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날려버린 첫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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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날려버린 첫 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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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날려버린 첫 키스
2022.11.05.
‘아, 맞다!’
재인은 그제야 물을 마실 때, 무심코 휴대전화를 정수기 옆에 놓아둔 게 생각났다.
샤워 가운 차림의 도혁을 보고 놀라 뛰어 들어오는 바람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쩌지? 지금 나가면 팀장님이랑 마주칠지도…….’
도혁을 다시 볼 생각만으로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팀장님도 내가 휴대전화를 놓고 간 걸 알고 있을 텐데……. 계속 밖에 그대로 두면 자기를 의식해서라고 생각하겠지?’
사실이긴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재인이었다.
‘가만. 이러다 직접 가져다주겠다고 오는 거 아니야? 안 돼!’
나갈 수도 안 나갈 수도 없는 상황.
재인의 타는 속도 모르고 벨 소리가 줄기차게 울려댔다.
‘대체 누구길래 이 늦은 시간에 전화를 걸어! 안 받으면 눈치 있게 끊을 것이지. 사람 곤란하게.’
원망의 화살을 전화 건 상대에게 돌리던 그때.
재인의 투정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벨 소리가 뚝 끊겼다.
놀랍게도.
‘휴우, 다행이다. 이제 팀장님 들어가는 소리만 들리면 주방 가서 가져오면 돼.’
Rrrrrrr. Rrrrrrr.
하지만, 재인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벨 소리가 다시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이 시간에 도대체 누구야!”
재인은 울화통이 터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꼭 누군지 확인해서 전화 예절을 다시 가르쳐주고야 말리라!
“그래,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피할 이유가 없지! 까짓것, 팀장님 다리 한 번 더 봐주지, 뭐!”
그게 무슨 대수라고.
결심을 굳힌 재인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나.
주방이 가까워질수록 재인은 점점 더 몸을 움츠리며 숨죽이고 살금살금 걷게 되는 자신을 발견했다.
당찬 기세는 물거품처럼 사라진 지 오래였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주방에 들어선 재인은 어안이 벙벙했다.
당연히 정수기 옆에 있을 거라 여겼던 휴대전화는 물론, 도혁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체 어디에 놔둔 거지? 팀장님이랑 마주치기 전에 빨리 들어가야 하는데…….’
재인은 초조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걸 찾나?”
난데없이 뒤통수를 치는 서늘한 목소리.
덩달아 재인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샤워 가운 차림의 도혁이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재인의 휴대전화를 들고서.
여전히 벨이 울려대는 휴대전화 화면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 떠 있었다.
[나민우]
‘이 시간 민우 선배가? 조금 전에 끊긴 전화도 선배였어?’
사려 깊은 민우가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화를 건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걸다니.
뭔가 다급한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팀장님, 제 전화 돌려주세요!”
재인은 황급히 휴대전화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도혁이 번쩍 손을 드는 바람에 허탕만 쳤다.
“팀장님, 장난치지 마세요!”
황당해하는 재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도혁은 마지막 인내를 꾹꾹 누르며 한 마디 한 마디 힘겹게 내뱉었다.
“이런 한밤중에, 상품기획 2팀의 나민우 팀장이, 상품기획 1팀의 서재인 씨한테, 무슨 일로 전화를 걸고 있지?”
늦은 밤에 연인에게 하듯 전화를 걸다니!
민우의 전화가 도혁의 가슴속 깊은 곳에 어렵게 숨겨놓은 폭발 버튼을 눌러버렸다.
질투로 이성을 잃는 꼴사나운 모습 따위 보이기 싫어서 애써 참아왔는데.
“뭔가 급한 일이 있나 보죠. 어서 주세요!”
재인은 휴대전화에 손을 뻗으며 외치듯 말했다.
민우와 서연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애가 탔다.
그동안 민우가 재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는 대부분 서연과 문제가 생겼을 때였으니까.
“싫은데.”
도혁은 재인의 손을 피해 재빨리 다른 손으로 휴대전화를 옮겨 잡았다.
“아, 팀장님! 장난치지 마시라니까요!”
처음 보는 도혁의 어린애 같은 행동에 기가 막힌 재인이었다.
“제 전화잖아요! 소유권 없는 팀장님이 그걸 왜 가지고 계세요!”
재인은 어떻게든 도혁의 손에 있는 휴대전화를 잡아보려고 제자리에서 팔짝팔짝 뛰었다.
하지만 키 차이가 30센티미터 가까이 나는지라 애초부터 무모한 도전이었다.
도혁은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민우와 계속 이렇게 연락했었나?”
“아니에요! 그리고 그게 팀장님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무슨 상관?”
