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팀장님과 1박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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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팀장님과 1박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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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팀장님과 1박 2일
2022.12.03.
“휴우우우우우.”
지하철 공중전화 앞에 선 재인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손가락을 공중전화 버튼 위에 대고 있으면서도 선뜻 누를 수가 없었다.
‘쓸데없는 TMI라고 생각했던 팀장님 전화번호를 손수 누르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인생 참,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네.
어젯밤 퇴근한 도혁과 마주쳤을 때, 껄끄러운 상황을 피하려고 일부러 요란하게 출장 준비를 한 재인이었다.
그런데 출장을 가기도 전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다니.
일에 있어서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도혁이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할지 눈앞에 선했다.
그렇다고 시간을 더 지체할 수도 없는 노릇.
재인은 마지못해 도혁의 번호를 꾹꾹 눌렀다.
Rrrrrrr.
수화기에서 연결음이 울리자마자, 도혁의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서 주임?
“어? 전 줄 어떻게 아셨어요?”
다짜고짜 자신을 부르자 재인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왜 이제야 전화해! 어디야?
“아우, 깜짝이야! 왜 갑자기 큰소리로 그러세요?”
―걱정했잖아! 연락이 안 돼서…….
“네?”
그런 거였어?
얼떨떨한 재인의 귓가에 한결 가라앉은 도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휴대전화 잃어버렸다며. 조금 전에 택시 기사님이랑 통화했어. 이미 멀리 가셨다고 해서, 휴대전화는 오후에 김 실장님이 퀵으로 받아주기로 했고.
“정말요? 감사합니다! 괜히 김 실장님께 폐를 끼쳐 죄송하네요.”
잠깐. 근데 팀장님, 내가 휴대전화 잃어버린 걸 어떻게 아셨지?
―지금 어디야? 나 지금 AT백화점 앞인데.
“네? 팀장님이 거긴 왜요?”
―일단 만나서 얘기하지.
뚜-. 뚜-.
전화가 끊겼는데도 재인은 수화기를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야?
.
.
.
잠시 후, 도혁과 재인은 AT백화점 앞에서 마주 보고 섰다.
“그러니까, 연지 씨가 나오다 사고가 생겼다고요?”
“응.”
맙소사! 걱정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지다니.
재인은 간이 철렁했다.
“연지 씨는 괜찮대요?”
“어. 가벼운 접촉사고라 멀쩡한데 상대가 잡고 늘어지나 봐. 병원에서 이것저것 검사도 해야 해서 출장은 못 갈 것 같다더군. 서재인 씨한테 아무리 연락해도 답이 없다고 나한테 연락을 한 거였어.”
“죄송합니다. 그래도 안 다쳤다니 다행이네요. 잘 해결돼야 할 텐데…….”
“보험사 불렀다고 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
“네…….”
“자, 그럼 가지.”
도혁이 앞장서며 말했다.
재인은 영문을 몰라 도혁을 쳐다봤다.
“네? 어딜요?”
“출장. 안 갈 건가?”
도혁이 무심한 눈으로 백화점 앞에 세워둔 차를 가리켰다.
히익!
재인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팀장님 피해 보겠다고 가는 출장을, 바로 그 팀장님이랑 같이 가야 한다고? 그것도 1박 2일을?’
안 돼!
재인은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팀장님, 괜찮아요! 저 혼자 다녀올 수 있어요.”
“차가 없잖아?”
“기차 타고 가죠, 뭐. 어차피 미팅이 4시라 아직 여유 있어요.”
“연락은 어떻게 하려고?”
“공중전화가 은근히 곳곳에 있어요. 전화번호는 내려가서 회사 전화로 강 대리님한테 물어보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필사적으로 마다하는 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혁이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렸다.
“서재인 씨,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네? 아, 그게…….”
머릿속에서는 이미 몹쓸 망상이 시작됐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재인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내가 서재인 씨와 단둘이 출장을 가고 싶어서 억지로 밀어붙인다고 생각하는 거야? 가서 내가 뭘 어떻게 할까 봐 걱정돼서 그래?”
바로 그거!
속 시원하게 제대로 맞췄네요!
