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그 출장, 제가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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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그 출장, 제가 가겠습니다!
2022.11.29.
“뭐, 뭐요?”
성준은 움찔하며 손을 내렸다.
뭐지, 이 여자?
“포옹? 키스? 아니면 그 이상?”
유라가 정말 궁금하다는 듯 눈을 깜박이며 덧붙였다.
“제가 의외로 보수적이라 사귀기 전엔 스킨십 금지인데. 그럼 오늘부터 1일?”
“1일?”
“배도 고픈데 일단 먹으면서 천천히 얘기해볼까요? 아,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오빠?”
유라가 성준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씩 웃었다.
성준은 너무 황당한 나머지 헛웃음이 나왔다.
“이봐요, 최유라 씨! 나 서른다섯이나 됐는데 백수예요. 오늘 아르바이트 면접에서도 나이 때문에 잘렸다고.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사람이란 말이야.”
아르바이트도 떨어지는 한심한 인간이라고 비웃겠지?
그런데 웬걸.
성준의 예상과 달리 유라는 그의 팔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아, 그러셨구나. 기운 빠졌을 텐데 어서 밥부터 먹자고요. 잘 먹어야 힘내서 일도 구하죠.”
뭐야? 이런 경우 보통 여자라면 도망을 가지 않나?
아니지, 아예 백수라는 걸 처음 안 시점에 관심을 딱 끊어서 여기까지 올 일도 없지.
“나 이제 돈도 다 떨어져서 사채라도 알아봐야 하나 고민 중이라고요.”
“어머, 그래도 아직 빚은 없으시구나. 다행이다.”
“다행?”
너무나도 태연한 유라의 태도에 성준은 말문이 막혔다.
밀어내면 밀어낼수록 그녀에게 말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이 여자, 강적이다.
* * *
이튿날 화요일 오후.
상품기획 1팀 회의실은 오랜만에 살벌한 분위기를 띠었다.
그 한가운데 도혁이 심기 불편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도혁은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뒤적거리며 냉랭하게 말했다.
“박 과장님, 이거 수정본 맞습니까?”
“네, 맞는데요…….”
여유롭게 믹스커피를 홀짝거리던 박 과장이 움찔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간편식 경쟁사 제품 비교분석 자료가 두루뭉술하잖아요. 오늘까지 수정하세요.”
“그렇게 빨리요?”
“원래 어제까지 아니었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박 과장이 기운 쪽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백만 년 만에 박 과장님 야근 확정!
늘 미꾸라지처럼 쏙쏙 빠져나갔던 박 과장이었기, 재인은 조금 고소했다.
그나저나 살벌하네.
어제 회의 때는 안 어울리게 한없이 관대하더니.
‘설마 어젯밤 있었던 일 때문에?’
마늘이 깽판 친 키스 불발 사건.
어젯밤에도 잠을 설친 재인은 오늘도 아침 일찍 집에서 나와 온종일 도혁을 피해 다녔다.
도혁과의 아슬아슬했던 순간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져서.
와락 저를 끌어당기던 단단한 팔과 가슴.
촉촉하게 젖어서 더 빨려 들어갈 것 같았던 우수 어린 눈동자.
살포시 열린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나직한 목소리.
「이제 참는 거 그만하려고. 갑갑해서 미칠 것 같거든.」
그 녹아버릴 것 같은 열기에 휩쓸려 하마터면 그대로 도혁을 받아들일 뻔했다.
모른 척하자고 다짐해놓고도 그의 달콤한 입술에 다시 한번 닿아보고 싶어서.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부끄러워서 밤새 얼마나 많은 이불킥을 했던가.
재인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느라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이 정도면 중증인데…… 진짜 욕구불만인가?’
27년 동안 고이 잠자고 있던 욕구가 왜 굳이 요즘,
그것도 하필이면 차도혁한테만,
샘솟듯 솟아오르는 건지.
‘팀장님 외모가 지나치게 훌륭해서 그런가?’
그럴지도.
탄탄한 몸에 착 감긴 감색 슈트 차림의 도혁은 오늘따라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멋있었다.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린 표정조차 살며시 어루만져 주고픈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미쳤어! 미쳤어! 서재인, 어쩌려고 그래!’
당장 오늘 밤, 도혁과 단둘이 있는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할지 고민이었다.
팀장님이 또 어젯밤처럼 밀고 들어온다면?
