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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입술을 훔쳤으면 책임을 져야지? (46/129)


46화. 입술을 훔쳤으면 책임을 져야지?
2022.11.08.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다다다다. 다다다다.

쾅!

쏜살같이 달아난 재인이 얼마나 힘을 주고 세게 닫았는지 방문 닫히는 소리가 거실을 뒤흔들었다.

도혁은 그대로 바닥에 누운 채 꼼짝 않고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재인이 제 입술을 덮치는 순간 모든 사고가 멎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슴이 헤벌어진 도혁의 샤워 가운이 아슬아슬하게 하체를 가리고 있다는 것.

나민우의 전화 때문에 잠시 질투에 눈이 멀었을 뿐인데.

이렇듯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되자 도혁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잠시 꿈을 꾼 건가?

도혁은 재인과 입을 맞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재인의 입술은 그동안 상상해왔던 것보다 훨씬 보드랍고 달콤했다.

그 따뜻하고 촉촉한 입술에 다시 닿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기꺼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확 안아버릴걸! 그리고 그 입술을 다시…….’

사워 가운 한 겹을 사이에 두고 밀착되어 있던 재인이었다.

그녀를 힘껏 끌어안는 상상만으로도 도혁은 희열을 느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황홀감도 잠시.

때늦은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이런 바보 같으니라고! 좋아하는 여자가 그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얼어붙어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다니.’

‘서재인 한정 바보’가 되는 자신의 모습에, 기가 막혀 헛웃음만 나왔다.

아쉬움에 씁쓸해하던 도혁은 갑자기 두 손으로 제 볼을 툭툭 두드렸다.


‘정신 차려! 김 실장님이 한 말 잊었어?’

이틀 전.

도혁이 재인에 관한 고민을 털어놓았을 때 성준은 두 가지 조언을 했었다.

첫째, 도혁의 가장 큰 장점, 빛나는 미모를 무기로 삼으라.

둘째, 밀당을 하라.
 


「서재인 씨한테 맞춰주는 전략이 효과가 없다면 이제는 밀어낼 때입니다.」

「어떻게요?」

「앞으로는 무관심한 척해보세요. 자기한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던 상대가 갑자기 180도 바뀌면 오히려 더 아쉽고 신경 쓰이기 마련이니까요. 거기에 도련님의 출중한 외모까지 적극 어필한다면 서재인 씨도 끌려올 겁니다, 반드시.」

자신감 넘치는 성준의 표정에서 도혁은 ‘이거다!’ 하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두말 않고 곧바로 실천으로 옮겼다.

재인이 규민을 만나러 가도 무심한 척 넘기고, 같이 있을 때도 자꾸만 재인에게 향하는 눈길을 억지로 돌리며 사무적으로만 대했다.

그리고 오늘 밤.

도혁은 재인의 뇌리에 자신을 각인시키고자 훅 밀고 들어간 것이었다.

촉촉하게 젖어 더 치명적인 남성미를 한껏 자랑하며.

나민우 때문에 잠시 이성을 잃어 말짱 도루묵이 되나 했는데,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다니.

도혁은 도망치기 전 새빨개진 얼굴로 멍하니 저를 쳐다보던 재인을 떠올렸다.


‘새로운 전략이 조금은 통했으려나?’

피식 웃는 그의 얼굴도 발그레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이렇게 누워 있을 수는 없지.’

“으윽!”

바닥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던 도혁은 등이 쪼개지는 듯한 통증에 다시 드러누워 버렸다.

뒤로 넘어질 때 세게 부딪힌 탓인지 온몸이 욱신거렸다.

누군가 부축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아쉽게도 놀라서 달아난 재인은 방 밖으로 나올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도혁은 그녀의 휴대전화가 사라진 제 빈손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휴대전화를 손에 넣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재인이었으니, 지금쯤 나민우와 통화를 하고 있을 게 불 보듯 뻔했다.


‘나민우의 전화를 못 받는 게 그렇게 애가 탔나? 그동안에도 매일 밤 나민우랑 연락했던 거야?’

나민우와 친한 선후배 사이일 뿐이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지만.

설마 밤중에도 연락을 주고받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도혁은 불쑥 올라오는 질투심을 다독이며 냉정하게 현재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그래. 아직 나민우와도 아무 사이가 아닌 건 확실해. 서로 호감인 단계든 어떻든 아무 상관없어. 서재인을 뺏길 일은 없을 테니까.’

