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마음껏 쳐다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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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마음껏 쳐다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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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마음껏 쳐다봐
2022.12.06.
도혁을 불러 세운 이는 눈처럼 새하얀 피부에 긴 머리를 다소곳이 늘어뜨린, 차분한 분위기의 미인이었다.
한 떨기 백합 같은 그녀를 본 도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었다.
“저 윤세정이에요. 기억하시죠?”
“네.”
“세상 참 좁네요. 어쩜 여기서 다 만나요? 운명인가?”
환하게 미소 짓던 세정은 도혁의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재인을 보고 넌지시 물었다.
“근데 옆에 계신 분은 누구세요? 혹시…… 여자친구?”
“회사 직원입니다. 출장 가는 중이라.”
도혁이 무심히 대답했다.
세정은 그럼 그렇지, 하는 눈빛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시군요.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팀장님, 저 먼저 차에 가 있을게요.”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재인은 뛰어가듯 걸어가, 근처에 세워둔 도혁의 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창문 너머로 도혁과 세정을 슬쩍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름이 윤세정이라고 했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인데……. 아!’
도혁의 욕실에 숨어들었을 때 김 실장과 통화하던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었다.
차 회장이 선을 보라고 했던 서진물산 윤세정.
저렇게 청초하고 예쁜 사람이었다니.
도혁의 벌판같이 넓은 등 너머로 그를 올려다보며 미소 짓고 있는 세정이 보였다.
아무리 둔한 재인이라도, 세정이 도혁에게 호감이 있다는 건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재인은 그런 세정의 앞에서 자신을 딱 잘라 회사 직원이라고 소개한 도혁의 말이 명치에 걸려 답답했다.
‘맞잖아, 회사 직원. 출장 가는 중이고. 틀린 말 하나도 없는데, 왜 이래?’
순간, 재인은 가슴 한구석이 저릿했다.
뒤이어 근원을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들었다.
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들을 떨쳐내려 재인은 크게 혼잣말을 했다.
“둘이 아주 잘 어울리네! 차 회장님 안목이 탁월하셔.”
재인은 입안에 호두과자 두 개를 한 번에 몰아넣고 우물우물 씹어 먹었다.
창밖의 두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한편, 도혁은 예상치 못한 세정의 등장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할아버지한테 괜한 얘기가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 아직은 때가 아닌데…….’
아직은 차 회장에게 재인의 존재를 숨기고 싶었다.
차 회장이 알게 되면 긁어 부스럼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도혁의 속도 모르고, 세정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전 도혁 씨랑 만나기로 했던 약속이 취소돼서 친구랑 남해에 내려가는 길이에요. 바빠서 다음에 보자고 하셨다고 전해 들었는데 출장 때문이셨군요.”
“할아버지가 그러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김 실장님과 통화할 때, 할아버지가 맘대로 수요일에 약속을 잡아놨다고 했었는데 그게 오늘이었다.
‘다음에 보자고 했다고? 할아버지가 아직도 포기를 안 하셨군.’
그렇게 싫다고 얘기했건만.
도혁의 미간에 깊은 세로줄이 생겼다.
“저, 실은 도혁 씨랑 만나는 거 기대하고 있었는데 미뤄져서 조금 실망했었거든요. 근데 여기서 보다니, 역시 만날 사람들은 만나게 되나 봐요.”
들뜬 표정의 세정을 묵묵히 바라보던 도혁이 입을 열었다.
“윤세정 씨,”
“네?”
“그때도 얘기했지만, 저는 결혼 자체를 할 생각이 없습니다. 미안하지만, 윤세정 씨가 할아버지께 거절해주세요.”
“…….”
세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이내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좋아요. 대신 조건이 있어요.”
“그게 뭡니까?”
도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도혁 씨가 차 한잔 사주면 생각해볼게요.”
“윤세정 씨, 그건 곤란…….”
세정은 거절하려는 도혁을 막아서며 명함을 내밀었다.