오싹.
재인은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 것 같은 강렬한 예감 때문에.
“서 주임?”
“네?”
넋이 나가 있던 재인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도혁이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올린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 주임, 다이어트 간편식 샘플 제작은 잘 진행되고 있습니까?”
“아, 네. 다음 주쯤에는 1차 샘플을 받아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재인이 기획하고 있는 다이어트 간편식은 고객의 설문조사를 통해 선정된 버섯, 해초, 닭가슴살, 곤약, 토마토, 총 다섯 가지 식재료를 주제로 각각의 샘플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정확히 언제?”
“아마도…… 수요일쯤?”
“일정 정확히 확인해서 보고하세요. 오늘.”
“네, 알겠습니다.”
식은땀을 닦는 재인을 무심히 쳐다보던 도혁은 옆에 앉은 규민에게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한 과장, 식자재 협력업체 선정은 다 끝난 겁니까?”
“아직 해초가 남았는데요, 완도와 고흥 중에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납품업체 공장들 직접 확인해봐야 하지 않습니까? 제품 품질도 비교해봐야 하고.”
“그래서 다음 주 화요일에 미팅 잡아놨습니다.”
“다음 주 화요일?”
도혁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그럼 너무 늦습니다. 조율할 것도 많고, 곧 연말이라 납품업체 상황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 빨리 다녀오세요. 내일.”
“내일이요? 이번 주는 다른 미팅이 전부 잡혀 있어서 힘들 것 같은데요. 예정대로 다음 주에…….”
규민이 난감해하던 그때, 갑자기 옆에 앉은 재인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 출장, 제가 대신 가겠습니다!”
당차게 외친 재인의 얼굴에는 보기 드문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장거리 출장이 뭐가 좋다고?
신이 난 듯한 재인의 모습에 팀원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도혁은 재인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다 규민에게 물었다.
“한 과장, 괜찮겠습니까?”
“아……, 네. 서 주임의 판단력이라면 믿을 만하니까요.”
갑작스러운 돌발 상황에 규민은 머릿속이 복잡한 것 같았다.
“그럼, 내일 출장은 서 주임이 다녀와요.”
“네, 알겠습니다!”
재인의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당장 오늘 밤이 두려운 그녀에게 있어, 출장은 도혁과 공식적으로 떨어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단비 같은 시간이기도 하고.
‘이제 좀 숨통이 트이겠구나. 잘됐어. 바닷바람 쐬면서 머리나 좀 식히자.’
정말이지, 요 며칠 머릿속에 차도혁이 한가득이라 너무 피곤했다.
재인이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데, 연지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저, 팀장님! 제가 같이 가서 서 주임님 서포트해도 될까요?”
“이연지 씨가?”
도혁은 의외라는 눈빛으로 연지를 바라보았다.
“고흥 들렀다 완도로 넘어가려면 1박 2일 코스인데, 서 주임님 혼자서 운전하기 힘들잖아요. 그리고, 납품공장도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보는 게 좋죠.”
“흠. 그럼 그렇게 해요.”
“감사합니다!”
연지가 재인을 향해 눈을 찡긋했다.
‘운전 생각을 못 했네. 공장 둘러볼 때도 연지 씨가 있으면 큰 도움이 될 거야.’
재인은 자신을 챙겨주는 연지가 새삼 고마웠다.
마음 맞는 연지와 함께라면 장거리라도 여행 가는 기분으로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그럼 다들 바쁠 테니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치도록 하죠.”
마무리 인사를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도혁을 박 과장이 붙잡았다.
“팀장님, 곧 연말인데 송년회는 어떻게 할까요?”
“송년회요?”
도혁이 무심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의미로 단합대회 한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흠.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떨떠름한 반응으로 보아, 도혁에게는 송년회를 해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던 게 분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공짜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박 과장은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팀장님, 뭐니 뭐니 해도 회식에는 술과 고기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회에 소주는 어떠십니까?”
“어머, 박 과장님. 팀장님 술 못 드시잖아요. 지난 회식 때도 한 방울도 안 드셨어요.”
나 잘했지? 하는 표정으로 나희가 도혁에게 눈웃음을 쳤다.
재인은 그런 나희를 보며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방 안에 술 창고를 갖고 있는데, 무슨. 일부러 안 마신 거였지. 마시면 참기 힘들 것 같다고.’
