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참기 힘들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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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참기 힘들 것 같아서
2022.11.22.
당황한 쪽은 재인이었다.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오히려 여유 만만한 도혁 때문에.
‘보통 이럴 땐 거짓말을 한 범인이 사색이 되어야 하지 않나?’
재인은 한 번 더 정곡을 찔러보기로 했다.
“그런데, 왜 오늘 저녁에 또 밖에서 씻으신 거예요?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요.”
“음. 이상하지.”
도혁은 마치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듯 태연했다.
‘뭐지? 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듯한 이 기분은? 분명 말도 잘 들어주고, 적극적으로 동의까지 해주는데? 뭔가, 갈수록 갑갑해지네.’
재인은 딴청 부리는 듯한 도혁의 태도에 약이 올랐다.
따지고 보면 모든 문제의 시작은 도혁이었으므로.
도혁이 어이없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면, 재인은 그의 방에 몰래 들어갈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을 테고, 그랬다면 지금쯤 편안하게 자고 있었을 테니까.
“팀장님, 뭔가 변명이라도 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변명?”
재인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도혁은 무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참 신기한 일이군. 서재인 씨가 만지니까 뜨거운 물이 나오네?”
“나 참, 그게 말이 돼요?”
재인은 기가 막혀서 콧방귀를 뀌었다.
“오늘 새벽에 혹시나 해서 틀어봤을 땐 온수가 나왔는데, 퇴근하고 돌아와 다시 틀어보니 안 나왔다면?”
“그걸 저보고 믿으라고요?”
재인은 도혁이 놀리는 것 같아 발끈했다.
“그러니까. 내가 무슨 변명을 해도 먹히지 않을 걸 아니까 아무 말도 안 한 거지.”
알겠어요, 그 입장은 알겠는데요.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팀장님, 혹시 들켜서 당황스럽진 않으세요?”
“전혀.”
“……!”
역시, 차도혁.
도혁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재인을 보며 씩 웃었다.
그러고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상체를 기울였다.
도혁은 재인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속삭였다.
“자, 이제 서재인 씨가 말해봐.”
“뭐, 뭘요?”
갑작스레 다가온 도혁 때문에 재인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내가 왜 그랬을까?”
“네? 그건…… 팀장님이 아시죠.”
“나보다 서재인 씨가 정답을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지.”
어서 말해봐,
라고 조르는 것처럼 도혁이 눈썹을 올렸다 내렸다.
재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그, 그게…….”
도혁이 궁지에 몰려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인데.
오히려 재인 자신이 궁지에 몰린 생쥐처럼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어떻게 얘기할 수 있겠는가.
도혁이 일부러 샤워 가운 차림으로 야릇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한 것 같은데, 제 추측이 맞냐고.
그게 맞으면 어쩔 건데?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서 도혁이 본격적으로 밀고 들어오면 어쩌려고?
‘서재인, 정신 차려! 팀장님 마음 모른 척하기로 했잖아.’
그 마음 받아줄 것도 아니면서 확인해서 뭘 어쩌겠다고.
재인은 마구 헝클어진 머릿속을 아예 덮어버리고, 차분히 호흡을 골랐다.
이 순간을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괜히 도혁을 더 자극할 것 같고.
차라리 차도혁이 노출증 환자라, 보여주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는 게 낫겠네.
아니, 그래도 그건 좀 아닌가?
그거야말로 진짜면 어쩌려고. 아무튼.
짧은 시간 동안 오만 생각이 오간 끝에 간신히 한 가지 방법이 툭 튀어나왔다.
재인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아, 팀장님 거실 욕실이 정말 쓰고 싶으셨군요. 말씀을 하시지. 거실 욕실이 크고 좋으니까 그럴 만도 하죠. 거울도 엄청 크고. 그거 말고 다른 이유가 또 뭐가 있겠어요.”
“……!”
“팀장님 댁인데 어디를 쓰시던 제가 상관할 바 아니죠. 괜한 궁금증이 발동해서 민폐를 끼쳤네요. 온수가 나오든 안 나오든, 그게 뭐 중요하다고. 아유, 죄송합니다. 하하하.”
재인의 답을 들은 도혁의 미간에 세로줄이 깊게 패었다.
말을 하는 그녀 자신도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는 걸.
하지만 아무말대잔치 말고는 둘러댈 말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재인은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곁눈질로 도혁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도혁이 인상을 찌푸리는가 싶더니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서재인 씨, 참 재밌어. 하하.”
도혁은 쿡쿡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이걸로 넘어간 건가? 팀장님 기분 좋아 보일 때 도망가야지.’
재인은 이때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했다.
“그럼, 밤도 늦었으니 저는 이만. 안녕히 주무세요.”
그러나.
황급히 몸을 돌려 나가려던 재인은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었다.
도혁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팔목을 와락 붙잡아서.
깜짝 놀라 돌아선 재인은 얄궂게 웃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도혁과 눈이 마주쳤다.
“티, 팀장님?”
“우리 할 말이 더 남았을 텐데?”
“……할 말이라니 무슨……?”
“일단 앉아서 얘기하지.”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재인은 할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잔할까? 목도 마를 텐데.”
재인은 눈이 번쩍 뜨였다.
도혁의 방에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감탄해 마지않았던 맥주 컬렉션이 눈에 어른거렸다.
어제부터 맥주 생각이 간절했던 재인이었다.
어차피 도망가긴 글렀고.
“그, 그럼 맥주 한 병만?”
잠시 후.
재인은 목구멍을 타고 시원하게 내려가는 기분 좋은 청량감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벌써 세 병째였다.
테이블 위에는 도혁이 마신 것까지 맥주 여섯 병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 맛있다!”