재인은 놀란 토끼 눈으로 도혁을 바라봤다.
아니에요?
도혁이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내친김에,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무슨 수를 써서든 서재인 씨를 유혹해서 하룻밤을 보내려고 한다고 하지 그래?”
거기까지는 생각 안 했는데?
전혀!
도혁의 입에서 ‘유혹’과 ‘하룻밤’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가 튀어나오자 재인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쿵쾅쿵쾅.
쿵쾅쿵쾅.
“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세요!”
“서재인 씨가 듣고 싶었던 답이 이거 아닌가?”
“아니거든요! 장난 좀 그만 치세요.”
도혁은 그새 새빨갛게 달아오른 재인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었다.
“서재인 씨가 이렇게 공사 구분을 못 하는 사람인 줄은 몰랐군.”
“……!”
적반하장이 따로 없네.
엊그제 밤, 이제 참지 않겠다고 말했던 분이 누구시더라?
재인은 기가 막혀 입이 떡 벌어졌다.
그 순간 도혁의 눈빛이 날카롭게 돌변했다.
“서재인 씨, 우리 지금 일하러 가는 거야. 나는 일적으로 서재인 씨가 못 미더워서 따라가는 것뿐이고.”
“아……!”
“출장 가기 전에도 이런데, 혼자 보내놓고 내가 마음을 놓을 수 있겠어?”
“죄, 죄송합니다.”
도혁의 마지막 말이 재인의 정곡을 찔렀다.
일에 있어서는 집요할 정도로 철저한 도혁이니 불안할 만도 했다.
나름대로 일을 잘한다고 자부해온 재인이었는데, 오늘 아침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그동안 쌓아왔던 이미지에 먹칠을 해버렸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재인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사이 도혁은 차로 성큼성큼 걸어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마치 고급 외제차 광고의 한 장면처럼 문에 팔을 걸치고 도혁이 말했다.
“타지?”
“……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재인의 얼굴에 시커먼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동시에 아주 길고 긴 출장이 될 것 같은 무서운 예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 * *
탁. 탁.
도혁의 귓가에 규칙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억지로 자는 척하는 티가 팍팍 났던 재인이 그새 잠이 들었는지 꾸벅꾸벅 창문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도혁은 핸들을 돌려 고속도로 휴게소에 차를 멈췄다.
‘아주 곤히 잠들었군.’
도혁은 피식 웃으며 손을 뻗어 재인의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그녀의 머리가 살포시 내려앉자 도혁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달콤하면서도 상큼한 향기가 폐부 깊숙한 곳까지 닿았다.
고개가 절로 숙여진 도혁은 살며시 재인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쌔근쌔근.
뒤이어 규칙적인 가냘픈 숨소리가 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도혁은 들끓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입술을 지그시 감쳐물었다.
띠링.
별안간 메시지 알림음이 차 안의 정적을 깼다.
도혁은 행여 재인이 깰까 봐 황급히 진동으로 바꾸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팀장님, 잘 내려가고 계세요? 대신 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연지였다.
[괜찮아. 사고는 잘 수습됐어?]
[사고는 무슨.]
뒤이어 메롱, 하는 토끼 이모티콘이 날아왔다.
‘뭐야?’
도혁의 눈썹이 움찔했다.
[오빠, 내가 좋은 기회 만들어줬으니까 나중에 한턱 크게 내.]
[너 그럼 사고 난 게 아니었어?]
[당연하지. 이래 봬도 무사고 운전 3년인데.]
도혁은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어제 두 사람 꼭 싸운 것처럼 분위기가 안 좋길래 내가 좀 나섰지. 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번엔 재인 언니랑 잘 좀 해봐.]
[시끄러워.]
[속으로는 고마우면서 퉁명스럽긴. 암튼 로맨틱한 시간 보내세요.]
도혁은 연지가 제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본 것 같아 뜨끔했다.
[놀러 온 거 아니다.]
[네, 네, 그러시겠죠. 오빠가 알아서 잘하리라 믿어.]
[신경 꺼.]
낯이 뜨거워진 도혁은 휴대전화를 뒤집어 앞쪽에 놓았다.
드르륵. 드르륵.