“두 번이나 바람 맞았는데 그 정도는 해주실 수 있지 않나요? 그냥 차 한잔 마시는 거예요. 부담 없이.”
여전히 명함을 내민 손을 거두지 않는 세정이었다.
도혁은 예의상 마지못해 명함을 받았다.
“그럼, 연락 주세요. 차 회장님 마음을 돌리고 싶으시면요.”
말을 마친 세정이 생긋 웃으며 차에 올라탔다.
도혁은 명함을 코트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고 돌아섰다.
‘어? 이제 끝났나 보다.’
차 안에서 줄곧 그들을 지켜보던 재인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나쁜 짓을 하다 걸린 것도 아닌데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줄곧 재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 또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두 사람은 무슨 사이일까?’
살갑게 ‘도혁 씨’라고 부르던데.
여기서 만난 게 운명이라고도 하고.
두 사람은 이미 만난 적이 있는 사이임이 분명했다.
‘그럼 팀장님이 그새 선을 봤다는 거야?’
김 실장님한테는 절대 안 만나겠다고 했으면서.
유쾌하지 않은 감정이 순식간에 재인의 온몸으로 번졌다.
‘팀장님이 선을 보든 말든, 그걸 네가 왜 신경 써? 팀장님과 아무 사이도 아닌데.’
재인은 낯선 감정에 휘둘리는 자신이 당혹스럽기만 했다.
문득, 이틀 전 아슬아슬했던 밤.
자신을 집어삼킬 듯 쳐다보던 도혁의 갈급한 눈빛이 떠올랐다.
그때, 본능이 앞서 다시 한번 입술이 맞닿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호두과자 봉지를 쥔 재인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차라리 잘된 거야. 지금이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갈 수 있어. 팀장님한테 결혼할 사람이 생기면 더는 나한테 책임지라며 밀어붙이는 일도 없을 거잖아?’
집 안에 둘이 있을 때 마음 졸일 필요도 없겠지.
시도 때도 없이 괴롭히던 망상도 끝이 날 테고.
원래대로 바람직한 비즈니스 관계만 남을 거야.
어차피 한 달 반이면 끝나는 계약관계니까.
그래, 마음 단단히 먹고 더는 흔들리지 말자.
“서재인 씨?”
운전석 문을 연 도혁이 멍하니 생각에 잠긴 재인을 불렀다.
“……팀장님, 오셨어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도혁은 재인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아뇨! 걱정 말고 어서 출발하시죠. 이러다 늦겠어요.”
“흠. 알았어.”
도혁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시동을 걸었다.
곧이어 그의 차가 미끄러지듯 휴게소를 빠져나갔다.
재인은 복잡한 가슴을 안고 하염없이 창밖만 내다보았다.
* * *
“세정아, 아까 밖에서 얘기하던 남자 누구야? 진짜 멋지던데.”
조수석에 앉은 친구 민혜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세정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나랑 결혼할 사람.”
두 집안에서 적극적으로 혼사를 추진하고 있으니 곧 현실이 될 터였다.
“진짜? 뭐 하는 사람인데?”
“대산그룹 후계자.”
민혜의 눈이 주먹만 해지고 입이 딱 벌어졌다.
“진짜? 굉장하네. 그동안 왜 얘기 안 했어?”
“집안끼리 정해진 거라. 어차피 때 되면 할 결혼인데, 미리 소문나서 좋을 거 없잖아.”
“그렇긴 하지. 그나저나 저렇게 멋진 남자 처음 봐. 집안도 끝내주고. 너무 부럽다!”
“그 정도는 돼야 나랑 격이 맞지 않겠어?”
세정의 눈빛에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그녀는 어렸을 때, 도혁을 처음 보자마자 그의 수려한 외모에 끌렸었다.
유학을 다녀오느라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몇 달 전 파티에서 우연히 더욱 멋져진 도혁을 보고 눈독을 들여왔었다.
도혁과의 혼사 얘기가 나오자 이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 자리에서 바람을 맞고, 병원에서도 무시당해서 자존심이 이만저만 상한 게 아니었다.
