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없던 일로 하시죠
(47/129)
47화. 없던 일로 하시죠
(47/129)
47화. 없던 일로 하시죠
2022.11.12.
주간회의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온 재인은 졸음이 쏟아졌다.
점심 식사 대신 한숨 잘 생각으로 엎드리려는 찰나, 그녀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인아, 지금 시간 좀 괜찮니?”
뒤를 돌아보니 사무실 입구 쪽에 민우가 서 있었다.
머릿속이 차도혁으로 가득 차서 민우의 연락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재인이었다.
황급히 밖으로 나간 재인은 민우와 복도 끝으로 갔다.
“선배, 정말 미안해요. 아침에 연락한다는 걸 정신이 없어서 깜박했어요.”
“아니야. 밤늦게 전화 건 내가 미안하지.”
민우가 부쩍 수척해진 얼굴로 씁쓸하게 웃었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서연 언니가 왜 결혼을 안 한대요?”
“혼수랑 집 얘기 오가다 의견 차이가 좀 있었거든. 서연이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이제라도 관두자는데, 어떡하지?”
“에휴, 무슨 얘기가 오갔길래. 선배는 뭐라고 했는데요?”
“당연히 절대 안 된다고 했지. 너도 알잖아, 나 서연이 없으면 못 사는 거.”
생각만 해도 괴로운지 민우의 얼굴이 마구 일그러졌다.
재인은 친오빠처럼 생각해온 민우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알았어요, 선배. 제가 언니랑 한번 얘기해볼게요.”
“고마워, 재인아. 부탁할게. 서연이가 내 전화는 받지도 않아.”
“잘 얘기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요.”
그제야 민우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재인은 민우를 먼저 들여보내고 곧장 서연에게 연락했다.
벨이 울리자마자 서연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재인아, 월요일부터 어쩐 일이야.
“언니, 괜찮아요? 민우 선배가 언니 걱정된다고 연락해보라고 해서요.”
―나민우가? 됐다, 그래.
“결혼 안 한다고 했다면서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서연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지금은 회사 사람이랑 같이 있어서 자세히 얘기하기 좀 그래. 재인아, 시간 되면 저녁때 만나서 얘기할까?
“그래요. 이따 만나요.”
얼떨결에 약속을 잡은 재인은 한 가지 고민에 빠졌다.
‘팀장님한테 약속 있다고 말해야 하는데, 어떻게 얼굴을 보지?’
입 맞추기 전으로 돌아갈 수도, 24시간 붙어 있다시피 한 도혁을 계속 피해 다닐 수도 없는 상황.
해결 방법은 딱 하나뿐이었다.
‘어제 일은 아무 의미도 없는 사고였잖아. 팀장님께 그냥 없었던 일로 하자고 얘기하자.’
재인은 마음을 다잡으며 사무실로 향했다.
그런 그녀를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지켜본 이가 있었으니,
바로 재인의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 떠날 줄 모르는 바로 그 팀장님이었다.
* * *
“주말에 팀장님한테 무슨 일 있으셨대요?”
뜬금없는 연지의 질문에 재인은 그만 놀란 티를 내버렸다.
“그,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어?”
늦은 오후.
재인과 연지는 휴게실 한쪽에 놓여 있는 간이 테이블에서 잠깐 티타임을 가지는 중이었다.
연지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팀장님이랑 서 주임님이랑 두 분이 야근 자주 하니까 혹시 뭔가 아시나 했죠. 주간 회의 때 팀장님이 좀 이상했잖아요. 평소랑 완전 딴판으로.”
재인은 조마조마했다.
일전에 연지가 했던 질문에 무심코 대답해버리는 바람에, 자신과 도혁의 관계를 눈치챘을까 봐.
「근데 팀장님도 영화 볼 때 팝콘 드세요?」
「어.」
재인은 이번엔 넘어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런가? 난 전혀 모르겠던데…….”
“강 대리님 보고서에 오자가 넘쳐나도 그냥 넘어가고, 박 과장님 프레젠테이션 자료가 미흡해도 다시 해오라는 말뿐이었잖아요. 회의 시작한 지 20분도 안 돼서 끝내자고 하는데, 농담인 줄 알았다니까요.”
“그러게…….”
