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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다시 한번 닿고 싶어 (51/129)


51화. 다시 한번 닿고 싶어
2022.11.26.


재인은 도혁의 뜨거운 눈길을 피하려 눈을 내리깔았다.

가슴이 타들어 가는 듯한 열기에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솟구치는 충동을 억눌러 보려고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허나 그 노력이 무색하게 재인의 머릿속에서 온갖 상념이 날뛰기 시작했다.


‘못 이기는 척 다시 한번 닿아보고 싶어.’

‘미쳤어? 상대는 팀장님이잖아.’

‘그게 뭐?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해.’

‘정신 차려! 괴팍하고 제멋대로인 차도혁이라고!’

‘멋진 남자랑 키스하는 거 꿈꿨었잖아. 기회가 왔는데 뭘 망설여?’

‘이번에는 분명 닿는 데서 끝나지 않을 텐데?’

‘맞아, 영화나 드라마에서 봤던 것처럼 아주 찌이인할 거야. 감당할 수 있겠어?’

그 순간, 전기에 감전된 듯한 찌릿한 충격에 재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떠오른 생각 하나.


‘아, 저녁 먹고 이 안 닦았는데!’

도혁과 그 난리를 치르느라 씻을 겨를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저녁 메뉴는 민우와 서연이 좋아하는 메기매운탕이었다.

그것도 다진 마늘이 잔뜩 들어간.

하필이면.

어제 어이없게 첫 키스를 날려버리긴 했지만, 엄연히 말해 그건 사고였다.

아직 재인에게는 로맨틱하고 완벽한 첫 키스에 대한 로망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제대로 된 첫 키스를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이 순간, 마늘 냄새 따위를 신경 써야 하다니.


‘이건 아니야! 평생 흑역사로 남게 될 거야!’

재인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는 사이, 도혁은 재인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도혁이 내뿜는 거친 숨결이 그녀의 얼굴에 훅 끼쳤다.


‘꺄아아아악!’

사색이 된 재인은 다급히 손으로 도혁의 입술을 가로막으며 소리쳤다.


“팀장님! 잠시만요!”

응?

반쯤 감겨 있던 도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뒤로 밀려난 그가 못마땅한 눈빛으로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다.

재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마, 많이 취, 취하신 것 같아요.”

“전혀.”

도혁이 재인의 팔목을 스윽 끌어 내리며 받아쳤다.

그러고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목적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팀장님, 안 돼요!”

재인이 이번에는 두 팔로 그의 가슴을 막아 세웠다.

도혁이 움찔,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마저도 미치도록 섹시한 잘생긴 얼굴, 그러나 그 위로 몹쓸 마늘이 동동 떠다녔다.

아우우우우우!

창피함에 몸서리치던 재인은 눈을 질끈 감으며 생각했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나?’

모르는 척.

재인은 아쉬움을 꿀꺽 삼키며 아무말대잔치를 시작했다.


“팀장님, 이러시면 말짱 도루묵이잖아요! 술 마시면 못 참을 것 같아서 지금까지 힘들게 끊으셨다면서요.”

“도루묵? 술?”

도혁이 황당한 얼굴로 재인을 쳐다봤다.


“팀장님, 혹시 스트레스 때문에 술을 못 참을 정도로 드신 거예요? 하긴, 그렇게 일만 하시니…….”

“……저기, 서재인 씨……?”

이미 술로 몰아가기로 작정한 재인이었다.

도혁이 말할 틈을 눈곱만큼도 주지 않고 속사포처럼 엉뚱한 말을 쏟아냈다.


“그래도 건강 생각해서 적당히 드셨어야죠. 술 많이 마시면 치매 위험이 얼마나 높아지는 줄 아세요?”

마주한 도혁의 눈빛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괜찮아요. 팀장님도 사람인데 잠깐 흔들릴 수도 있죠. 이제 그만 드세요.”

도혁이 기가 막혀 주춤하는 사이, 재인은 잽싸게 몸을 숙여 그의 팔 밑으로 빠져나왔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시계를 보며 말했다.


“어머, 벌써 시간이 12시가 넘었네요? 팀장님, 저 나간 뒤에 다시 술 드시면 안 돼요. 아셨죠?”

“…….”

