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내 방엔 왜 들어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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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내 방엔 왜 들어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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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내 방엔 왜 들어왔지?
2022.11.19.
재인이 욕실 문을 닫자마자, 딸깍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도혁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만 늦었어도 재인은 꼼짝없이 현행범으로 잡혔을 터였다.
‘휴우, 간 떨려서 못 살겠네.’
미친 듯이 널뛰는 맥박은 이미 위험 수치를 훌쩍 넘어선 지 오래였다.
‘어떻게든 들키지 않고 빠져나가야 해!’
재인은 욕실 문에 귀를 갖다 대고 바깥 동정을 살폈다.
“네, 김 실장님.”
도혁이 전화를 받았다.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예상대로 도혁은 곧장 침실로 걸어 들어왔다.
곧이어 옷을 갈아입는 듯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휴우. 옷장에 숨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네.’
재인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옷을 다 갈아입었는지 바깥이 쥐죽은 듯 고요했다.
재인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혹시라도 도혁이 벌컥 욕실 문을 열까 봐.
왜 도혁의 방에 몰래 들어와서 이 고생을 하는지 후회막급이었다.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서재인, 언제부터 네가 그렇게 진실을 추구했다고! 궁금해 죽겠어도 그냥 참지,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일이 더 커졌잖아!’
재인이 자책하며 괴로워하던 그때.
도혁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떡하긴요. 다 자기가 자초한 일이니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겁니다.”
뜨끔.
재인은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려서 간이 철렁했다.
“알겠습니다. 계속 주시해주세요. 그럼 이만.”
이제 전화를 끊으려나 싶었는데 곧이어 격양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 설마, 할아버지가 김 실장님께도 서진물산 얘기를 하신 겁니까?”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도혁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다.
“수요일이요? 됐습니다. 윤세정인지 뭔지 절대 안 만날 거니까 설득할 생각 마세요.”
‘윤세정? 아하, 회장님이 팀장님한테 서진물산 윤세정이랑 선보라고 하셨나 보네. 서진이면 대산 만만치 않은 재벌가인데. 역시 결혼도 집안끼리 맞춰서 하는 세상이구나.’
웬일로 빠르게 눈치를 챈 재인은 왠지 모를 씁쓸한 기분에 휩싸였다.
‘쳇! 팀장님이 누구랑 만나든 결혼을 하든 알 게 뭐야.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어차피 언젠가는 팀장님도 비슷한 재벌가 여자 만나서 결혼할 게 뻔한데.
그런데 왜 가슴 한구석이 갑갑해지는 건지.
그때, 도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예의상 나가는 것도 싫습니다. 김 실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전 이미…….”
이미?
재인은 저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웠다.
“아무튼, 그 얘기는 김 실장님이 알아서 할아버지께 잘 얘기해주세요. 그럼 정말 끊습니다.”
도혁이 전화를 끊자 다시 적막이 감돌았다.
숨죽인 재인의 볼이 발그레 상기되어 있었다.
도혁이 못다 한 말의 주인공이 왠지 자기일 것 같아서.
도혁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가 싶더니 탁. 탁. 무언가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재인은 조심스레 욕실 문을 빼꼼 열었다.
도혁은 어디에 있나 눈으로 찾고 있는데, 라운지웨어 차림의 그가 미니바 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성준의 전화가 아니었으면 미니바에 숨어 있다가 꼼짝없이 들킬 뻔했다.
욕실 손잡이를 잡은 재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도혁은 와인잔에 레드와인을 반쯤 채우고는 기다란 소파에 가서 쓰러지듯 앉았다.
팔걸이에 기댄 채 와인을 입술에 적신 도혁은 이내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이 멋진 영화 속 한 장면 같아서 재인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눈이 행복하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구나.’
인정하기 싫지만, 차도혁은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빛이 나는 압도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
홀린 듯 한참을 그렇게 보고 있는데, 갑자기 도혁이 번쩍 눈을 떴다.
흡!
재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욕실 문에서 떨어졌다.
‘설마, 눈이 마주친 건가?’
불길한 예감은 어째서 틀리지 않는 걸까.
도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떡해! 어떡해!’
꼼짝없이 새장에 갇힌 신세가 된 재인은 다급히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드르륵.