“서재인 씨?”
한동안 말이 없던 도혁이 나직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 팀장님. 말씀하세요.”
“서재인 씨, 내 방에 들어온 목적이 정말 욕실 수도를 확인하려던 것뿐인가?”
“네. 괜히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
정말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습니다,
라고 재인은 속으로 덧붙였다.
도혁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나더니, 곧이어 싸늘한 목소리가 재인의 귓가를 때렸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또 나왔다. 저 대사.
캑. 캑.
재인은 입안에 머금고 있던 맥주를 도로 뿜을 뻔했다.
도혁의 얼굴에 시원하게 뿜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최 전무 지시로 무언가를 찾기 위해 뒤지고 있었던 거 아닌가?”
순간.
재인은 꽝, 하고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얼얼했다.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전개였다.
재인은 자신이 스파이로 의심을 받아 도혁과 계약을 맺고 같이 살고 있음을 상기했다.
도혁이 제게 마음이 있다는 것에 신경 쓰느라 한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사실을.
“아, 아니에요! 절대!”
펄쩍 뛰는 재인을 바라보는 도혁의 입가에 느른한 미소가 걸렸다.
“그래? 그걸 뭐로 증명할 거지?”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봤던 장면인데.
「그럼 증명해봐, 몸으로.」
아, 그 개연성 없는 스파이 영화들!
그리고, 계약을 제안하며 도혁이 던졌던 그 말.
그때, 침실에 놓인 커다란 침대가 재인의 시야에 들어왔다.
재인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치명적인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야, 서재인!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어! 팀장님이 그런 뜻으로 증명하라고 말한 게 아니잖아.’
재인은 자꾸만 치고 올라오는 야릇하고 위험한 생각들을 부정해보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도혁의 뜨거운 시선은 재인 자신에게 꽂혀 있었다.
‘어떡해! 100퍼센트 그런 뜻이 아니라는 확신이 안 들어.’
누가 자신의 몸 위에 올라타 꽉 누르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재인은 도혁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증명할 게 뭐가 있겠어요. 스파이가 아닌데…….”
“그래? 그렇단 말이지.”
순순히 수긍할 리 없는 도혁은 여전히 재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대로는 위험해!’
재인은 참을 수 없는 긴장감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 숨 막히는 분위기를 어떻게든 깨뜨려 보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눈에 미니바가 포착됐다.
“여, 여기 굉장하네요. 없는 술이 없어요. 전 밖에 술이 하나도 없어서 팀장님이 못 드시나 했어요. 하하.”
“…….”
“근데 팀장님, 그동안 이 좋은 걸 아까워서 몰래 혼자 드신 거예요?”
도혁은 재인의 의도를 눈치챈 듯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이번 달에는 어제 마신 게 처음이야. 일부러 안 마셨었어.”
화제 돌리기 성공!
어? 그나저나 이번 달이면?
내가 이 집에 들어온 시기와 겹치잖아?
재인은 무심코 다시 물었다.
“왜요?”
“그게…….”
재인이 궁금하다는 듯 눈을 깜박거리자, 도혁이 그윽한 눈길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마시면…… 참기 힘들 것 같아서.”
“……!”
쿡쿡.
도혁이 낮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재인이 피할 새도 없이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히이익!
소스라치게 놀란 재인이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몸을 뒤로 뺐다.
자석에 끌려가듯 도혁의 몸도 재인에게 기울었다.
재인의 등이 소파 팔걸이에 닿았다.
도혁이 팔걸이에 손을 짚은 채 재인을 내려다봤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뭔가 일을 벌일 것만 같은 자세로.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나?”
도혁의 입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재인의 눈이 주먹만 해졌다.
“그럼 참기 힘들다는 게……?”
날 두고 한 말이었어?
재인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꿀꺽 삼켰다.
너무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에게 도혁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맞아. 나 참느라 많이 힘들었어.”
“가, 갑자기 왜…… 이러세요?”
“이제 참는 거 그만하려고. 갑갑해서 미칠 것 같거든.”
“……!”
도혁의 칠흑 같은 눈동자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재인의 얼굴이 가득 담겼다.
재인은 황급히 도혁의 눈길을 피하며 한 박자 늦게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팀장님이 나랑 사는 동안 술을 마시면 선을 넘을 것 같아서 술을 끊었었다는 얘기지? 그럼 이제 안 참겠다는 건?’
맙소사!
쿵쾅쿵쾅.
쿵쾅쿵쾅.
재인은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고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말해봐. 서재인 씨도 어젯밤에 잠 못 들고 밤새 날 생각했지?”
역시 들켰구나.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재인이었다.
“아, 아니요. ……게임했는데요.”
“그래? 무슨 게임?”
“……!”
이런. 해봤어야 알지.
당황한 얼굴로 굳어버린 재인을 보며 도혁이 피식 웃었다.
“거짓말. 내가 말했잖아? 평생 책임을 묻겠다고.”
“그, 그건 사고였잖아요. 어쩔 수 없는…….”
도혁이 여유 없는 표정으로 입술을 뗐다.
“어쩌지? 나도 어쩔 수가 없는데, 더는.”
“……!”
말이 끝나자마자 도혁의 얼굴이 천천히 천천히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그토록 점령하고 싶었던 미지의 영역을 그윽한 눈으로 주시하며.
더는 물러설 곳 없는 재인은 숨이 턱 막혔다.
‘어떡해! 이대로라면…….’
도혁의 살며시 닫힌 선홍빛 입술이 점점 가까워졌다.
지난밤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쯤 떠올라 재인을 괴롭혔던 그것,
너무나도 부드럽고 달콤했던 그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