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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도련님의 무시무시한 장점 (43/129)


43화. 도련님의 무시무시한 장점
2022.10.29.


잠시 후.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은 성준은 모든 것을 간파한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꿀꺽.

도혁은 괜스레 긴장되어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서재인 씨의 이상형인 자상한 남자가 되기 위해 이것저것 해봤지만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다. 서재인 씨에게 접근하는 주변 남자들 때문에 불안하다.”

성준은 도혁의 고민을 다시 한 번 조목조목 짚어나갔다.


“특히 서재인 씨가 선배 나민우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마음을 돌릴 방법을 모르겠다, 당장 내일 친구 한규민이랑 영화를 보러 가는 것도 몹시 거슬린다, 이 말씀이시죠?”

“…….”

도혁은 대답 대신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상황을 제삼자의 입으로 들으니 더 속이 쓰린 도혁이었다.

잠시 말을 멈추었던 성준이 이내 입을 열었다.


“도련님, 이제 전략을 바꿀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어느새 성준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걷혀 있었다.


“어떻게요?”

눈이 번쩍 뜨인 도혁이 갈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성준은 워워, 진정하라는 듯 눈을 감았다가 뜨고는 나직이 말했다.


“서재인 씨를 위해 짐도 들어주고, 샌드위치도 준비하고, 일을 중단하면서까지 같이 시간도 보내고, 그 밖에도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을 많이 하셨죠. 그 정도면 도련님으로서는 이미 엄청난 노력을 하신 겁니다.”

“그렇죠.”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지.

도혁은 서재인에게 미쳐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자각했다.

성준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는 노력은 아주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서재인 씨에게 통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제 다른 전략을 구사해야 할 때입니다.”

“다른 전략이라면……?”

도혁의 희망 섞인 질문에 성준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성공학에서는 약점을 메꾸기보다 강점을 키우는 게 훨씬 이득이라고들 하죠.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는 도련님의 가장 큰 장점을 돋보이게 하는 데 주력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가장 큰 장점?”

눈을 크게 뜨며 되묻는 도혁에게 성준이 딱 잘라 대답했다.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습니까? 저도 알고, 도련님도 아는 그것.”

“아……!”

도혁은 깨달음에서 우러나온 깊은 탄성을 터트렸다.


 
그렇다.

차도혁은 그 누구도 감히 반박할 수 없는 최고의 장점을 하나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만약 신이 인간을 빚었다면 잔뜩 애정을 몰아넣었을 게 분명한 그의 빛나는 외모였다.

곧게 뻗은 뚜렷한 눈썹,

그 아래 대충 떴는데도 보는 이로 하여금 촉촉하게 젖어 들게 만드는 우수 어린 눈,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부채처럼 펼쳐지는 풍성한 속눈썹,

찡그리는 것마저 예술이 되는 시원하게 뻗은 코,

반듯하게 자리 잡은 붉은 입술과 남성미가 물씬 느껴지는 다부진 턱선까지.

도혁의 외모는 무엇 하나 흠잡을 데가 없었다.

게다가 우월한 키에 잔근육이 적절하게 포진한 다부진 몸도.

굳이 벗어서 보여주지 않더라도, 옷 태만으로도 여심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도련님의 장점을 살리는 데 집중하십시오.”

성준은 다시 한 번 힘주어 못을 박았다.

* * *

그리고 이튿날.

드디어 규민과 영화를 보러 가기로 약속한 토요일이 찾아왔다.

재인은 아침부터 외출 준비를 하면서도 도혁이 어떻게 나올지 걱정돼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엊그제부터 계속 도혁의 심기가 불편해 보여서.

도혁은 회사에서도 재인에게 눈길 한 번을 제대로 주지 않았고, 집에서도 딱 필요한 말만 했다.


‘분명히, 못 가도록 막으려고 하겠지? 계약조항도 있으니까.’

 
[계약 기간 중에는 절대 이성을 사귀지 않는다.]

계약 당시에도 어이없다고 생각했던 이 조항은, 분명 도혁의 사심이 가득 담긴 결과물이리라.