다시 그에게 접근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차에, 이렇게 마주칠 줄이야.
분명 좋은 징조였다.
“맞아. 둘이 너무 잘 어울려. 아니다, 생각해보니까 세정이 네가 아까워. 근데…….”
언제나처럼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치던 민혜가 뭔가 마음에 걸린 듯 고개를 갸웃했다.
“옆에 있던 여자는 누구래? 처음 봤을 때 다정해 보여서 둘이 사귀는 사인 줄 알았어.”
순간, 운전대를 잡은 세정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생각해보니 신경이 쓰이는 여자였다.
세정은 문득 자신이 아는 척하기 전에 그 여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던 도혁의 얼굴이 생각났다.
‘나랑 얘기할 때는 한 번도 웃어주지 않았는데…….’
얼핏 본 그 여자는 자신보다 뭐 하나 나아 보이는 것 없는, 지극히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세정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흥. 신경 쓸 것 없어. 같이 일하니까 편해서 웃어줄 수도 있지.’
세정은 찜찜한 느낌을 지우려 더욱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냥 회사 직원이야. 같이 출장 가는 중이래.”
“아, 그렇구나. 난 또.”
“얘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니?”
“미안, 미안. 너랑 결혼할 사람인데 실례였네.”
민혜가 세연의 눈치를 살피며 멋쩍게 웃었다.
“세정아, 결혼식은 언제쯤이야?”
“아직 정해지진 않았는데, 아마도 내년 봄이 지나기 전?”
실제로 어른들 사이에서 오가는 이야기로, 세정이 없는 말을 지어낸 것은 아니었다.
“어머, 너무 좋겠다! 내가 들러리 설게.”
“응. 그러든지.”
세정은 저를 바라보던 도혁의 차가운 눈빛을 상기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옆에 누가 있든 상관없어. 어차피 차도혁은 내 것이 될 테니까. 두고 봐!’
운전대를 잡은 세정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 * *
오후 3시 반경, 도혁과 재인은 목적지인 고흥의 납품공장 앞에 도착했다.
‘해풍수산’이라는 간판이 붙은 커다란 공장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해풍수산은 고흥에서 가장 규모가 큰 수산물 가공공장이었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 앞에 한 젊은 여자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혹시 서재인 씨세요?”
“네. 제가 서재인인데…… 해풍수산 분이세요?”
여자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서 주임님 안녕하세요! 전화 통화했던 임혜주예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 임 대리님, 안녕하세요. 드디어 직접 뵙네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혜주는 재인의 옆에 있는 도혁을 슬쩍 쳐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은 누구세요?”
“저희 부서 팀장님이세요. 같이 오기로 했던 직원이 사정이 생겨서 대신 오셨어요.”
“그러시군요. 안녕하세요.”
도혁에게 인사하는 혜주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도혁은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차도혁입니다.”
“아, 네. 차도혁 팀장님…….”
순간, 그의 이름을 곱씹는 혜주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설마, 팀장님한테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거야?’
찜찜한 기분이 밀려드는 재인이었다.
도혁은 철저한 비즈니스 모드로 주변을 탐색했다.
“규모가 꽤 크군요.”
“사무실과 생산라인, 저장창고 총 3개 동으로 나뉘어 있어요. 다 둘러보시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일단 사무실로 들어가시죠.”
혜주는 5층 사무실 건물 맨 위층에 있는 사장실로 그들을 데려갔다.
“이거 이거,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가 사장인 임만수입니다.”
풍채 좋은 노인이 반갑게 맞이했다.
통성명하고 자리에 앉자 임 사장이 혜주를 가리키며 말했다.
“얘가 제 손녀인데 오늘 안내를 같이 도울 겁니다. 혜주야, 실수 없이 잘해야 한다.”
그 말에 혜주가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도 참, 준비 잘해놨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도혁이 예의 바르게 인사하자, 임 사장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이렇게 젊은데 벌써 팀장이라니 대단하십니다.”
“아닙니다.”
“근데 결혼은 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