도혁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툭 불거졌다.
“아이, 참! 이리 주세요!”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재인은 마지막 힘을 모아 있는 힘껏 펄쩍 뛰어올랐다.
그리고, 드디어 휴대전화를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기뻐하는 것도 잠시.
도혁이 휴대전화를 쥐고 있던 손을 뒤로 빼버렸고.
“어? 어어어어엇!”
그 바람에 재인은 몸이 앞으로 쏠려 무게중심을 잃었다.
그러니까, 도혁의 몸 위를 향해서.
쿠당탕.
요란한 소리가 거실 가득 울려 퍼졌다.
잠시 후.
굳게 닫혀 있던 재인의 눈꺼풀이 살포시 열렸다.
그사이 전화가 끊겼는지 온 사위에 적막만이 감돌았다.
재인은 뇌 속 회로가 마비된 탓에 멀뚱멀뚱 눈만 깜박거렸다.
볼에서 무언가 따뜻하고 부드럽고 탄탄한 감촉이 느껴졌다.
머리 위쪽에서는 나직한 신음이 들려왔다.
“……으읏.”
바닥이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몇 번이고 맡았던 청량한 바다 향기가 은은하게 주위를 감쌌다.
응?
재인은 깨달았다.
샤워 가운이 풀어 헤쳐진 도혁의 가슴팍에 제 볼이 찰싹 달라붙어 있음을. 따뜻하고 부드럽고 탄탄한 그 느낌이…….
무게중심이 흐트러지는 바람에 도혁에게 겹쳐지면서 그대로 쓰러졌고.
그 덕분에 재인의 몸은 도혁의 몸 위에 완벽하게 빈틈없이 포개져버렸다.
재인은 너무 놀란 나머지 숨이 턱 막혀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서재인, 미쳤어! 어떡해! 어떡해!’
쿵쾅쿵쾅.
심장이 금방이라도 뚫고 나올 기세로 뛰기 시작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재인은 황급히 도혁에게서 몸을 떼어내려고 시도했다.
빨리 일어날 생각에만 빠진 재인은 무심코 도혁의 가슴팍을 꾸욱 짚었고.
그의 입에서는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졌다.
“아팟! 살살해!”
“아, 죄송해요! 팀장님, 괜찮으세요?”
“……괜찮을 리가…….”
도혁은 많이 아팠는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재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손을 떼고 다시 원래 자세로 돌아갔다.
두 사람이 완벽히, 빈틈없이, 포개진 그 자세로.
쿵쾅쿵쾅.
쿵쾅쿵쾅.
도혁의 심장박동 소리에 제 심장 널뛰는 소리까지 겹쳐져 더 크게 들려왔다.
띠링. 띠링.
눈치 없는 메시지 알림음이 연거푸 울렸다.
‘민우 선배가 보낸 메시지겠지? 이런 적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이상해.’
재인은 서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불안했다.
빨리 민우에게 전화를 걸어서 무슨 일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휴대전화는 여전히 머리 위로 높이 뻗은 도혁의 손에 쥐여 있었다.
‘일단 휴대전화를 확보하자. 팀장님은 그다음에.’
도혁에게는 미안하지만, 그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재인은 제 아래에 깔린 도혁을 지지대 삼아, 온 힘을 다해 손을 쭈욱 뻗었다.
팔을 뻗으며 재인의 몸도 쑤욱 같이 올라갔다.
부드러운 무언가 얼굴을 스치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드디어 힘겹게 휴대전화를 낚아챈 재인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됐어! 근데…….’
응?
뭔가 이상했다.
재인은 제 입술이 촉촉하고 따뜻한 무언가와 맞닿아 있음을 의식했다.
‘……이게 무슨……?’
생경한 부드러움에 재인은 커다란 눈만 멀뚱멀뚱 감았다 떴다.
재인의 눈에 초점 없는 도혁의 눈동자가 들어왔다.
그녀의 코와 비스듬히 맞닿은 그의 코끝에서 데일 것처럼 뜨거운 숨이 새어 나왔다.
그제야 재인은 제 입술과 도혁의 입술이 달라붙은 듯 포개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재인의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마른 낙엽에 붙은 불길처럼 순식간에 화르륵 온몸을 덮쳤다.
아찔할 정도로 부드럽고 촉촉한 도혁의 입술은 이제껏 재인의 입술에 닿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달콤함 그 자체였다.
절대 떨어지고 싶지 않을 만큼.
그 가장 민감하고 연약한 작은 영역을 타고 도혁의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그녀에게 전해져 왔다.
열기와 뒤엉킨 야릇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재인은 솜털까지 바짝 곤두섰다.
