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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내가 남자로 보이긴 하나? (44/129)


44화. 내가 남자로 보이긴 하나?
2022.11.01.


이튿날, 일요일.

도혁의 펜트하우스는 시베리아 벌판을 방불케 하는 썰렁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전날, 재인은 규민과 영화를 보고 도혁이 신경 쓰여 일찌감치 돌아왔다.

그러나 그녀를 반갑게 맞아준 것은 산더미 같은 일이었다.

재인은 토요일인 어제저녁부터 휴일이 끝나가는 지금까지 쭉, 삼시 세끼를 시켜 먹어가며 눈이 빠지게 컴퓨터만 붙잡고 있었다.

어느새 도혁은 못 말릴 워커홀릭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일하는 내내 재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필요한 말 외에는 입도 열지 않았다.

며칠 사이에 180도 달라진 도혁 때문에 재인은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뿐.

일체의 딴생각을 할 겨를도 없을 만큼 바삐 일을 쳐내야 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밤 11시가 되어서야 도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혁이 제 방으로 사라지자 재인은 식탁 위에 쓰러지듯 엎어졌다.


‘와, 이 지독한 인간! 어떻게 사람이 잠시도 안 쉬고 일만 해? 혹시 어제 놀고 왔다고 복수하는 거?’

재인은 온몸을 불사르듯 일에 열중하는 도혁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

잠시 엎드려 있던 재인은 몸을 일으켜 주섬주섬 테이블 위를 정리했다.

재인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고장 났어.”

언제 방에서 나왔는지 도혁이 재인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깜짝 놀란 재인이 뒷걸음질 치며 물었다.


“뭐, 뭐가요?”

“내 방 욕실 수도. 뜨거운 물이 안 나와.”

“네? 갑자기요?”

“며칠 전부터 이상하긴 했는데, 지금은 아예 안 나오는군.”

도혁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대답했다.

큰일이긴 하네.

아침저녁으로 하루 두 번씩 꼭 샤워를 하는 도혁이었다.

지은 지 얼마 안 된 초호화 펜트하우스의 수도가 벌써 고장 나다니.


‘이거 이거,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부실공사인 거 아니야?’

재인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내일 수리 기사를 불러야겠네요. 야간에도 출장을 오시려나?”

“그럼 나 먼저 씻지.”

“네, 그러세요.”

재인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도혁은 성큼성큼 걸어가 재인의 방 옆에 붙어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딸깍.

욕실 문이 닫히고 곧이어 물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재인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팀장님과 같은 욕실을 써야 하는 거야?’

그동안은 도혁은 자기 방에 딸린 개인 욕실을, 재인은 밖에 있는 욕실을 써왔다.

제 방에 들어간 도혁은 늘 머리까지 단정하게 말린 말끔한 모습만 보여줬다.

그래서 재인은 그가 씻는다는 것 자체를 의식한 적이 아예 없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늘 사용하던 욕실에서 도혁이 샤워를 하고 있다니.

갑자기 물방울 튀기는 소리 하나하나까지 신경이 곤두서는 재인이었다.


‘뭐, 뭐야? 원래 집주인이 자기 욕실 쓰겠다는데, 내가 뭘 그렇게 신경 써?’

그러면서도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켜버렸다.

다음 순간, 재인은 욕실 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안 되겠다! 일단 방으로 들어가자.’

행여 욕실 문이 벌컥 열리면 어쩌나 싶어,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방 앞까지 걸어갔다.

숨죽이며 방문을 살짝 열고 조심스레 문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Rrrrrrr. Rrrrrrr.

바지 주머니 속에서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화들짝 놀란 재인은 다급히 전화를 받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여보세요?”

―재인아, 괜찮아? 숨넘어가겠다.

유라였다. 타이밍도 참.

두근두근.

두근두근.

재인은 좀처럼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어쩐 일이야?”

―이 까칠한 반응은 뭐지? 뭘 하고 있었길래 이러시나?

“하긴 뭘 해. 그냥 방에 있지.”

―그래? 난 또 차 팀장님이랑 분위기 좋은데 내가 깼나, 했네.

장난 섞인 유라의 말투에 재인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거 아니니까 이상한 소리 좀 그만해! 지금 팀장님 씻고 계시거든.”

