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한밤중, 그의 방 안에서 (48/129)


48화. 한밤중, 그의 방 안에서
2022.11.15.



 


“민우 선배!”

재인이 손을 흔들며 민우를 반겼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 서연은 멋쩍게 웃으며 걸어오는 민우를 보고는 재인에게 눈을 흘겼다.


“재인이 너, 말도 없이 이럴 거야?”

“미안해요, 언니.”

재인이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누며 서연의 마음도 많이 풀어진 것 같아, 민우에게 몰래 메시지를 보내뒀었다.

민우가 서연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됐어. 뭘 잘못했는지는 알아?”

서연의 날 선 물음에 민우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잠깐이지만 어머니 말에 흔들려서 미안해. 우리 원래 계획했던 대로 혼수나 예단처럼 불필요한 것들은 다 생략하고, 집도 같이 모은 돈으로 구하자.”

“……정말?”

“다 큰 성인이니까 우리 뜻대로 하는 게 당연하지. 어머니가 앞으로도 우리 일에 함부로 간섭하시지 못하게 잘 말씀드릴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믿어줘.”

민우의 말에 서연은 화가 한결 누그러졌다.


“어머님이 가만 안 계실 텐데?”

“내가 잘 설득할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짜지?”

“그럼. 나만 믿어.”

민우가 서연의 손을 잡고 다짐했다.

어느새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의 눈에 하트가 뿅뿅 떠 있었다.

재인은 그런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벌써 8시가 넘었네. 재인아, 배고프지? 같이 밥 먹으러 가자.”

민우의 말에 서연이 맞장구를 쳤다.


“그래, 재인아. 계기야 어찌 됐든 오랜만에 셋이서 만나니 정말 좋다.”

“그래요, 언니.”

“나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

서연은 우느라 무너진 화장을 고치려는지 가방을 챙겨 사라졌다.

민우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고마워, 재인아! 너 아니었음 정말 큰일 날 뻔했어. 네 덕분에 살았어.”

“그저 얘길 들어줬을 뿐인데요, 뭘. 암튼 정말 다행이에요.”

재인도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같은 시각.

카페 밖에서는 나희가 재인과 민우를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횡재가 다 있나!’

맛있는 먹잇감을 발견한 승냥이 마냥 나희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녀는 갑자기 찾아온 우진과 그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에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눈엣가시인 재인이 옆 팀 나민우 팀장과 다정하게 웃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된 것이었다.


‘뭐야, 서재인. 나 팀장님이랑은 그냥 친한 선후배 사이라더니 아주 분위기 좋네? 그럼 조현준은 뭐지? 고상한 척하더니 양다리였군. 혹시 팀장님까지 어장관리를 해왔던 거 아니야?’

재인에게만 남다르게 대하는 도혁이 내내 신경이 쓰였던 터라, 나희는 절호의 찬스를 잡은 기분이었다.


‘팀장님도 이 사실을 알면 서재인에게 흥미가 떨어지겠지?’

나희는 지금 본 모습을 언젠가 재인의 실체를 밝힐 무기로 쓰리라 마음먹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우진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나희를 보며 물었다.


“나희 씨, 괜찮으세요?”

“괜찮고말고요. 아주 좋아요!”

나희는 매서운 눈으로 한 번 더 재인을 째려보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 * *

재인은 밤 10시 무렵에야 집에 도착했다.

야근을 하고 막 퇴근했는지, 코트 차림의 도혁이 주방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


“팀장님도 좀 전에 오셨어요? 늦은 시간까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낮에 마주쳤을 때, 집에서 다시 얘기하자고 말했던 도혁이었다.

아까처럼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다그치려나?

재인은 판결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도혁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가 대답 대신 대뜸 물었다.


“여자 선배는 잘 만났나?”

“네. 덕분에요.”

“다행이군. 피곤할 텐데 어서 들어가 쉬어.”

“네?”

뜻밖에도 도혁은 아무 말 없이 재인을 놓아주었다.

놀란 눈으로 자리를 뜨지 못하는 재인에게 도혁이 한마디 더 했다.


“나한테 뭐 할 말 있나?”

“아, 아니요! 팀장님도 푹 쉬세요.”

