혹시 마음에 두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도혁과 재인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를 쳐다보았다.
대각선으로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 순간적으로 파바박 스파크가 일었다.
재인은 도혁의 눈빛을 피해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할아버지! 그런 걸 왜 물어보세요!”
도혁의 옆자리에 앉은 혜주가 새빨개진 얼굴로 말렸지만, 임 사장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하는 시간도 아닌데 뭐 어떠냐? 남자인 내가 봐도 차 팀장님이 아주 괜찮은 신랑감이라 궁금해서 그러지.”
“요즘 그런 사적인 질문하는 거 큰 실례라고요!”
“그래? 차 팀장님, 내가 옛날 사람이라 실례했습니다. 불쾌하셨으면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도혁은 멋쩍어하는 임 사장에게 차분히 웃어 보였다.
그러자 아직 포기 못 한 임 사장이 재차 물었다.
“차 팀장님, 만나는 분 없으시면 우리 혜주 어떻습니까?”
캑. 캑.
사이다를 마시던 재인은 임 사장의 폭탄 발언에 제대로 사레가 걸렸다.
“서 주임님, 괜찮으세요?”
혜주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흠흠. 네. 괜찮아요.”
“할아버지가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시니까 서 주임님도 놀라셨잖아요!”
“이런. 서 주임님, 미안하게 됐습니다.”
“아니에요.”
흠흠.
재인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생각했다.
‘어째 자리에 앉을 때부터 임 사장님이 나한테 자기 옆자리에 앉으라고 선수를 치시더라니.’
뭔가 석연치 않았는데, 도혁과 혜주를 같이 앉게 하려는 꿍꿍이였던 게 명확해졌다.
그사이 연거푸 소주를 두 잔이나 마신 임 사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혜주야, 말이 되고 안 되고는 해봐야 아는 거다. 안 그렇습니까, 차 팀장님?”
“할아버지!”
혜주는 임 사장에게 눈을 흘기고는, 황급히 도혁에게 사과했다.
“차 팀장님, 죄송해요. 할아버지가 저 빨리 결혼시키려고 작정을 하셔서요. 괜찮은 신랑감이다 싶으시면 이러세요.”
“그러실 수도 있죠.”
도혁은 민망해하는 혜주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러자 임 사장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 아버지가 수협 조합장만 두 번째예요. 나랑 같이 사업도 하고 있는데, 자식은 딸랑 혜주 하나뿐이라 나중에 사위한테 다 물려줄 생각입니다.”
누가 들어도 혹할 만큼 강력하게 배경을 어필하는 임 사장이었다.
문제는 상대가 대산그룹의 후계자인 차도혁이라는 것.
도혁은 미소를 지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임 사장은 혜주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내 손녀라서가 아니라, 똑똑하지, 마음씨도 곱지, 예쁘지,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습니다. 작년엔 고흥 유자아가씨대회에 나가서 2등을 했다니까요. 얘만 한 신붓감은 팔도를 뒤져도 없어요.”
“아휴, 창피하게 자꾸 왜 이러세요. 이제 술 그만 드세요! 죄송해요, 차 팀장님.”
혜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그녀에게 도혁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틀린 말씀을 하시는 것도 아닌데요.”
“역시 차 팀장님 보는 눈이 탁월하십니다. 하하.”
임 사장은 이미 도혁을 손주 사윗감으로 콕 찍은 듯했다.
도혁을 보는 혜주의 눈빛에서도 반짝, 빛이 났다.
그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는 재인은 기가 막힐 뿐이었다.
‘딱 잘라버려야지 왜 괜히 기대하게 하는 거야?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이러다 괜한 오해를 사서, 앞으로 진행될 신제품 프로젝트에 차질이 빚어질까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도혁과 혜주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는지 몹시 신경이 쓰였다.
‘그냥 놔뒀다간 점점 일이 커지겠는데…….’
재인은 답답한 마음에 불쑥 끼어들었다.
“아, 팀장님! 그때 관심 있는 분이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볼수록 매력이 넘치는 분이라고…….”
혜주와 임 사장의 눈이 일제히 도혁에게 향했다.
재인은 이쯤에서 그만 상황을 정리하라고 도혁에게 눈짓을 보냈다.