몽환적인 설렘에 정신이 아득해지려던 그때.
서로에게 스며들 것처럼 맞닿아 있던 도혁의 입술이 움찔, 하는 게 느껴졌다.
아!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을 차린 재인은 괴성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들자, 얼빠진 얼굴로 굳어 있는 도혁과 눈이 마주쳤다.
네 개의 눈동자가 서로 마주 보며 미친 듯이 흔들렸다.
“……티, 팀장님, 이건…….”
“…….”
도혁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멍하니 굳은 채.
재인은 저도 모르게 조금 전까지 닿아 있었던 그의 옅은 선홍빛 입술에 눈길이 쏠렸다.
일자로 굳게 닫혀 있던 도혁의 입술이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 살짝 벌어졌다.
순간, 재인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행여 제 속을 들켰을까 덜컥 겁이 나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팟! 좀……!”
갑자기 재인이 팔꿈치로 가슴을 찍는 바람에 도혁은 통증을 참느라 이를 악물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재인은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도혁이 아프든 말든, 자신이 도혁의 가슴을 계속 누르든 말든,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쾅.
재인은 방문에 기댄 채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호흡이 가빠져 숨을 제대로 쉬기도 힘들었다.
두근대는 심장은 이미 제어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서재인, 너 방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어렸을 때부터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지만.
재인은 언제나 씩씩하게 헤쳐 나갔고,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을 정도로 단련이 되었다.
하지만, 방금 일어난 사태는 도무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제 팀장님 얼굴을 어떻게 볼 거야!’
도혁을 생각하자, 재인은 조금 전 제 입술에 닿았던 그의 촉촉하고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다시 떠올랐다.
제 입술에 여전히 그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덕분에 이미 새빨갛던 얼굴이 아예 불이 붙은 듯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분명 의도치 않은 사고였다.
정상참작이야 되겠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도혁과 입술이 닿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팩트.
재인은 두 볼을 감싸며 도리질을 쳤다.
‘아, 억울해! 첫 키스를 이렇게 날리다니!’
그렇다.
이번 일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재인의 첫 키스가 어이없게 날아간 날강도 같은 사건이기도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재인이 도혁을 덮친 것이었으나.
아무튼.
멋진 남자와 바닷가에서 노을을 보면서 첫 키스를 하고픈, 나름의 로망을 가지고 있었던 재인이었다.
그런데,
바닷가는커녕 주방 바닥에서?
하물며 그 상대는 차도혁?
차도혁이 과하게 멋진 건 사실이지만.
‘입술도 참 촉촉하고 부드러웠지.’
순간 재인은 손가락으로 입술을 어루만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황급히 손을 내렸다.
“뭐래? 정신 차려! 이건 무효야, 무효라고!”
재인은 자꾸만 떠오르는 도혁의 입술을 머리에서 지우려고 손등으로 입술을 박박 문질렀다.
하지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급기야 찰싹 달라붙어 있었던 도혁의 탄탄하고 매끈한 가슴의 감촉까지 선명하게 떠올라 버렸다.
문제는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는 거.
“아우, 미치겠네. 그냥 죽자. 죽어!”
정말 창피해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우쒸, 다 이것 때문이야!”
재인은 괜히 손에 쥔 휴대전화를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그렇게 줄기차게 울려대지만 않았어도 아무 일 없었을 텐데.
“아, 맞다. 민우 선배!”
날벼락 같은 첫 키스 때문에 공황 상태였던 재인은 그제야 민우의 전화를 상기했다.
전화를 건 것도, 문자를 보낸 것도, 예상대로 민우였다.
[재인아, 자고 있겠구나. 늦은 시간에 연락해서 미안하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만. 서연이가 결혼을 안 하겠대.]
[암튼 미안하고 내일 연락하자.]
‘서연 언니가 결혼을 안 한다고 했어?’
안타깝게도 불길한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재인은 걱정이 되어 민우에게 연락할까 망설이다, 결국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조금 전에 벌어진 일, 그러니까 도혁과의 첫 키스로 머릿속이 가득 차, 다른 것이 들어갈 한 치의 틈도 없어서.
아무리 잊으려고 애를 써도, 뫼비우스의 띠처럼 재인의 생각은 계속 도혁에게로 되돌아왔다.
“아이참, 내일 회사에 어떻게 가지?”
도혁과 마주친다고 생각하자, 어디라도 좋으니 도망치고 싶었다.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빨리 잠이나 자야겠다.’
그날 밤.
침대에 누운 재인은 바람과는 달리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바로,
눈만 감으면 눈앞에서 동동 떠다니는 도혁의 선홍빛 입술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