낮과는 딴판인 무심한 도혁의 모습이 재인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조울증도 아니고 왜 자꾸 왔다 갔다 하지? 사람 헷갈리게…….’

재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 방으로 향했다.

밤을 꼬박 새운 데다 늦게 들어온 탓인지 졸음이 몰려와, 빨리 샤워하고 이불 속으로 뛰어들고픈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다 문득 도혁도 새벽에 일찍 나갔으니 피곤한 건 마찬가지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욕실이 하나뿐이라는 게 이럴 때 곤란하네.


“참, 팀장님 방 욕실에 뜨거운 물이 안 나온다고 하셨죠?”

재인의 물음에 제 방으로 향하던 도혁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그랬지.”

“수리는 어떡하죠? 연말이라 바빠서 휴가를 따로 내기도 어렵고.”

“흠흠, 토요일에나 해야겠지.”

“아, 네에. 팀장님, 불편하시겠지만 그때까지 참으셔야겠네요.”

어쩔 수 없이 토요일까지는 참아야겠구나.

재인의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도혁이 말했다.


“오늘은 서재인 씨가 먼저 씻어.”

도혁의 입에서 씻으라는 얘기가 나오자, 연관 검색어처럼 재인의 머릿속에 샤워 가운 차림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못 살아, 정말!

재인은 속으로 뜨끔해하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아, 아니에요. 전 할 일이 있으니 팀장님 먼저 쓰세요.”

“알았어, 그럼.”

도혁은 무심히 대답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방으로 돌아와 편안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재인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도혁이 욕실에 들어가는 소리가 바깥에서 들려왔다.

샤워가 끝나길 기다리며 욕실 물줄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재인은 문득, 어젯밤 도혁의 품에 얼굴을 묻었던 일이 생각났다.

순간 그의 굴곡진 탄탄한 가슴의 감촉이 막 닿았다 떨어진 것처럼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에 낯이 뜨거워진 재인은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어휴, 팀장님 방 욕실은 왜 고장이 난 거야!’

그것만 아니었어도 어제같이 불미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럼 이렇게 끝도 없이 차도혁 씨 생각만 할 일도 없었을 테고.

아니, 그런데.

신축 주상복합 건물의, 그것도 펜트하우스의 온수 시설 고장이 말이 돼?

재인은 모든 원망을 부실 공사한 건축회사에 돌리며 투덜댔다.

아니, 그런데, 잠깐만.

재인은 불현듯 무심코 지나쳤던 이상한 점을 찾아냈다.


‘팀장님…… 새벽에 출근 준비는 어떻게 한 거지?’

도혁은 아침저녁으로 샤워를 한다.

그런데 오늘 새벽, 출근 준비를 위해 재인의 방 옆에 있는 욕실을 이용한 건 자신뿐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재인은 출근 전 이른 아침으로 되돌아가, 곰곰이 상황을 따져보았다.

가능성은 세 가지.

[1] 팀장님이 샤워를 생략했다.

→ 그런 것치곤 차도혁 씨 머리가 너무 단정하고 얼굴도 말끔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심지어 좋은 향기까지 풍겼던 것 같다.

[2] 팀장님이 찬물로 샤워를 했다.

→ 이 한겨울에? 아무리 별난 차도혁이라도 그건 좀……. 찬물로 샤워할 수 있으면 어젯밤에도 그랬겠지!

[3] 팀장님 방 욕실은 애초부터 고장 난 적이 없다.

→ 가장 가능성이 높다. 만약 그렇다면, 뜨거운 물이 안 나온다고 거짓말을 한 건데…… 대체 왜?

차도혁 씨가 왜 그랬을까?

심심해서 그런 것도 아닐 테고.


‘왜겠니?’

순간, 재인의 머릿속에서 또 다른 자아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샤워 가운만 입고 촉촉하게 젖은 모습을 일부러 보여주고 싶어서 그랬겠지!’

 

 
재인의 눈이 주먹만 해졌다.

설마.

설마.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봤던, 그 고전적인 유혹의 기술?


“말도 안 돼! 그럼, 진짜로 날 좋아해서 그런 거잖아!”

재인은 두 손으로 화끈거리는 뺨을 감쌌다.

아니, 아직 섣부른 판단은 이르다.