뒤늦게 진짜 의도를 알게 된 재인은 도혁이 더욱 신경 쓰였다.

게다가 규민의 마음까지 눈치챘으니…….

재인의 마음도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영화 먼저 본 것 때문에 이미 규민이가 마음이 상했는데 약속을 취소할 수도 없고……. 빨리 다녀오는 수밖에 없겠지.’

재인은 애써 씩씩하게 걸으며 방 밖으로 나갔다.

거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도혁은 재인의 인기척이 느껴지자 슬쩍 곁눈질을 했다.

‘이제 곧 한 소리 듣겠구나’라며 긴장했던 재인의 걱정이 무색하게, 도혁은 무심한 표정으로 독서에만 집중했다.


‘뭐지? 아무 말 없는 게 더 공포스러운데…….’

그렇다고 그냥 도망칠 수도 없고.

재인은 도혁의 앞으로 다가가 주저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저기, 팀장님…….”

“뭔데?”

도혁은 여전히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다시 말이 짧아졌다. 무섭게.

재인은 자꾸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짜 냈다.


“……그때 일 기억하시죠? 영화 보러 가라고 떠미셔서 어쩔 수 없이 한 약속이요. 그것 때문에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서재인 씨?”

“네?”

도혁이 제 이름을 부르자 재인은 ‘올 게 왔구나!’ 하는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도혁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미리 준비해둔 몇 가지 답안들을 머릿속으로 열심히 되뇌면서.

그런데 웬걸?


“그걸 왜 나한테 얘기하는 거지? 서재인 씨 사생활이니 내 알 바 아닌데. 앞으로는 그런 시답잖은 일,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어.”

“……!”

도혁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재인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서, 마치 정지 화면이 된 것처럼.


‘뭐지? 이런 반응은 예상 밖인데?’

상황 파악이 안 돼 얼떨떨한 그녀의 귀에 서늘한 음성이 날아와 콕 박혔다.


“단,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으면 그만 나가봐도 돼.”

“가도…… 돼요?”

너무나도 순조로운 진행에 당황한 재인이 도혁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도혁은 한쪽 눈썹을 끌어올리며 귀찮다는 듯 툭, 내뱉었다.


“그럼 안 갈 건가?”

“아, 아니요. 다녀오겠습니다!”

마음 바뀌기 전에 빨리 나가야지.

재인은 꾸벅 허리까지 숙여 인사하고는 잽싸게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 앞.

1, 2, 3…….

올라가는 숫자만 멍하니 쳐다보던 재인은 도혁이 한 말을 찬찬히 곱씹어 보았다.


‘사생활이니 내 알 바 아니다, 시답잖은 일이라……. 맞는 말이잖아? 팀장님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고, 규민이랑 약속도 지킬 수 있으니 잘됐지.’

그런데 왜 좋기는커녕 오히려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지.

조금 전의 도혁은 사무적이고 딱딱했던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

얼마 전까지 보였던, 다소 유치하기까지 했던 감정적인 모습과는 완전 딴판인.


‘오늘 영화 보러 가는 것 때문에 못마땅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재인은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그의 행동을 멋대로 해석해서 혼자 우쭐했던 게 창피해서.

도혁은 이제 원래의 이성적인 팀장님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거야말로, 재인이 바라던 바였다.

괜히 도혁과 사적으로 얽혀서 일본으로 떠나려는 계획에 차질이 빚어질까 봐 전전긍긍했으니까.

하지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도혁이 갑자기 왜 돌변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럼 그동안 나한테 했던 말과 행동들은 대체 뭐지?’

의문과 동시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으니,

「99퍼센트,

차도혁이 서재인에게 호감이 있다는 확신.

나머지 1퍼센트,

차도혁이 아주 특이한 별종이라 누구에게나 그렇게 행동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설마 그 1퍼센트? 그럼 애초부터 모든 게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을 수도 있다는 거야?’

그럴지도.

마음이 있다는 것도 짐작일 뿐, 팀장님 입으로 직접 들은 건 아니니까.

