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그녀에게 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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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그녀에게 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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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그녀에게 미치다
2022.10.25.
떠보는 듯한 도혁의 말에 뜨끔한 재인이 펄쩍 뛰었다.
“그럼요, 당연히 혼자 갔죠.”
“흠. 알았어요.”
서류 위로 시선을 옮긴 도혁은 여전히 서 있는 재인을 힐끔 쳐다보며 무심히 말했다.
“서 주임, 거기 계속 서 있을 겁니까?”
“아니요! 지금 나갑니다.”
재인은 꾸벅 인사하고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팀장님이 갑자기 왜 저러시지? 사람 무안하게.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나?’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자리에 앉는 재인에게 나희가 ‘몹시 궁금 모드’를 켜고 물었다
“서 주임, 표정이 왜 그래요? 팀장님이 뭐라고 했어요?”
“속이 안 좋다고 샌드위치 안 드신대요.”
“그게 다예요? 자리 비웠다고 뭐라고 안 해요?”
대놓고 실망하는 나희를 보자, 재인은 저도 모르게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강 대리님, 집에 안 가요?”
“왜요? 나 보내고 팀장님이랑 둘이 뭐 할 일이라도 있어요?”
나희가 도끼눈을 뜨고 물었다.
‘있었지. 너 때문에 없어졌지만. 그나저나, 팀장님 때문에 남아 있는 게 맞았구나.’
재인은 문득 전에 도혁이 나희에 대해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런 타입 별로야.」
강나희, 고생이 많다.
재인은 이 순간에도 티 나게 팀장실을 힐끗거리는 나희에게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다.
뒤이어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 하나가 있었으니,
‘가만. 그렇다는 것은? 팀장님 타입은…… 바로 나?’
철철 넘치는 매력을 꼭꼭 숨겨놨는데 용케도 알아보셨네?
재인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곧이어 양쪽 입꼬리가 하늘을 향해 치켜 올라가 있음을 깨달은 재인은 화들짝 놀랐다.
‘그런 걸로 기뻐하지 마!’
위험했다.
재인은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버리려는 듯 마구 고개를 저었다.
‘신경 끄고 일이나 하자, 일!’
재인은 크게 기지개를 켜고 다시 남은 업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키보드 두드리는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잠깐? 그러고 보니 팀장님이 존댓말을 쓰셨네? 서재인 씨가 아니라 서 주임이라고 하고.’
스파이한테 왜 존댓말을 해야 하냐며, 둘이 있을 때는 늘 말도 놓고 이름으로만 불렀으면서.
이제 의심을 거둔 건가 싶어 안도하는 것도 잠시.
재인은 도혁과의 사이에 묘한 거리감이 느껴지면서 가슴 한구석에서 왠지 모를 서운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왜 이러니, 너.
전엔 뭐, 얼마나 가까웠다고?
머릿속에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도혁 때문에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 없는 재인이었다.
* * *
재인이 나가자 도혁은 다시 자리에 앉아 일에 몰두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손에 든 서류는 사정없이 구겨져 있고, 꽉 쥐고 있는 펜은 부러지기 직전이었다.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으락푸르락했다.
‘나랑 같이 저녁 먹으러 가기로 했으면서. 그랬으면서, 나민우랑 샌드위치를 먹어? 그것도 둘이서 아주 정답게?’
생각지도 않던 한규민의 등장에 긴장하여, 재인이 마음에 두고 있었던 나민우라는 존재를 잠시 잊은 게 실수였다.
조금 전, 재인이 신이 나서 나민우와 나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도혁은 감전된 듯 머리가 얼얼했다.
울컥 솟구친 질투심에 떠밀리듯 1층 로비에 있는 카페로 달려갔다.
예상대로 재인은 민우와 함께 차를 마시며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즉시 카페 안으로 뛰어 들어가 재인을 데리고 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질투에 눈이 멀어 볼썽사나운 꼴을 많이 보인 탓에, 차마 나설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잠시 먼발치에서 지켜만 보던 도혁은 제 모습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져 곧장 사무실로 돌아온 것이었다.
‘나한테는 그렇게 웃어주지도 않았으면서…… 너무하네.’
도혁은 눈앞의 서류가 머릿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민우와 이야기하며 환하게 웃고 있던 재인이 자꾸만 떠올라서.