차도혁이 안 씻었거나, 이를 악물고 찬물로 샤워를 했을 가능성도 아직 남아 있으니까.

재인은 진실을 파헤쳐 보고 싶은 충동이 거세게 일었다.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도혁이 이제 막 샤워를 시작한 지금.

아무리 빨리 끝낸다고 해도 10분은 더 걸릴 것이다.

그 정도면 시간은 충분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빨리 다녀오면 괜찮지 않을까?’

결심을 굳힌 재인은 소리 없이 방에서 빠져나왔다.

복도를 지나 굳게 닫힌 도혁의 방문 앞에 섰다. 주인 없는 방에 몰래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멈칫했지만.

망설임도 잠시, 재인은 도혁의 방에 숨죽여 잠입했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재인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은 것은 물론, 마치 호텔 객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중앙에는 테이블과 소파를 ㄷ 자로 배치한 응접실이 나왔다.

왼쪽에는 양주가 가지런히 진열된 미니바가 있었다.

그 옆에는 와인셀러와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길쭉한 냉장고 두 대가 서 있었다. 냉장고 안에는 수십 가지 맥주, 음료수, 생수 등이 가득했다.

어제 샤워 가운을 입고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던 도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방 냉장고에는 술이 없는데 어디서 나왔나 했네.


‘팀장님, 치사하게 이 좋은 걸 혼자만 누렸던 거야?’

저도 모르게 입이 삐쭉 나온 재인이 고개를 돌리자, 응접실 오른쪽 벽 너머에 있는 커다란 침대와 욕실이 눈에 들어왔다.


‘이 좋은 거 같이 누려서 뭐 하려고?’

또다시 시작된 망상에 괜스레 낯이 뜨거워졌다.


‘그만, 그만! 이럴 때가 아니잖아.’

재인은 본래 목적을 상기하며 조심스레 욕실로 향했다.

파우더룸을 지나 반투명 유리문을 열자 변기와 세면대, 그리고 더 안쪽의 커다란 욕조가 눈에 들어왔다.

두근두근.

재인은 긴장된 표정으로 세면대의 수전을 돌렸다.

잠시 후,

따끈한 물줄기가 손바닥에 쏟아졌다.


‘역시!’

재인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상대로였다!

애초에 팀장님 방 욕실 수도는 고장 난 적이 없었다.

재인은 세면대 거울에 비친 웃고 있는 제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지금 맞췄다고 좋아할 때가 아니잖아?


‘일단 여기서 나가자. 생각은 나중에.’

재인은 물을 잠그고 잽싸게 욕실에서 빠져나갔다.

하지만 방문 손잡이를 잡는 순간.

갑자기 세면대에 남아 있는 물기가 신경이 쓰였다.

그것도 아주 몹시.

도혁처럼 예리한 사람이 본다면, 사람도 없는 욕실이 젖어 있는 걸 이상하게 여길 게 뻔했다.

하는 수 없이 욕실로 다시 돌아가 수건으로 세면대를 깨끗이 닦았다.

완전 범죄를 위해, 이번에는 젖은 수건을 챙기고 똑같은 새 수건을 걸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됐어. 완벽해!’

재인이 뿌듯해하며 도혁의 방문을 열고 나가려던 찰나였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밖에서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샤워를 마친 도혁이 돌아오고 있었다.

재인은 사색이 되어 속으로 절규했다.


‘큰일 났다! 어떡해!’

숨을 곳을 찾기 위해 재빨리 주위를 스캔하던 중.

미니바가 재인의 눈에 들어왔다.


‘저기다! 저기가 좋겠어!’

재인이 미끄러지듯 미니바로 달려가는데,

Rrrrrrr. Rrrrrrr.

미니바 위에 놓여 있던 도혁의 휴대전화에서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깜짝 놀란 재인은 황급히 방향을 틀어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참, 어디 숨지? 옷장?’

재인은 침실 맞은편에 놓인 옷장 손잡이를 잡아당기려다 멈칫했다.


‘바보야! 씻고 났으니 제일 먼저 옷을 꺼내 입을 거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한다.

이 방 안에서 숨을 곳은……?

결국, 재인은 울며 겨자 먹기로 욕실 안으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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