“잘 참으실 거라 믿어요. 지나친 술은 건강의 적이라는 거 꼭 기억하시고요. 그럼, 피곤하실 텐데 어서 주무세요. 내일 뵙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재인은 쏜살같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에도 도혁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만 황망히 쳐다보고 있을 뿐.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돌처럼 굳어 있던 도혁이 부글부글 끓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재인, 멀쩡한 사람을 잘도 알코올중독자 취급했겠다?”

날 뭘로 보고!

도혁의 미간이 마구 구겨졌다.

그저 조금 더 재인과 같이 있고 싶어서 스파이라고 핑계 대며 붙잡았던 건데.

어제의 입맞춤은 둘째치고라도, 요즘 자신을 대하는 재인의 태도가 이전과 판이하게 달랐다.

특히 오늘은 자꾸 흘낏 쳐다보고,

얼굴이 빨개지고,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급기야 한밤중에 욕실에 숨어들기까지.

술도 한잔 기울이고 분위기도 잡혔겠다,

도혁은 오늘이야말로 서로의 솔직한 마음을 드러내고 가까워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그런데 이렇게 어이없게 끝나버리다니?


“치매 위험이 높다고? 하!”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더욱 기가 막혔다.

그 분위기에서 어떻게 그런 쪽으로 생각이 흐를 수 있는 건지.

허탈하게 웃던 도혁은 조금 전 자신을 막아 세우던 재인의 모습을 되살렸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

떨리는 목소리,

흔들리는 눈동자…….


‘잠깐만. 누가 봐도 이건…… 다 알면서 일부러 모르는 척한 거잖아?’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 한 마디 못 하고 당했다.

도혁의 눈동자가 화르륵 불타올랐다.


“서재인, 잘도 도망을 쳤겠다!”

으으으으아아아아아!

코앞에서 재인을 놓친 도혁은 아쉬움이 가득 담긴 길고 긴 탄식을 내뱉었다.

광야에서 포효하는 한 마리 외로운 늑대처럼.


 

* * *

한편, 같은 날 저녁.

지친 월요일을 끝내고 퇴근한 성준은 옥탑방 문 앞에 놓인 상자를 확인하고 미간을 좁혔다.

‘서재인’ 앞으로 온 택배였다.


‘또야? 벌써 몇 개째인지…….’

한쪽 벽에 이미 재인이 잘못 보낸 택배 두 개가 쌓여 있었다.

휴. 짧게 한숨을 쉰 성준은 새로 온 택배를 그 위에 올려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빈집이라 아무 생각 없이 왔는데, 이런 어처구니없는 문제와 맞닥뜨릴 줄이야.

성준은 샤워를 하면서 택배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심했다.


‘여태 찾아가지 않은 걸 보면 아직 서재인 씨가 잘못 보낸 걸 모르는 것 같은데. 이거, 직접 가져다줄 수도 없고…….’

지난 주말, 혹시라도 재인이 택배를 찾으러 올까 봐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이 돼서야 옥탑방으로 돌아왔던 성준이었다.

재인을 옥탑방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도혁과 얽혀 있는 걸 바로 눈치챌 테고, 그럼 한바탕 난리가 날 테니까.

생각만으로도 피곤해졌다.


‘설마 또 그때 왔던 친구가 대신 가지러 오는 건 아니겠지?’

백수를 가장한 성준에게 첫눈에 반했다던 독특한 취향의 소유자, 최유라가.

머리를 감고 있던 성준은 그대로 돌부처처럼 굳어버렸다.

풉! 풉!

딱 벌어진 입안으로 거품이 흘러들어와 다급히 입을 헹궜다.


‘이 집을 떠나는 것밖에 방법이 없나?’

불안해서 못 살겠네.

다시 집으로 들어가, 손자를 내놓으라는 어머니의 잔소리에 시달릴 생각을 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준이 진지하게 이사를 고민하던 그때였다.


“지훈 씨, 안에 계세요?”

지훈이가 누구야?

아!

뒤늦게 성준은 지난번 유라가 이름을 캐물었을 때, ‘성지훈’이라고 답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다면 밖에 있는 사람은?

고작 두 번 만났을 뿐인데 너무나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여자.

최유라가 분명했다.

귀신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기겁한 성준은 정신없이 후다닥 샤워를 끝냈다.

그러고는 혹시나 해서 놔둔 낡아빠진 초록색 트레이닝복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당연히 앞머리는 덥수룩하게 내리고.