도혁은 그녀를 무심히 쳐다보다, 소주잔을 들어 입안에 술을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나직이 읊조렸다.
“있었죠. 술만 먹고 도망갔지만.”
뜨끔.
우리 팀장님, 뒤끝이 아주 기시네.
재인은 민망함을 감추려 사이다를 들이켜다 또 사레가 걸려버렸다.
캑. 캑.
“죄송해요. 저, 잠시 화장실 좀.”
재인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도혁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Rrrrrrr. Rrrrrrr.
도혁의 휴대전화에 김 실장의 이름이 떴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도혁은 휴대전화를 들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
.
.
‘그냥 가만히 있지. 괜히 말 꺼내서 본전도 못 찾았네.’
재인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자학하고 있는데, 혜주가 화장실로 들어왔다.
“서 주임님, 당황스러우셨죠? 죄송해요.”
“아, 아니에요.”
“할아버지가 술이 과하셨는지 실없는 말을 많이 하시네요. 못 본 걸로 해주세요.”
“아, 아니에요. 손녀를 아끼시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은데요.”
이건 재인의 진심이었다.
엄마 아빠를 제외하면, 집안사람들 모두 입양된 재인을 굴러들어온 돌멩이로 취급했다.
특히 할머니는 대놓고 다른 사촌들과 차별했기에, 재인은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는 혜주가 진심으로 부러웠다.
혜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차 팀장님 정말 누구 만나는 분 안 계신가요?”
“네?”
“저렇게 멋지신데 애인이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
차도혁 씨가 관심 있는 여자라면, 지금 임 대리님이 눈앞에서 보고 있긴 하신데요.
재인은 도혁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경우의 수는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는 혜주를 보며 은근히 마음이 상했다.
“없어요. 팀장님은 일이 애인이에요.”
“정말요? 다행이다.”
볼을 붉히는 혜주는 한 떨기 꽃 같았다.
재인은 거울 속에 비친 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늦잠을 자서 정신없이 나오느라 빗질도 화장도 제대로 못 한 탓인지 오늘따라 유난히 초췌해 보였다.
재인은 발바닥부터 유쾌하지 않은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임 대리님, 저 잠깐 바깥바람 좀 쐬다 들어갈게요.”
* * *
항구는 그새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비릿한 바다 내음과 매서운 바람이 재인을 맞이했다.
재인은 답답한 속이 뻥 뚫리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잘 부탁드립니다, 김 실장님.”
갑자기 건물 옆 공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칠흑 같은 어둠 속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에 도혁이 통화를 하고 있었다.
“올라가서 뵙지요. 그럼 이만.”
전화를 끊은 도혁과 재인의 눈이 마주쳤다.
재인은 모른 척할 수도 없어 그에게 주춤주춤 다가갔다.
“김 실장님이세요?”
“어.”
“팀장님, 바쁘신 거 아니에요? 하필이면 생산라인이 고장이 나서 일이 지체됐네요.”
“괜찮아. 이것도 나한텐 중요한 일이니까.”
도혁의 나직한 목소리를 끝으로 정적이 흘렀다.
어둠 속, 어색한 가운데 도혁을 바라보고 있자니 재인은 괜스레 심통이 올라왔다.
혜주와 엮어보려는 임 사장의 말을 웃으며 받아주던 게 떠올라서.
“그나저나 좋으시겠어요.”
“뭐가?”
“임 사장님이 팀장님을 아주 마음에 들어하셔서 손주 사윗감으로 콕 찍으신 것 같던데요? 임 대리님도 팀장님께 호감이 있는 것 같고…….”
“그런 거 아니야.”
“일부러 모르는 척하시는 거예요? 그럴 거면 왜 딱 자르지 않고 괜한 기대를 하게 만드셨어요?”
도혁이 한쪽 눈썹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그럼 할아버지뻘 되는 분이 농담 반으로 말씀하시는데 정색을 해야겠나?”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 아래 자라며 웃어른에 대한 엄격한 예절 교육을 받은 도혁이었다.
“그래도 착각하게 내버려 두면 안 되죠. 혹시 팀장님도 끌린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임 사장님 말대로 임 대리님 괜찮은 사람이잖아요. 얼굴도 예쁘고…….”
도혁은 지그시 재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서재인 씨, 혹시…… 지금 질투하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