확실히 오늘의 차도혁은 아주 관대했다.
평소 같았으면 온갖 독설로 팀원들의 자존감을 바닥 치게 만들었을 텐데.
“아무래도, 어제 뭔가 충격적인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요. 그게 뭘까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재인의 코앞까지 다가와 빤히 쳐다봤다.
흠칫 놀란 재인은 무심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누가 봐도 부자연스러운 반응에, 연지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당연히, 서 주임님은 그게 뭔지 모르시겠지만요. 그죠?”
“……!”
재인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서재인 바보! 또 당했어!
누굴 원망하랴.
밤새도록 차도혁 입술만 생각한 내 탓이지.
“전 이제 들어가 볼 건데, 주임님은요?”
“어어, 먼저 가. 난 조금만 더 있다가 갈게.”
“네, 그럼.”
자리에서 일어난 연지가 입구 쪽을 보고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어? 오셨어요? 여기 앉으세요.”
‘누구길래?’
재인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숨이 멎을 뻔했다.
휴게실 입구에 도혁이 서 있었다.
“그럼, 두 분 천천히 얘기 나누세요.”
딱 걸렸어, 라는 눈빛으로 둘을 잠시 쳐다본 연지는 붙잡을 새도 없이 총총총 사라졌다.
‘연지 씨, 이러기야? 같이 가!’
“티, 팀장님 저도 이만…….”
재인이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후다닥 휴게실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도혁이 탁, 하고 한 팔로 휴게실 입구를 막아섰다.
그러고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서재인 씨?”
등골이 서늘해진 재인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도혁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랑 할 얘기가 있지 않나?”
재인은 누가 올까 걱정돼 다그치듯 속삭였다.
“팀장님, 대체 왜 이러세요! 여기 회사잖아요!”
도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느른한 미소를 지으며 재인에게 다가갔다.
탁.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던 재인의 등이 벽에 부딪혔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재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푹 고개를 숙였다.
도혁의 뜨거운 시선이 머리로 내리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한 손을 벽에 짚은 채 잠시 침묵하던 도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책임질 거지?”
“뭐, 뭘요?”
애써 모른 척하는 재인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도혁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걸 말로 해야 알아듣나? 좋아.”
“네?”
“어제 내 입술을 덮쳤으면…….”
“팀장님!”
재인은 질겁하며 양손으로 도혁의 입을 틀어막았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읍! 읍!”
미처 못다 한 말을 하려는지 도혁이 웅얼거렸다.
후우. 후우.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은 재인은 미리 준비해둔 모범 답안을 말하기 시작했다.
“팀장님, 어제 일은요, 그냥 사고였어요. 길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것 같은 사고요.”
재인에게 입을 틀어 막힌 도혁이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들어 올렸다.
“어찌 됐든 제가 실수한 거니까 사과드릴게요. 죄송해요. 그러니 팀장님도 잊어주세요.”
“그건 곤란한데.”
도혁이 제 입을 막고 있는 재인의 손을 가볍게 떼어내며 받아쳤다.
“나는 당한 건 몇 배로 갚아줘야 직성이 풀리거든.”
“몇 배나요?”
대체 어쩌시려고?
설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만 몹쓸 상상을 해버린 재인은 불이 붙은 듯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순간, 도혁이 화르륵 기름을 끼얹었다.
“앞으로 서재인 씨한테 책임을 확실히 묻겠어. 평생.”
“장난치지 마세요! 그거 가지고 무슨…….”
발끈한 재인은 도혁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 말문이 막혔다.
도혁의 눈에 ‘100퍼센트 진심’이라고 쓰여 있어서.
맙소사.
상대는 차도혁이다.
재인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했다.
“팀장님, 일단 회사에서 이러지 말고 나중에 얘기해요. 누가 볼까 봐 간 떨려서 못 살겠어요.”
“왜? 나민우 팀장한테 들킬까 봐 불안한가?”
“아니에요. 나 팀장님은 그냥 친한 선배일 뿐이라니까요.”
“그냥 친한 선배가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그건…….”
“대답 못 하는 걸 보니 찔리는 게 많은가 보군.”
“찔리긴 누가요!”
아우, 답답해!
민우와 서연의 사생활을 얘기할 수도 없고.