재인과 함께 지내면서 많이 가까워진 것 같다고 우쭐했었는데.
둘이 같이 있을 때 재인이 이전보다 한결 편안해 보였는데.
그래서 이제, 자신에게 조금은 마음이 열린 건가 싶었는데.
도혁은 그동안의 노력이 헛수고가 된 기분이었다.
도혁의 질투심을 가장 자극한 건, 나민우와 만난 것을 필사적으로 숨기려는 재인의 행동이었다.
분명 해코지라도 할까 봐 나민우를 보호하려는 거였겠지.
일전에도, 경계하는 도혁의 앞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민우를 감쌌던 재인이었다.
「민우 선배는 제가 지금까지 만났던 남자 중에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에요.」
「내게 간곡히 부탁할 정도로…… 나 팀장이 그렇게까지 소중한가?」
「당연하죠.」
가장 믿을 만하고 소중한 사람.
서재인한테 나민우는 그런 존재라고 했었다.
‘한규민보다 나민우가 더 큰 문제였어.’
도혁의 가슴속에서 또다시 불쾌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하지만 다음 순간,
불현듯 놓치고 있던 한 가지가 생각났다.
서재인은 한규민과 영화를 보러 갈 것이다.
이는 곧, 나민우와 아직은 깊은 관계가 아니라는 증거 아닌가?
도혁이 아는 한, 서재인은 절대 양다리를 걸치거나 어장을 관리할 사람이 아니었다.
‘서재인 씨가 나민우를 일방적으로 짝사랑하는 건가? 그럼 나는 대체 뭐야? 내 앞에서 얼굴도 빨개지고, 내 얼굴도 자꾸 쳐다봤으면서.”
그 순간. 재인이 민우와 카페에서 화기애애하게 샌드위치를 먹다가, 갑자기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정말이지 앞뒤 안 가리고 튀어 나갈 뻔한 걸 간신히 참았는데.
‘나 말고 다른 남자 앞에서도 얼굴을 붉히다니!’
재인이 가져다준 샌드위치를 보는 순간, 그때의 감정이 떠오르는 바람에 퉁명스럽게 대한 것이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유치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차도혁, 진짜 뭐 하는 거야? 후계자가 되느냐 마느냐 갈림길에 선 중요한 시점에.’
미친 거지.
마침내.
도혁은 솔직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서재인에게 단단히 미쳐 있음을.
* * *
팀장님이 이상하다.
야근한 다음 날 아침.
휴게실에서 갓 내린 커피를 마시며 재인은 미간을 찡그렸다.
어젯밤부터 도혁의 행동이 뭔가 이상했다.
눈도 잘 안 마주치려고 하고.
말을 할 때도 딱딱한 말투에 존댓말만 쓰고.
퇴근 후 집에 돌아와서도 평소와는 달랐다.
당연히 초과근무하자고 할 줄 알았는데 그냥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대체 왜 그러시는지?’
평소에는 차려주면 군말 없이 먹고 가던 아침밥도, 오늘 아침에는.
「팀장님, 좋아하시는 북엇국 끓였어요. 어서 드세요.」
「됐습니다. 속이 안 좋아서.」
「어제도 그러시더니 또요? 병원 가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됐습니다. 회사에서 봅시다.」
도혁은 아예 식탁을 쳐다보지도 않고 나가버렸다.
마주칠 때마다 찬바람이 쌩쌩 불어, 이제는 말 붙이기도 무서운 재인이었다.
단순히 화가 났다고 하기엔 조금 느낌이 달랐다.
마치, 도혁이 온몸으로 시위하는 것 같달까?
‘나 기분 별로니까 알아봐 줘’라고.
‘뭐야, 꼭 삐진 사람처럼.’
차도혁이 삐져?
뭐 때문에?
문득 재인의 머릿속에 그럴듯한 이유가 떠올랐다.
‘아! 내일 규민이랑 영화 보러 가는 게 못마땅해서 그런가?’
영화까지 새치기해가며 가지 말라고 방해했던 도혁이었는데, 자신이 끝까지 가겠다고 해서?
에이, 그렇다고 설마 삐지기까지야 했으려고.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삐진 차도혁이라니 좀 귀엽긴 하네.
푸핫.
재인은 다부진 체격과 준수한 얼굴에 입술만 뾰로통한 도혁을 상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재인아, 뭐가 그렇게 웃겨?”