재인은 입이 간질간질하다, 한 박자 늦게 흠칫 놀랐다.
‘……아!’
제 볼에 꽂히는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설마 설마 하며 고개를 돌린 재인은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다.
도혁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어서.
순간, 도혁의 얼굴 위로 지난밤 그윽한 눈빛으로 다가오던 도혁의 얼굴이 겹쳐졌다.
흡!
숨이 턱 막힌 재인은 화악 붉어진 얼굴을 들킬까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요샌 회식 때 간단히 식사하고, 레크리에이션이나 운동 같은 단체 활동을 하는 데가 많대요. 저희도 이번엔 그렇게 하는 게 어때요?”
때마침 연지가 건전한 회식 문화를 제안했다.
그러자 박 과장이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나 참, 기가 막혀서. 송년회는 술이지, 술! 안 그래, 서 주임?”
“아…….”
박 과장의 구원 요청에 재인은 말문이 턱 막혔다.
박 과장의 입에서 ‘술’이란 단어가 나올 때마다 도혁의 눈썹이 움찔거려서.
점점 더 깊어지는 미간의 주름까지도.
아마도 어젯밤 재인이 벌인 아무말대잔치 때문이리라.
‘팀장님, 화나셨나? 술주정뱅이급으로 몰아세웠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아무리 급했어도 치매 얘긴 하지 말걸.
재인은 도혁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답했다.
“저, 저도 요새 컨디션이 별로라 술은 좀…….”
“서 주임까지 왜 그래? 송년회에 술이 없다는 게 말이 돼?”
“박 과장님.”
잠자코 듣고만 있던 도혁이 싸늘하게 말했다.
“술 얘기 좀 그만하시죠. 몹시 듣기 불편한데.”
말은 박 과장에게 했지만, 도혁의 시선은 재인에게 꽂힌 채였다.
뜨끔.
저 찔리라고 하는 말인 줄 너무나도 잘 아는 재인은 그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우리 팀장님, 화 많이 나셨구나.
졸지에 술에 환장한 사람처럼 되어버린 박 과장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아니, 저는 그냥…….”
재인은 그런 박 과장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다.
‘죄송해요. 다 제 탓입니다.’
* * *
수요일 이른 아침.
재인은 굳게 닫힌 AT백화점 정문 앞에서 오들오들 떨며 연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렌트카를 빌리려 했는데, 연지가 자가용을 가져온다고 해서 중간 지점인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지금 시간은 8시 20분.
약속한 8시를 훌쩍 넘겼는데도 연지는 감감무소식이었다.
‘연지 씨가 늦을 사람이 아닌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재인은 연지에게 사고가 난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휘잉. 휘이잉.
오늘따라 겨울바람이 유난히도 매서웠다.
그런데도 길이 엇갈릴까 봐 따뜻한 곳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재인이었다.
‘으으으, 추워! 이러다 얼어 죽겠네. 휴대전화만 있었어도!’
하필이면 출장을 가는 오늘 아침, 재인은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
약속 시간에 늦을까 봐 큰맘 먹고 택시를 탄 게 화근이었다.
깜박 졸다 도착했다는 기사의 말에 허겁지겁 내리고 보니 뭔가 허전했다.
휴대전화가 없다는 걸 자각한 건 이미 택시가 자취를 감춘 뒤였다.
무려 25분이나 먼저 도착한 보람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어렵사리 공중전화를 찾아 전화를 걸었지만, 진동으로 해둔 탓인지 계속 연결이 되지 않았다.
휴대전화가 없으니 연락처를 외우지 못한 연지에게 연락할 방법도 없는 상황.
혹시나 해서 회사에 걸어봤지만, 역시나 출근 시간 전이라 아무도 없었다.
재인은 할 수 없이 급한 대로 분실 신고만 하고 약속 장소로 돌아와 30분 가까이 덜덜 떨고 있는 것이었다.
‘휴우, 연지 씨까지 늦을 줄은 몰랐지. 오늘 일진 정말 사납네. 몸조심해야겠어.’
곧이어 재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하나.
‘역시…… 그 방법밖에 없겠지? 연지 씨를 무작정 기다릴 수 없으니까.’
사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린 시점부터 줄곧 재인의 머릿속에 동동 떠다니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차마 누르지 못한 도혁의 전화번호 숫자 열한 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