재인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래? 일단 저녁때 집에서 다시 얘기하도록 하지.”
도혁의 선언에 재인은 서연과의 저녁 약속이 떠올랐다.
“팀장님, 저 저녁에 급한 약속이 생겼어요.”
“누굴 만나길래? 나 팀장인가?”
“거기서 나 팀장님이 또 왜 나와요?”
이제는 재인도 도혁이 진짜 민우를 의심해서 이러는 건지, 단순히 질투가 나서인지 헷갈렸다.
“아니야?”
“그냥 여자 선배예요.”
“정말?”
“네.”
꿰뚫을 듯 재인의 눈을 들여다보던 도혁은 한마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서재인 씨 말을 믿어보기로 하지.”
재인은 감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도혁의 모습이 낯설었다.
‘팀장님, 오늘 어쩐지 평소보다 더 자신만만하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것 같은데?’
점점 멀어져가는 남자답게 쩍 벌어진 도혁의 등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재인이었다.
* * *
서연의 회사는 재인의 회사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재인은 약속 장소인 서연의 회사 근처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재인아, 여기야!”
서연이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재인을 맞았다.
언밸런스 커트 스타일에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서연은 그조차도 우아해 보이는 미인이었다.
“언니, 지금은 좀 괜찮아졌어요?”
“아니. 생각할수록 중심 못 잡는 민우가 원망스러워.”
“민우 선배가 언니 없으면 못 산다고 꼭 좀 설득해달래요.”
“치. 이미 늦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얘기해 봐요.”
재인은 미소를 지으며 서연의 손을 잡았다.
잠시 뜸을 들이던 서연이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있잖아, 그동안 나 속고 살았어.”
“왜요?”
“어제저녁에 결혼 준비 얘기하느라고 민우네 집 갔었어. 근데 알고 봤더니, 걔네 집 진짜 알부자였더라고.”
민우 선배가?
한 번도 티를 낸 적이 없어서 몰랐다.
“그런데요?”
“어머님이 그동안은 한 식구 되는 게 확실치 않아서 잠자코 있었는데 이제는 말해야겠다고 하시면서, 혼수 리스트를 건네셨어. 브랜드에 가격대까지 적어서.”
“어머, 놀랐겠네요.”
“그러면서 대놓고 살림은 여자 손을 타야 한다며, 회사 계속 다닐 거냐고 물으시더라. 어차피 나중에 애 낳으면 그만둘 거 아니냐고.”
“아…….”
보석 디자이너인 서연은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시당하다니.
재인은 서연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다.
“민우 선배는 뭐래요?”
“회사 얘기는 무시하면 되고 혼수는 자기가 모은 돈을 줄 테니 그걸로 적당히 조율해서 준비하재. 지금 돈이 문제가 아니라, 민우랑 나랑 차근차근 준비해온 계획이 묵살된 게 문제잖아? 결혼 후에도 휘둘리면서 살 게 뻔히 보이고,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민우 태도도 화가 나서 다 관두자고 한 거야.”
말을 마친 서연은 눈가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티슈로 닦았다.
“그래도 언니, 민우 선배만 한 사람 없잖아요. 일단 시간을 가지고 다시 생각해봐요.”
“몰라. 숨긴 것도 날 못 믿어서 그런 건가 싶고, 생각할수록 괘씸해.”
“그건 아닐 거예요. 민우 선배 어떤 사람인지 알잖아요.”
그렇게 재인은 1시간 넘게 울먹이는 서연을 달래며 속상한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쌓였던 감정을 다 털어낸 서연은 마지막으로 재인에게 충고했다.
“마음 편히 살려면 비슷한 집안끼리 만나는 게 좋은 것 같아. 너무 차이 나도 골치 아파. 재인이 너도 참고해.”
차이 나는 걸로 치면 차도혁 씨가 최고지.
재인은 갑자기 머릿속에 도혁의 얼굴이 떠올라 당혹스러웠다.
‘왜 또 팀장님이 튀어나와?’
서연의 얘기를 들어주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그에 관한 생각이 쉴 새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재인아, 너 괜찮아?”
서연이 안색이 어두워진 재인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그때.
카페 문을 열리더니, 한 남자가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