언제 왔는지 규민이 휴게실 입구에 서 있었다.
재인은 이틀 만에 만난 규민을 반갑게 맞았다.
“어머! 한 과장님, 출장은 잘 다녀오셨어요?”
“우리끼리만 있는데 과장님은, 무슨. 덕분에 잘 다녀왔어.”
워낙 단기간에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서 그런지 규민의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장거리 출장이라 힘들었지?”
“힘들긴 했지. 서재인 보고 싶은 거 참느라.”
“……!”
예전 같으면 또 시작이네, 하고 웃어넘겼을 농담이었을 텐데.
규민의 마음을 어렴풋이 눈치챈 탓인지, 재인은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눈이 티 나게 커진 그녀를 보며 규민이 씩 웃었다.
“벌써 금요일이네. 재인아, 내일 영화 보러 가는 거 기억하지?”
“……으응.”
“예정대로 12시에 영화관 앞에서 만나자. 영화는 들어가서 끌리는 거 보기로 하고.”
“응, 그러자.”
“재인아, 무슨 음식 좋아해? 스테이크랑 로브스터 말고.”
굳이 스테이크랑 로브스터를 콕 찍어 제외하다니.
‘세비야’에서 규민이 무슨 음식 좋아하냐고 물어봤을 때, 도혁이 멋대로 끼어들어 재인이 좋아하는 음식이라고 말한 것들이었다.
재인은 도혁을 견제하는 규민의 의도를 알아채고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난 뭐든 잘 먹으니까 신경 쓰지 마.”
“알았어. 그럼 내가 알아서 모실게.”
“그래. 규민아, 나 바빠서 먼저 들어가 볼게.”
“벌써?”
재인은 아쉬워하는 규민을 남겨두고 휴게실에서 빠져나왔다.
‘세비야에서 왜 팀장님이랑 규민이가 신경전을 벌였는지 이제야 알겠네.’
모든 게 나 때문이었다니.
훈훈한 두 남자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게 마냥 기쁘지만은 않은 재인이었다.
한 사람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피해 다녔던 부담스럽게 잘난 재벌 3세 팀장님, 차도혁.
다른 한 사람은 남자로 느껴지진 않지만 누가 봐도 탐낼 만한 국민 신랑감 남사친, 한규민.
두 사람 가운데 어느 한쪽도 미래의 자신과 함께하는 모습이 상상되지 않았다.
‘그냥 좋아하는 사람 만나서 소박하게 사는 게 꿈인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거였어?’
게다가 석 달 뒤면 한국을 떠나야 하는 마당에 한가롭게 연애 타령이라니.
재인은 그런 사치를 부릴 여유가 없었다.
* * *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십니까?”
“네?”
소파에 앉아 멍하니 턱을 괴고 있던 도혁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건너편에 앉은 성준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점심시간, 식사를 마친 뒤 언제나처럼 성준이 브리핑을 하던 중이었다.
“안색이 좋지 않은 것 같아서요.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계속하시죠.”
도혁은 눈에 힘을 팍 주고 노려보듯 서류를 쳐다봤다.
그걸 본 성준이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실례지만 한 장 넘겨주십시오. 지금 보시는 페이지에 대한 설명은 지난 지 오래라.”
“아……!”
딴생각하고 있었던 걸 제대로 들켜버린 도혁이었다.
성준이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시 쉬었다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피곤하신 것 같은데.”
“……그러죠.”
“도련님.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말씀해주십시오.”
자, 말해보시죠.
이번엔 서재인 씨랑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성준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흠흠.
도혁은 무안한 나머지 눈 둘 곳을 찾아 헤맸다.
도혁은 어제 나민우와 재인이 함께 있는 것을 본 이후, 재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막막했다.
무작정 밀어붙이자니, 재인이 도망갈 것 같고.
재인의 마음이 활짝 열릴 때까지 기다리자니, 나민우나 한규민이 선수 칠까 봐 불안하고.
고민이 깊어지는 사이, 도혁은 재인에게 자꾸만 꽁하게 구는 자신을 보며 깊은 자괴감에 빠져 있었다.
만약 김 실장님이 나였다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이윽고, 주저하던 도혁이 겨우 말을 꺼냈다.
“김 실장님, 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