차도혁이라면 뭐든 가능한 얘기지.

재인은 번개를 정통으로 맞은 기분이었다.

* * *



“재인아! 여기야, 여기!”

토요일답게 많은 이들로 북적이는 영화관 입구에서 규민이 손을 높이 흔들며 외쳤다.
재인의 눈에 그런 규민을 흘낏거리는 여자들이 들어왔다.


‘그래, 규민이가 객관적으로 멋지긴 하지.’

개인적으로는 전혀 남자로 보이지 않지만.

재인은 이쯤 되면 자신에게 되묻고 싶을 정도였다.

옛날에도 그렇고 다시 만난 지금도 왜 규민에게는 조금도 끌리지 않는지.


‘너무 편해서 그런가?’

제멋대로인 데다 종잡을 수 없어 가슴 철렁할 때가 많은 도혁과는 극과 극이었다.

이 상황에서마저 자연스럽게 도혁을 떠올린 재인은 흠칫 놀라며 도리질을 쳤다.


‘자꾸 왜 이래? 과대망상증도 아니고.’

그런 재인을 보고 규민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 오는 길에 많이 추웠나 봐. 볼이 빨갛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다행이고. 배고프지? 표 먼저 끊고 밥 먹으러 가자. 이 근처 맛집 알아놨어.”

“응, 그러자.”

규민은 빙긋 웃으며 매표소를 향해 앞장섰다.

재인은 그 뒤를 따라가며 재차 다짐했다.

차도혁 생각 절대 금지!

라고.

* * *



‘이건 분명 신의 농간이야.’

공교롭게도.

규민이 재인을 안내한 곳은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초밥집이었다.

재인의 얼굴이 굳자 규민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유라 말로는 네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초밥이라던데, 아니었어?”

“……으응, 좋아하긴 하지.”

덕분에 몹쓸 차도혁이 또다시 떠올라 버렸다는 게 문제지만.

최유라가 이렇게 고마울 때가 다 있나.

재인은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차도혁을 꼭꼭 붙잡아 꾹꾹 눌러두었다.

주문을 마친 규민이 재인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기, 재인아……. 넌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오늘 데이트를 한다는 생각으로 나왔어.”

“뭐?”

순간 재인은 가슴이 철렁했다.


“이제 눈 가리고 아웅은, 그만하려고. 이미 충분히 먼 길로 돌아왔으니까.”

규민이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재인아, 나, 너 좋아해. 7년 전에도, 지금도 여전히.”

“……!”

규민이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고백할 줄이야.

재인은 너무 놀란 나머지 말문이 막혀버렸다.


“많이 놀랐지? 갑자기 이런 데서 얘기해서 미안해. 이번에는 꼭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어.”

“아…….”

“나를 친구로만 보는 것도 알아.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을래?”

규민에게서는 처음 보는 심각하고 초조한 표정이었다.

이 순간, 재인은 자괴감이 들었다.

이런 규민을 앞에 두고서도, 또 무의식중에 차도혁이 생각나 버려서.


‘진짜 나 왜 이러지? 이러면 규민이한테 너무 미안하잖아.’

음음.

재인은 잠긴 목을 가다듬고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규민아, 고마워. 근데 나 3월에 일본으로 유학 가. 지금은 누굴 만날 겨를이…….”

“알아, 유라한테 다 들었어. 그래도 난 상관없어.”

“상관없다고?”

“네 마음만 확실하다면 난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어.”

규민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아! 지금 당장 결론 내리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줘. 부탁이야.”

“……으응.”

재인은 이렇게까지 나오는 규민을 차마 매정하게 끊어낼 수 없었다.

규민이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물었다.


“재인아, 혹시…… 다른 이유가 더 있는 건 아니지? 따로 마음에 담아둔 사람이 있다거나…….”

“아니야. 없어, 그런 거.”

“정말이지?”

“응.”

재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규민은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렇게 기뻐하는 규민을 보며, 재인은 살짝 양심에 찔리려다 말았다.


‘뭐, 팀장님이 자꾸 생각나긴 하지만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절대!

절대! 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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