욕실 미닫이문이 열렸다.
커다란 형체가 파우더룸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게 보였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새파랗게 질린 재인은 부들부들 떨며 계속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그만,
“아얏!”
우당탕.
욕조에 다리가 걸려 뒤로 벌러덩 넘어지고 말았다.
재인이 넘어질 때 건드렸는지 주변 세면 물품들이 욕조 안으로 쏟아졌다.
벌컥.
욕실 문이 열리고 도혁이 뛰어 들어왔다.
“서재인?”
욕조 안에 벌러덩 드러누운 재인의 모습이 어이가 없는지 도혁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도혁이 욕조 안으로 들어가 손을 내밀었다.
“괘, 괜찮아요.”
재인은 너무 창피해서 차마 도혁의 손을 잡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혼자 일어나보려고 버둥거리던 재인은 그만, 욕조 바닥에 가로놓인 샴푸 통을 밟고 말았다.
주르륵, 발이 미끄러지면서 재인의 몸이 휘청 뒤로 넘어갔다.
“꺄악!”
다행히 도혁이 잽싸게 재인의 허리를 감싸 안아 제 품에 와락 끌어당겼다.
쿵쾅쿵쾅.
쿵쾅쿵쾅.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터질 듯한 두 사람의 심장박동 소리가 한데 뒤엉켜 귓가를 간지럽혔다.
도혁의 품에 폭 파묻힌 재인은 이제는 익숙한 그의 체향을 맡자 온몸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얇은 옷 너머 그의 판자처럼 단단한 가슴에서 온기가 전해져 왔다.
그게 싫지 않아서, 아니 떨어지고 싶지 않을 만큼 좋아서.
재인은 혼란스러웠다.
도혁이 정적을 깨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서재인 씨, 괜찮아?”
“……네. 괘, 괜찮아요.”
“계속 이렇게 있을 수도 없고…….”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네? 아아, 죄송해요!”
당황한 재인은 도혁의 품에서 떨어지려고 몸을 뒤로 뺐다.
그 순간, 중심이 흐트러진 재인는 무언가 지탱할 것을 붙잡았다.
“앗, 차가워!”
갑자기 머리 위에서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재인이 샤워기 수전 손잡이를 잡은 것이었다.
세차게 떨어지는 물줄기를 피할 겨를도 없이 둘 다 꼼짝없이 젖어버렸다.
당황한 재인은 물을 잠그려고 손을 뻗었다.
그런데 아뿔사!
이번에는 뭘 잘못 건드렸는지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앗, 뜨거! 티, 팀장님! 어떻게 좀 해보세요!”
재인은 다급히 손잡이를 다시 건드렸다.
“안 돼!”
안타까운 외침과 동시에 다시 찬물이 쏟아졌다.
도혁은 쏟아지는 물줄기 때문에 눈을 뜨지 못하는 재인의 얼굴을 제 가슴에 끌어안으며 재빨리 물을 잠갔다.
도혁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있던 재인은 그제야 얼굴의 물기를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은 도혁이 촉촉한 눈으로 재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재인의 머릿속에 속절없이 떠오른 한 생각이 있었으니,
‘젖어서 그런가? 팀장님 눈빛, 평소보다 더 우수에 차 보이네.’
마치 어릴 적 그녀를 잠 못 들게 했던 순정만화 속 주인공처럼.
툭.
넋이 나간 재인의 머리 위로 두툼한 수건이 떨어졌다.
“감기 걸려. 계속 이러고 있으면.”
“아, 죄송해요!”
도혁의 말에 재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난리 통에 망상에 빠질 여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눈앞에는 자신 때문에 이미 샤워를 마치고 옷까지 갈아입은 도혁이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서 있는데.
“팀장님, 어떡해요! 너무 죄송해요!”
분명히 화가 단단히 났겠지?
하얗게 질린 재인은 황급히 수건으로 도혁의 몸을 닦아주었다.
“서재인 씨, 그만!”
도혁은 열심히 제 가슴을 닦는 재인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니, 그래도 죄송해서…….”
도혁의 얼굴을 쳐다본 재인은 흠칫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도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한쪽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었다.
도혁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는 됐고, 서재인 씨나…….”
“저요?”
