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확 불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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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확 불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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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확 불어버린다!
2022.10.18.
‘그때 구급차라도 불러서 보내버렸어야 했는데…….’
성준은 유라와 족발을 눈앞에 두고 때늦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어제 할 수 없이 유라를 방에 들인 성준은 1시간 넘게 질문 공세에 시달렸다.
‘그나저나 대체 어느 부분에서 반했다는 거지?’
일부러 찢어지게 가난하고 구제 불가능한 백수를 훌륭하게 연출했건만.
맥락 없이 문학과 예술에 관한 얘기가 나왔을 때 흥분해서 해박한 지식을 숨기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긴 했다.
그나마 머리로 눈을 가린 덕분에 유라가 알아보지 못한 게 천만다행이었지만.
성준은 열심히 족발삼매경에 빠진 유라를 보며 생각했다.
‘참, 독특한 여자야.’
* * *
대산F&G 20층.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분주한 오전 시간.
재인은 휴게실에서 기지개를 켜며 쏟아지는 졸음을 쫓고 있었다.
하아아암. 하암.
하품이 끊이지 않고 계속 터져 나왔다.
지난밤 역시 창피함에 몸부림을 치다가 늦게 늦게 잠이 든 탓이었다.
‘팀장님이랑 살다가는 피 말라 죽기 전에 수면 부족으로 먼저 죽겠어. 어휴, 커피나 마시자.’
온몸의 혈관이 카페인을 부르짖고 있었다.
재인이 졸린 눈을 비비며 막 커피머신 앞에 섰을 때였다.
누군가 불쑥 휴게실 안으로 들어왔다.
재인을 잠 못 들게 한 장본인, 차도혁이었다.
“어?”
“흠.”
휴게실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둘만 있는 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오늘따라 왠지 더 어색했다.
“팀장님, 커피 드시려고요?”
먼저 어색한 분위기를 깬 건 재인이었다.
“어.”
“먼저 내리세요.”
“아니야. 서재인 씨 먼저 해.”
“괜찮아요, 팀장님 먼저…….”
커피머신 앞에 있던 재인이 자리를 비키려 하자 도혁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재인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아, 미안.”
“괘, 괜찮아요.”
황급히 재인의 팔을 풀어준 도혁은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재인은 머뭇머뭇하다 먼저 커피를 내렸다.
지이잉.
뻘쭘한 분위기 속에 하릴없이 커피 나오는 것만 쳐다보고 있는 재인에게 도혁이 말했다.
“서재인 씨, 오늘도 저녁…… 같이 먹을까?”
“네?”
“어제 못다 한 일 얘기도 들을 겸.”
두근.
재인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뭐야, 이러면 꼭 데이트 신청하는 것 같잖아?’
계속 이런 식으로 경계선을 넘나드는 건 위험한데.
침묵이 길어지자 도혁의 눈빛이 심판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초조하게 바뀌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재인은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이윽고 재인이 우물우물 말했다.
“……그럴까요.”
뭐, 어제 일 얘기를 하다 끊긴 건 사실이니까.
어디까지나 공적인 만남인 걸로.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끝낸 재인은 발그레 볼을 붉혔다.
그제야 도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럼 6시 반에 봅시다.”
도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군가 휴게실 안으로 들어왔다.
“6시 반에 무슨 일 있어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나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재인과 도혁을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 강 대리가 눈치챘나?
재인은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둘러댔다.
“야, 야근 얘기였어요. 6시 반에 보고서 갖다 달라고. 그렇죠, 팀장님?”
“흠흠. 맞아요. 그럼 이따 봅시다.”
도혁은 헛기침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재인도 따라 나가려고 하는데 나희가 뱁새눈을 뜨고 추궁하듯 물었다.
“서 주임, 오늘도 팀장님이랑 야근해요?”
“네. 맨날 하는 건데요, 뭐. 그럼 먼저 나가볼게요.”
제풀에 찔린 재인은 멋쩍게 웃어 보이며 황급히 휴게실에서 벗어났다.
* * *
집무실로 돌아온 도혁은 산처럼 쌓여 결재를 기다리는 서류들을 하나하나 검토했다.
서류를 넘기고는 있지만, 재인과 일을 빙자한 데이트를 할 생각에 내용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거 정말 큰일이네.”
도혁이 혼잣말을 하며 실없이 웃는데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들어와요.”
문이 열리고 연지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팀장님, 바쁘세요? 잠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괜찮아요.”