―꺄아악! 씻고 뭐 하시려고? 난 몰라!

까르르.

유라는 호들갑을 떨며 짓궂게 웃었다.


“최유라, 자꾸 이럴 거면 끊는다. 너 팀장님 얘기 캐묻고 싶어서 전화한 거지?”

―아니야. 그냥 심란해서 걸었어.

유라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뭐 때문에?”

―실은 나 어제 지훈 씨 만나러 갔거든.

“지훈 씨가 누구야?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그새 소개팅이라도 한 건가?


―아, 내가 이름은 말 안 해줬나? 옥탑방 남자 이름이 성지훈이야.

“뭐? 넌 정말, 거길 왜 또 가! 내 말 듣고 마음 깨끗이 접은 거 아니었어?”

―그때야, 네 맘 떠보려고 연기한 거였고. 맘에 쏙 드는 남자라 어찌 됐든 한 번 더 만나보려고 했던 거지. 아이스박스도 돌려줘야 하니까 겸사겸사.

어쩐지.

최유라가 순순히 포기할 리가 없지.

재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물었다.


“그래, 그 박식하고 출중한 외모를 자랑하는 서른다섯 살 백수 성지훈 씨는 뭐라시던?”

―그게 말이야, 못 만났어.

“왜?”

―집에 없더라고. 몇 시간 기다려도 안 돌아오길래 그냥 왔지, 뭐. 실은 오늘도 찾아갔는데 못 만났어. 대체 어딜 갔지?

유라의 목소리에는 실망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잘됐네! 인연이 아니야. 인제 그만두자.”

―진짜 그런 걸까?

“당연하지. 만약 사귄다 해도 금방 끝나버릴걸?”

―그래, 네 말이 맞아.

갑자기 유라가 화색이 도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금방 끝나버릴 거면, 그냥 한번 시작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그치?

와! 와!

어떻게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지?

그저 놀랍다, 최유라.


“괜찮긴 뭐가 괜찮아!”

―어머, 벌써 11시가 넘었네? 출근하려면 빨리 자야겠다. 고마워, 재인아!

“뭐? 야, 끊지 마!”

뚝.

유라는 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재인은 유라가 심히 걱정스러웠다.

애초에 유라한테 택배를 찾아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내 탓……인가?’

 

.
.
.

얼마나 지났을까?

침대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던 재인은 부스스 눈을 떴다.

방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욕실에서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 팀장님, 샤워 끝나셨나 보네?’

재인은 갑자기 심한 갈증이 밀려와 주방으로 나갔다.

시원한 맥주 생각이 간절했지만, 냉장고에 식자재만 알차게 든 것을 알기에 아쉬운 대로 찬물이라도 마실 생각이었다.

재인이 정수기 앞에 선 채로 물 한 컵을 쭉 들이켠 그때였다.

딱.

등 뒤에서 병뚜껑 따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뒤를 돌아본 재인은 질겁하며 괴성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언제 왔는지 도혁이 식탁 옆에 선 채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샤워 가운만 걸친 채로.

재인은 황급히 눈을 가리며 뒤로 돌아섰다.


“티, 팀장님, 지금 옷도 안 입고 뭐 하시는 거예요!”

“옷 가져오는 걸 깜박했어.”

아아, 그러셨구나…….

가 아니지!

너무도 평온한 도혁의 말투에 재인은 기가 막혔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서재인 씨, 지금 과민반응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제가요?”

재인이 발끈하자, 도혁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잘 생각해봐. 샤워 가운은 샤워하고 입는 엄연한 옷이야. 그렇지?”

“……그렇죠.”

“난 습관적으로 그걸 입었을 뿐이야. 게다가 옷이 없으니 더더욱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당연히 그랬어야 했겠지.


“그리고 지금 내 신체에서 샤워 가운 밖으로 드러난 부분이라고는 무릎 아래뿐이니, 나는 지금 반바지를 입은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긴 하지.

도혁의 말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남아 있었으니.

그건 바로.

그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네!’

재인은 정색하며 도혁의 말을 받아쳤다.


“그, 그래도 남녀가 유별한데 그러고 계시면 곤란하죠.”