현관문을 여니 유라가 생긋 웃으며 성준을 맞이했다.


“어머, 지훈 씨 안에 계셨네요? 잘 지내셨죠?”

“아아. 댁이었어? 또 친구 대신 택배 찾으러 온 거요?”

성준이 퉁명스럽게 받아치는데도 유라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네, 그렇게 됐어요.”

“대체 그 친구는 정신을 어따 팔았답니까? 몇 번이나 같은 실수를 하고 말이야.”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뭐. 저야 너무 고맙지만.”

사심을 숨기지 않는 유라였다.

역시 특이해.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성준에게 유라가 초록색 아이스박스를 내밀었다.


“지훈 씨, 이거요.”

“버릴 거라 안 돌려줘도 된다니까.”

무심코 아이스박스를 받아 든 성준은 묵직함에 깜짝 놀랐다.


“어?”

바닥에 내려놓고 안을 살펴보니 꽃등심과 삼겹살, 야채, 각종 과일과 캔맥주로 가득 차 있었다.

누가 보면 캠핑이라도 가는 줄 알겠네.


“대체 이게 뭐요?”

“그때, 넘어지려는 걸 성준 씨가 받쳐줘서 살았잖아요. 하마터면 뇌진탕 걸릴 뻔했는데 고마워서요.”

“됐어요. 마음만 받을 테니 다시 가져…….”

“지훈 씨, 저녁 아직이죠? 저도 안 먹었는데 같이 먹을까요?”

유라가 성준의 말을 싹둑 잘라먹으며 그에게 한발 다가갔다.

성준이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뒤따라 그를 엄습해오는 것이 있었다.

유라의 얼굴에 서려 있는 ‘반드시 같이 먹고 말겠다.’는 굳센 의지.

그리고, 억지로 유라의 등을 떠밀어 보낸다고 해도 다음에 또 찾아올 거라는 강렬한 예감이.


‘이대로는 안 되겠어. 더 세게 나가는 수밖에…….’

정말이지,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성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유라의 팔을 와락 끌어당겼다.


“어?”

문밖에 서 있던 유라의 몸이 휘청, 하며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성준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몸을 돌려 현관 벽에 몰아세웠다.

쌍꺼풀 없는 큰 눈이 성준을 올려다보았다.

성준은 일부러 건들거리며 빈정대는 말투로 물었다.


“최유라 씨, 나한테 관심 있어?”

“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조금은 당황할 줄 알았는데.

순간 말문이 막힌 성준에게 유라가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제 이름 기억하고 있었네요? 지훈 씨도 그동안 내 생각했었구나?”

당연히 했다. 인상이 좀 깊었어야지.

게다가, 사실 재인의 친구라는 것만 빼면 최유라는 객관적으로 꽤 괜찮은 여자였다.

시크하게 잘 어울리는 단발머리, 웃을 때 청량감마저 느껴지는 외꺼풀 눈과 붉은 입술의 기막힌 조화.

무엇보다 말이 잘 통했다.

여덟 살이나 차이 나다 보니 세대 차이가 느껴질 만도 한데, 문학, 예술, 사회 어떤 것을 화제로 삼더라도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유라의 성격 역시, 엄격한 스케줄에 맞춰 살아온 성준에게는 오히려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못 이기는 척 받아주고 싶을 만큼.


‘이럴 때가 아니잖아! 상대는 서재인 씨 친구라고!’

흠흠.

성준은 목을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난 당신한테 전혀 관심 없어. 그러니까 이만 돌아가.”

“처음이라 그럴 수 있죠. 좀 더 알면 빠져드실 걸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저 여유로움.

이 정도로는 안 되겠다 싶어, 성준은 더 세게 밀고 갔다.


“최유라 씨, 당신 지금 뭘 하려는 건지 알고 있어?”

“네?”

“겁도 없이 혼자 사는 남자 집에 들어오려는 거라고.”

 

 
성준이 손끝으로 유라의 턱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각오는 되어 있는 거야?”

“……!”

충격이 컸는지 유라의 입이 딱 벌어졌다.

훗. 효과가 있는 것 같군.

성준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한번 쐐기를 박았다.


“자, 알았으면 소꿉장난 그만하고 돌아…….”

“저기…….”

유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각오라면 구체적으로 어느 선까지를 말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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