팀장실 문이 닫히자 연지가 선 채로 도혁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왜 그래? 할 말 있으면 어서 해.”
“오빠, 할아버지 말대로 정말 세정 언니랑 결혼할 거야?”
몹시 못마땅한 말투였다.
도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결혼 같은 거 안 해.”
“할아버지 고집 알면서, 어떻게 꺾으려고?”
“그건 내가 알아서 해. 넌 신경 쓸 거 없어.”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서 주임님이랑 관련이 있는데!”
유라의 입에서 재인의 이야기가 나오자 도혁은 뜨끔했지만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서 주임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시치미 그만 떼시지. 오빠, 서 주임님이랑 같이 살잖아.”
이런! 도혁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연지가 할 말이 있다고 했을 때 재인에 관해 물어볼 거라는 걸 짐작은 했었지만.
그래도 동거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도혁이었다.
“지난주 일요일에는 영화도 같이 봤으면서.”
“……!”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듯한 연지의 눈빛에 도혁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럼 어제 걸려서 눈치챈 게 아니라, 그전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어떻게 알았지? 서재인 씨가 얘기했을 리는 없고…….’
도혁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연지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오빠 엄청 티 나거든. 서 주임님한테만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일부러 장난치는 남자애처럼 굴잖아.”
내가?
나름 잘 숨기고 있다고 생각해온 도혁으로서는 충격이었다.
혹시 다른 팀원들도 눈치챈 건가?
“아직 사귀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두 사람 무슨 이유로 같이 사는 거야?”
“넌 알 거 없어. 신경 꺼.”
“치. 할아버지한테 확 불어버린다!”
“야, 이연지 너!”
발끈하는 도혁의 모습이 재밌는지 연지가 까르르 웃었다.
“농담이야. 내가 서 주임님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일부러 피곤할 일을 만들겠어.”
“비밀, 절대 지켜.”
“알았어. 암튼 오빠가 여자 보는 눈은 탁월하네. 솔직히 서 주임님, 오빠한테 아까워.”
“내가 어때서?”
“무뚝뚝하지, 주변머리 없지, 워커홀릭이지, 사교성 제로지, 말 쌀쌀맞게 하지…… 잘생긴 것 빼면 별 장점이 없어.”
연지가 일말의 망설임 없이 속사포처럼 팩폭을 날리자 도혁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연지, 자꾸 기어오른다?”
“암튼 그동안 그렇게 도와줬는데도 어쩜 이렇게 진전이 없어? 오빠 하는 거 보니까 가만두면 안 되겠어.”
“뭐?”
“오빠, 한 과장님 적극적인 것 좀 봐. 그러다 서 주임님 뺏긴다?”
“……도와줘? 너 그럼 다 알고 일부러?”
연지는 대답 대신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현듯 도혁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일들이 있었다.
연지는 가끔 뜬금없이 팀장실에 들어와서 바쁜 도혁을 붙잡고 팀원들에 대해 주절주절 늘어놓곤 했다.
심심해서 수다를 떠는 건 줄 알고 귀찮아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대부분 재인에 관한 이야기였다.
「서 주임님 꿈이 파티시에래. 내년에 일본제과제빵학교 다닐 거라던데? 나중에 놀러 가야지.」
그래서 도혁은 친분이 있는 일본제과제빵학교 이사장에게 재인을 잘 부탁한다고 이미 얘기해두었다.
「오빠, BOC라는 밴드 들어봤어? 서 주임님이 팬이라고 해서 노래 들어봤는데 완전 신나. 이번에 콘서트 하는데 표를 못 구해서 엄청 아쉬워하더라고.」
도혁은 곧장 성준에게 부탁해 BOC 콘서트 티켓을 구했다.
공연이 있는 토요일에 일을 핑계 삼아 재인을 불러내서 공짜표가 생겼다며 넌지시 같이 가자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전에 재인이 사표를 내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졌던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회식 때 규민을 떼어내 준 것도 연지였다.
「한 과장님, 저도 목동인데 저랑 같이 가요.」
「그럼 서 주임님은 팀장님이 책임지시면 되겠어요.」
그런 거였다니!
도혁은 뜻밖의 깨달음에 어안이 벙벙했다.
연지는 생긋 웃으며 마지막 당부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오빠, 이제부터라도 잘 좀 해봐. 내가 보기엔 서 주임님도 오빠가 싫지 않은 것 같으니까.”
탁.
팀장실 문이 닫혔다.