연지가 할 말이 남았는지 계속 진동이 울려댔다.
‘연지가 등을 떠민 거였다니.’
괜스레 진땀이 흐르는 도혁이었다.
‘정신 차려! 출장을 왔으니 일단 일에 집중하자.’
도혁은 시계를 확인하고 조심스레 재인을 흔들어 깨웠다.
“서재인 씨, 일어나 봐.”
“……으음.”
“마지막 휴게소야. 도착해서 점심 먹을 시간 없으니까 지금 뭐라도 먹어둬야 해.”
“네? 아…….”
그제야 부스스 눈을 뜬 재인은 도혁의 어깨를 베개 삼아 아주 편안하게 잠들었음을 깨달았다.
“어머, 죄송합니다!”
분명히 반대쪽을 보고 있었는데 언제 넘어갔지?
재인은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잔뜩 낀 먹구름이 햇볕을 가린 탓인지 귀가 아릴 정도로 추운 겨울날이었다.
휴게소로 들어간 두 사람은 몸도 녹일 겸 따뜻한 국밥을 먹었다.
도혁이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사이, 재인이 후식으로 먹을 호두과자 사 왔다.
재인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호두과자를 들여다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호두과자는 역시 휴게소에서 파는 따끈따끈한 호두과자가 최고예요.”
“그렇게 맛있어?”
도혁은 부드러운 눈길로 재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요. 팀장님, 설마…… 한 번도 안 드셔보셨어요?”
“단 거 별로 안 좋아해.”
“진짜 맛있는데. 식기 전에 드셔보세요.”
재인이 봉지를 내밀자, 도혁은 씩 웃으며 호두과자를 집어 입에 넣었다.
그 순간 놀랍게도 재인의 눈에는,
도혁의 눈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것부터, 입꼬리가 올라가고 붉은 입술이 벌어졌다 닫히면서 볼을 오물거리는 것까지, 모든 일련의 과정이 슬로모션으로 보이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심지어 몸 주위에 후광까지.
재인은 홀린 듯 도혁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서재인, 벌써 몇 번째니? 진짜 안과 가봐야겠다.’
“서재인 씨?”
“네?”
재인은 자기 이름을 부르는 도혁의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내 얼굴에 뭐 묻었나?”
“아! 죄송해요, 쳐다봐서.”
재인은 말을 뱉자마자 화들짝 놀라 입을 막았다.
자기 입으로 쳐다봤다고 이실직고해버리다니.
손 쓸 새도 없이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른 재인은 푹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도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죄송할 건 없고. 마음껏 해.”
“뭐, 뭘요?”
“내 얼굴 마음껏 쳐다봐도 된다고. 자주 넋이 나가는 걸 보니 서재인 씨 취향인 것 같은데.”
“……!”
“뭐, 본다고 닿는 것도 아니니까. 잘생긴 게 죄지.”
재인은 제 귀를 의심했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갈수록 능청스럽게 구는 도혁 때문에 재인은 할 말을 잃었다.
잘도 자기 입으로 그런 손발 오그라드는 말을 하다니!
하나하나 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버린 재인을 보고 도혁이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정곡을 찌른 모양이군.”
“아, 아니거든요! 팀장님, 자기 입으로 그런 말하면 민망하지 않으세요?”
“전혀.”
괜한 걸 물었다. 상대가 차도혁인데.
그것도 본인이 잘생긴 걸 너무 잘 알고 있는 차도혁이다.
‘누굴 탓해. 쳐다본 내가 잘못이지.’
지금 이 순간 민망해하는 건 재인뿐이었다.
“팀장님,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전 먼저 갑니다.”
재인은 재빠르게 도혁을 지나쳐 앞서 나갔다.
뒤쪽에서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가 날아와 그녀의 뒤통수를 때렸다.
“마음껏 보라니까.”
“됐습니다!”
“사양하지 말고.”
“됐다니까요!”
도혁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연신 쿡쿡 웃어댔다.
덕분에 무안해진 재인이 얼굴을 붉히며 걸음을 재촉할 때였다.
누군가 도혁의 이름을 부르며 가까이 다가왔다.
“혹시…… 차도혁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