절대! 절대!

게다가 지금은 오히려 고맙기까지 했다.

나민우의 전화 덕분에 재인과 키스를 하지 않았는가.

엄밀히 말하자면 실수로 인한 접촉 사고였지만.

어쨌든 결론은 키스.

그래, 키스!

도혁의 얼굴에 승자의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전화? 그까짓 거 백만 번 하라 그래. 난 서재인이랑 무려 키스를 했다, 이거야!’

갑자기 온몸에 기운이 솟구치는 도혁이었다.

그 기세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목을 좌우로 움직이며 몸을 풀자, 관절 여기저기서 우두둑우두둑 소리가 났다.

등은 여전히 쑤셨지만 어쩐지 몸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도혁은 재인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서재인, 내 입술을 훔쳤으면 책임을 져야지?’

 

* * *

다음 날인 월요일,

출근하기엔 아직 이른 새벽 6시 즈음.

펜트하우스의 왼쪽 복도 끝 방의 문이 살그머니 열렸다.

그 틈으로, 코트 깃을 여미며 조심조심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한 여자가 나왔다.

행여 도혁을 깨울까 봐 숨죽이며 조용히 출근 준비를 마친 재인이었다.

어두운 거실, 통창으로 들어온 어스름 달빛만이 현관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재인은 목적지인 현관을 향해 까치발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반대편 복도 끝에 있는 도혁의 방문이 혹시라도 열리진 않을까 잔뜩 긴장하면서.


‘팀장님은 푹 잘 자고 있을 텐데, 난 이게 무슨 꼴이야.’

어젯밤.

재인은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당연히 차도혁 때문에.

수면 부족으로 눈도 충혈되고 머리도 지끈거리는 데다 다리까지 아팠다.

밤새 이불킥을 백만 번 하느라.

어차피 잠도 못 자는 거, 출근이나 빨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실은 차도혁과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재인은 태연하게 도혁과 마주 앉아 아침 식사를 할 만큼 강심장이 아니었다.

아직도 첫 키스를 허무하게 날려버린 어제 일만 생각하면 낯 뜨거워 그대로 증발해버리고 싶었다.

너무너무 억울하지만, 제가 덮친 격이니 도혁에게 따질 수도 없는 노릇.

당분간은 도혁을 피해 다니기로 결심한 재인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현관 앞에 도착한 재인은 더더욱 조심스럽게 중문을 옆으로 밀었다.

드륵.

갑자기 복도에 불이 환하게 들어왔다.

히익!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재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없애고 없애도 자꾸 튀어나와 밤새도록 그녀를 잠 못 들게 한 차도혁이었다.


“티, 팀장님?”

갑작스러운 도혁의 등장에 놀란 재인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약간 떨어진 거리에 서 있는 도혁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재인은 벌렁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갑자기 불을 켜시면 어떡해요! 간 떨어질 뻔했잖아요!”

도혁이 한쪽 눈썹을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자기 집 전등 스위치를 예고하고 켜는 사람도 있나?”

“그건 그렇지만……. 어?”

그제야 도혁을 제대로 살펴본 재인은 깜짝 놀랐다.

도혁 역시 말쑥하게 코트까지 입고 앞머리도 단정하게 넘긴 모습으로, 누가 봐도 출근 준비를 완벽히 끝마친 상태였다.

평소 도혁의 기상 시간은 7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집을 나서는 시간은 정확히 8시였다.


“팀장님, 왜 이렇게 일찍 출근하세요?”

“그게…… 김 실장님과 만나기로 했어.”

“이렇게 일찍이요?”

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도혁은 마른기침을 했다.


“흠흠. 그러는 서재인 씨는? 매일 지각을 겨우 면하면서 무슨 일이지?”

“그건…….”

꿰뚫어 보는 듯한 도혁의 말에 재인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굳이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 모두 서로가 왜 새벽부터 출근하려 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서로의 입술에 자동으로 눈이 갔으니까.

누가 먼저라고 할 새도 없이 얼굴이 새빨개진 재인과 도혁은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동시에 말했다.


“팀장님 먼저 가세요.”

“서재인 씨 먼저 가지.”