재인은 그제야 흠뻑 젖은 얇은 옷이 찰싹 달라붙어 제 몸의 굴곡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음을 깨달았다.
“꺄아아아악! 꺄악!”
아주 크게,
아주 길게,
재인의 비명이 이어졌다.
* * *
‘아우우우우우! 쪽팔려 죽겠네.’
재인은 이대로 거품처럼 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방으로 돌아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도혁의 방에 몰래 들어간 것도 모자라, 그 난리를 쳤으니.
그의 얼굴을 맨 정신으로 볼 자신이 없었다.
젖은 옷을 갈아입은 재인은 머리를 말릴 겨를도 없이 침대 위에 엎어져 몸부림쳤다.
“미쳤어, 미쳤어! 아, 창피해서 어떡해!”
그 와중에도 대책 없이 도혁의 품에 안겼을 때의 느낌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아, 누가 기억을 지우는 기계 좀 발명해줬으면.
부질없는 망상만 이어지던 그때.
띠링.
휴대전화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무심코 내용을 확인한 재인은 흠칫 놀라 휴대전화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서재인 씨, 10분 뒤에 내 방에서 봅시다.]
도혁이었다.
네. 그러셔야죠.
그냥 넘어갈 차도혁이 아니지.
* * *
10분 뒤.
재인은 도혁의 방 소파에 무릎을 모으고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푹 수그린 채.
그사이, 재인의 집 나간 정신도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상태야 어찌 됐든.
도혁은 꺾어진 옆쪽 소파에 팔짱을 끼고 앉아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서재인 씨, 괜찮나?”
“팀장님, 죄송합니다.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데인 데는 없고?”
“네?”
아까 뜨거운 물이 쏟아졌던 걸 묻는 건가.
설마, 그걸 물어보려고 부른 거야?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재인은 뜻밖의 질문에 어안이 벙벙했다.
“괜찮긴 한데…….”
“다행이군.”
도혁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 방엔 왜 들어왔지?”
드디어 올 게 왔다.
이 방에 들어오기 전, 몇 번이고 대답을 연습해둔 재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솔직하게 말하는 것 말고는 해명할 방법이 없었다.
재인은 고개를 들어 도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일단 멋대로 팀장님 방에 들어온 건 백번 제 잘못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알긴 아는군.”
“하지만 꼭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었어요.”
“뭔데?”
“팀장님, 오늘 아침에 방에서 출근 준비를 다 마친 상태로 나오셨잖아요. 그래서 궁금했어요. 이곳 욕실에 온수가 정말 나오지 않는 건지.”
재인은 도혁이 어떤 말을 할지 몹시 궁금했다.
“그건…….”
도혁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은 채 생각에 잠겼다.
검은색 라운지웨어 차림에 소파에 비스듬히 기댄 도혁은 한 마리의 흑표범을 연상케 했다.
말을 잇지 못하던 도혁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궁금할 만하군.”
“그렇죠?”
재인은 눈을 반짝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도혁이 동의했으니 그녀의 행동에 정당성이 부여된 셈이었다.
자, 차도혁 씨.
어디 한번 변명을 해보시죠.
“…….”
“…….”
도혁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웬걸?
그는 말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어이, 차도혁 씨?
궁금할 만하군, 그 한마디가 다야?
“저기……, 팀장님 저한테 뭐 더 하실 말씀 없으세요?”
“무슨 말?”
도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와, 이 사람이? 그냥 넘어가려고 하네?
“팀장님, 어제 팀장님 방 온수가 고장 났다고 하시면서 제 방 옆 욕실에서 씻으셨죠.”
“응. 그랬지.”
“그런데, 좀 전에 물벼락을 맞아보셔서 아시겠지만, 팀장님 방 욕실에서는 온수가 철철 아주 잘 나왔어요.”
“음. 잘 나오더군.”
“오늘 새벽에 나가실 때도 방에서 씻으셨잖아요. 맞죠?”
도혁이 동의하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결론적으로, 팀장님 방 욕실 수도는 고장 난 적이 없었다는 거죠!”
재인은 사건의 트릭을 파헤친 추리소설 탐정처럼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어떻게든 도혁을 당황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을 벌이지 않게 하려고.
그러나.
예상과 달리 도혁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입가에 심중을 헤아릴 수 없는 미묘한 미소가 걸려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