혼자 남은 도혁의 입에서 자꾸만 피식,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쬐끄만 게 많이 컸네. 기특하게 오빠 도와줄 줄도 알고. 그나저나 내가 싫지 않은 것 같다고?’
노력한 보람이 있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도혁은 문득 어젯밤 일이 떠올라 혼자서 얼굴을 붉혔다.
잘 참았다, 차도혁!
다시 생각해봐도 위험한 순간이었다.
있지도 않은 귀신 덕분에 도혁은 재인과 좀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몸도.
마음도.
* * *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난 7시.
재인은 아까부터 자꾸만 시계에 눈길이 갔다.
나희에게 뱉어놓은 말이 있어서, 가볍게 야근하다 약속대로 도혁과 저녁을 먹으러 갈 생각이었다.
도혁도 자꾸만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걸 보니 재인과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뜻밖의 불청객 나희가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덕분에 재인도 도혁도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몇 개 안 되는 핑계들로 돌려막기를 해가며 어떻게든 야근을 회피해왔던 나희가 자진해서 남아 있다니.
도혁이 샌드위치를 돌렸을 때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강 대리님, 퇴근 안 해요?”
재인이 조심스레 묻자 나희가 까칠하게 받아쳤다.
“왜요? 내가 있으면 안 돼요?”
“그게 아니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서 주임은 서 주임 일이나 해요.”
나희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지난번에 도혁의 앞에서 의사랑 데이트한 일을 얘기한 것 때문에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는 게 분명했다.
가뜩이나 도혁에게 잘 보이려고 애를 써도 별 성과가 없어 바짝 약이 오른 강나희였는데.
거기에 쓸데없이 물고 늘어져 시간을 낭비하게 했다는 이미지만 각인시켰으니 괴로울 만도 했다.
그래서 이제는 어울리지도 않게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서 이미지를 쇄신하려는 건가.
부정적인 기운을 온몸으로 뿜어대는 나희와 같이 있는 게 불편하기만 한 재인이었다.
“재인아, 오늘도 늦게까지 일해?”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 출입문을 쳐다보니 민우가 서 있었다.
“아, 선배! 지금 퇴근해요?”
“응. 규민이는 어디 갔어? 어제부터 안 보이던데.”
“아, 출장 가서 내일 올 거예요.”
도혁은 제가 한 말을 충실히 실천하느라 규민을 아주 멀리 보내버렸다.
“그렇구나. 어? 강 대리도 남아 있었네요?”
민우도 처음 본 나희의 야근하는 모습에 놀란 눈치였다.
나희가 자동반사적으로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네. 오늘 일이 좀 많아서요.”
어이, 갭이 너무 크잖아!
재인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었다.
“재인아, 바쁘지 않으면 1층에서 차 한잔할래?”
민우의 말을 들은 재인은 저도 모르게 팀장실을 흘낏 쳐다봤다.
‘강 대리가 버티고 있으니 오늘 팀장님이랑 식사하러 가긴 힘들 것 같고……. 잠시 나갔다 오는 건 괜찮겠지?’
재인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요. 잠깐은 괜찮아요.”
“어머, 두 분 사이가 정말 좋아 보여요.”
나희가 뼈 있는 말을 던졌다.
“그런가요? 재인이랑은 대학 때부터 친했으니까요.”
“선배, 어서 가요.”
재인은 황급히 민우의 등을 떠밀었다.
잠금장치가 풀린 나희가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할지 모르니까.
한편, 재인이 자리를 비워 혼자 남겨진 나희는 호시탐탐 팀장실을 엿보고 있었다.
‘아우, 억지로 앉아 있는 것도 힘드네. 그나저나 서 주임이랑 팀장님이랑, 진짜 뭔가 있는 거 아니야?’
휴게실에서 재인과 도혁이 같이 있던 모습이 계속 신경이 쓰였다.
‘안 되겠어. 팀장님한테 좀 더 적극적으로 밀어붙여 봐야지.’
나희가 굳게 닫힌 팀장실을 쳐다보며 다짐을 하는 그 순간.
기막힌 타이밍으로 우진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희 씨가 뵙고 싶다고 하니 어머니가 정말 기뻐하시네요. 내친김에 이번 주 토요일 저녁이 어떻겠냐고 하시는데 괜찮으세요?]
도혁의 눈에 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상황에 우진의 어머니 비위까지 맞춰줘야 한다니.
짜증이 솟구쳐 인상을 찌푸린 나희의 머리 위로 서늘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강 대리, 서 주임은 어디 갔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