잠시 멈칫한 둘이 또다시 동시에 대답했다.


“그럼 제가 먼저.”

“나 먼저 가지.”

이때다 싶어 재인이 잽싸게 옆으로 비켜서자, 도혁은 떠밀리듯 밖으로 나갔다.

도혁이 나간 뒤, 갑자기 기운이 쭉 빠진 재인은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파묻히듯 기대어 앉았다.

머릿속에서는 또 도혁에 대한 오만 가지 생각들이 널뛰기 시작했다.


“머리를 떼놓고 다닐 수도 없고……. 미치겠네.”

 

* * *

월요일 오전 주간회의 시간.

어젯밤 한숨도 못 잔 탓에 재인은 시작부터 졸음이 쏟아졌다.

설상가상으로 오늘따라 팀원들의 보고가 유난히 지루하고 길었다.

재인은 무거운 눈꺼풀이 자꾸 감기려고 해서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겨우 참아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커다란 손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재인의 어깨를 턱, 하니 짚었다.

그러자 아래로 꼬꾸라지던 재인의 고개가 반동을 받아 벌떡 올라왔다.

아직 잠이 덜 깬 재인이 몽롱한 상태로 눈을 반쯤 뜨고 있는데, 도혁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한마디 했다.


“서 주임, 다 잤습니까?”

“네? 아……!”

재인은 그제야 눈이 번쩍 뜨이면서 정신이 돌아왔다.

도혁은 맞은편에 있는 제자리로 돌아가 앉으며 말했다.


“서재인 씨, 많이 피곤한가 봅니다. 회의 시간에 아주 곤히 자더군요.”

“죄송합니다. 어제 잠을 못 자서요.”

“……!”

그 순간 도혁의 눈썹이 움찔하는 것을 본 재인은 아차, 싶었다.

어제 도혁과 날벼락 같은 입맞춤을 한 것 때문에 밤새 잠을 설쳤다고 이실직고한 셈이니까.


“아, 저기, 그게 아니라…….”

얼굴이 새빨개진 재인은 민망한 나머지 말까지 더듬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규민이 제가 마시려고 놔둔 커피를 내밀며 나직이 속삭였다.


“재인아, 괜찮아? 이거 입 대지 않았으니까 마셔.”

“으응, 고마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혁이 미간을 좁히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서 주임, 그런 변명은 됐습니다. 밤에 잠 못 잔 사람이 서 주임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응?

재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혁을 바라보았다.

도혁은 그새 무심한 얼굴로 서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지금? 설마 팀장님도 어제 못 주무신 거야? 그 일 때문에?’

얼굴이 화악 붉어진 재인은 저도 모르게 도혁의 섬세한 이목구비와 굳게 닫힌 입술에 눈이 갔다.

촉촉하고 부드러웠던 입술의 촉감이 떠오르자 심장이 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재인의 가슴이 속절없이 일렁이던 그때.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박 과장이 끼어들었다.


“팀장님 말씀이 백번 맞습니다. 서 주임, 요새 일하다가도 꾸벅꾸벅 졸던데 말이야. 밤에 안 자고 뭐 하길래, 그래? 밤새 게임하는 거 아니야?”

“마, 맞아요. 게임!”

“그럴 줄 알았어. 아니, 나이가 몇인데 게임하면서 밤을 새워? 중독이네, 중독!”

“죄송합니다.”

이 순간만큼은, 박 과장이 눈물 나게 고마운 재인이었다.

비록 게임중독자 취급을 당하긴 했지만, 도혁에게 들키지 않고 자연스럽게 넘어간 것 같아서.


‘그래, 회의에 집중하자. 집중!’

하지만.

보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도혁의 입술에 유도 장치라도 달린 것처럼 자꾸만 눈길이 갔다.


‘서재인, 사람 입술 처음 보니? 자꾸 왜 이래?’

누가 보면 욕구불만인 줄 알겠네.

재인은 정신을 차리려고 찌뿌둥한 어깨를 티 안 나게 살살 돌렸다.

그럼에도 하품이 절로 나왔다.

행여 누가 볼세라 입을 가린 그때.

재인은 서류로 입을 가리며 하품을 숨기던 도혁과 눈이 딱 마주쳤다.

동시에 눈이 휘둥그레진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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