“서재인 씨 눈에도 내가 남자로 보이긴 하는군.”

풋.

가벼운 웃음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재인은 약이 올라 또다시 받아쳤다.


“그럼 팀장님이 남자지, 여자예요?”

“남자 맞지.”

나직한 음성이 재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런데 가끔 그걸 잊는 것 같더군, 서재인 씨가.”

그게 무슨 뜻?

재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리다 흠칫 놀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도혁의 얼굴이 그녀의 코앞에 있었다.

재인은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비치는 그의 깊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가 싶더니, 미친 듯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대책 없이 흔들리는 재인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도혁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그러고는 굽히고 있던 허리를 곧게 펴며 재인을 내려다보았다.


“계속 이러고 있을 건가?”

“……네?”

“서재인 씨도 씻지, 그래? 많이 늦었는데.”

“……!”

재인의 눈이 주먹만 해졌다.

남이야 씻건 말건.

‘씻자’라는 이 순수한 우리말이 이토록 의뭉스럽게 느껴지긴 처음이네.

민망해진 재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돼, 됐어요! 전 이만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재인은 꾸벅 인사하고는 쌩하니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도혁은 허둥지둥 달아나는 그녀를 보며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 * *

방에 들어오자마자 재인은 침대에 철퍼덕 엎어졌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괜스레 부끄러워져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샤워 가운을 입은 도혁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촉촉이 젖은 섬세한 이목구비.

샤워 가운 아래 보기 좋게 벌어진 어깨.

입가에 어린 은은한 미소.


‘짧은 순간에 참 많이도 봤다.’

지우면 지울수록 보란 듯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왜 이래. 나 미쳤나 봐.’

그저 샤워를 마치고 나온 도혁의 모습을 본 것뿐인데.

그에게 안겨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두근거렸다.

위험할 정도로.

번쩍 눈을 뜬 재인은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만 생각하자! 신경 쓰지 말자고!’

자신을 질책하는 것도 잠시.

재인은 조금 전 도혁이 한 말까지 떠올리고 말았다.


「남자 맞지. 그런데 가끔 그걸 잊는 것 같더군, 서재인 씨가.」

귓가에 닿았던 그의 나직한 음성이 재생되면서 명치부터 시작된 간질거림이 온몸으로 쫙 퍼졌다.

처음 느끼는 이상한 기분이었다.


‘찬바람이 쌩쌩 불 때는 언제고, 능글맞긴! 정말 제멋대로야!’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네.

재인은 피부에 닿았던 도혁의 숨결을 애써 지우려는 듯 죄 없는 두 귀를 박박 문질렀다.


“내가 잊긴 뭘 잊었다고! 그럼 자기가 언제는 여자였어?”

일부러 더, 소리 내어 투덜댔다.


“자기가 뭔데 나한테 씻으라고 해? 언제부터 신경 썼다고.”

‘늦었으니까 씻고 어서 쉬어.’

라는 뜻으로 순수하게 받아들일 순 없겠니?

엉큼한 건 서재인, 너야!


“다 좋다, 이거야. 근데 아무리 자기 집이라도 손님이 있는데 샤워 가운만 입고 있으면 안 되지!”

깜박했다잖아.

그리고 무릎밖에 안 보이는데 대체 무슨 상상을 한 거니?

이런! 또 떠올라 버렸다.

재인의 얼굴이 이제는 불타오르는 것처럼 새빨개졌다.


“그만, 그만! 서재인, 너 왜 자꾸 팀장님 편들어? 아아, 머리 아프니까 진짜 생각하지 말자!”

굳센 다짐이 무색하게, 재인의 머릿속에서는 샤워 가운만 입은 도혁의 모습이 끝없이 맴돌았다.

재인이 어찌할 바를 몰라 괴로워하던 그때, 휴대전화 벨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이 시간에 또 누구지? 유라가 할 말이 남았나?’

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전화를 찾았다.

방 안을 몇 번이나 훑어봐도 보이지 않았다.

늘 놔두던 침대 옆 협탁 위에도 화장대 위에도 없었다.


“어디 갔지? 유라 전화를 끊고 나서도 손에 들고 있었는데…….”

재인은 가만히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벨 소리는 분명 방 안이 아니라 밖에서 나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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