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나랑 먹는 건 어떻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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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나랑 먹는 건 어떻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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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나랑 먹는 건 어떻지?
2022.10.15.
잠시 후, 재인을 태운 도혁의 차가 ‘스시하루’라는 초밥집 앞에 멈춰 섰다.
간판 아래 바둑판같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벽에 걸린 화려한 색채의 커다란 일본 전통문양 부채가 눈에 들어왔다.
목조로 된 깔끔하고 밝은 내부에는 길쭉한 카운터를 따라 의자가 줄지어 있었다.
익숙지 않은 분위기가 낯설어 재인은 가게 이곳저곳을 곁눈질하며 도혁의 뒤를 따랐다.
도혁을 보자 카운터 너머에 있던 중년 남성이 밖으로 나와 반갑게 맞았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에 앉으시죠.”
재인과 도혁은 남자가 이끄는 대로 카운터 중간에 자리를 잡았다.
“팀장님, 여긴 왜 오셨어요?”
조금 전까지 도혁과 끌어안고 있었던 탓일까?
재인은 자꾸만 도혁의 행동 하나하나에 촉각이 곤두섰다.
‘내가 배고프다고 해서 온 거야?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초밥 먹으러?’
뜻밖의 배려에 재인은 가슴이 술렁였다.
발그레해진 얼굴로 다소곳이 앉아 있는 재인을 보며 도혁이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시간이 남아서. 원래 오늘 저녁에 식사하면서 신제품 진행 상황 듣기로 했잖아.”
“네? 아…….”
무뚝뚝한 도혁의 반응에 재인은 낯이 뜨거워졌다.
‘뭐야, 내 생각해서 온 게 아니었어? 아우, 창피해!’
누가 워커홀릭 아니랄까 봐. 참 알차게도 일하신다.
또 헛물을 켜고 만 재인은 메뉴판을 집어 들며 말을 돌렸다.
“근데 팀장님, 여기 엄청 비쌀 것 같은데요?”
“별로.”
별로?
분위기만 그렇지 의외로 저렴한가?
재인은 대수롭지 않게 메뉴판을 펼쳤다가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오마카세 디너가 인당 20만 원?’
이거면 짜장면이 몇 그릇이야?
재인의 한 달 식비와 맞먹는 돈이었다.
그걸 한 끼에 먹는다고 생각하니, 도혁과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게 새삼스레 실감이 났다.
‘이거 봐, 이거 봐. 이렇게 비싼 걸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한테 왜 사 주겠어? 차도혁 씨, 괜히 일 핑계 대기는.’
재인은 도혁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더욱 확신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녀의 안에서 한 가지 물음이 떠올랐다.
‘그래서 어쩔 건데?’
상대는 무려 차도혁이다.
두 달 뒤면 평생 마주칠 일이 없을지도 모르는.
사는 세상이 달라도 너무나도 다른 재벌 후계자.
그리고 아직은, 같이 있으면 불편하고 긴장되어 피곤한 상사.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혁과 나란히 선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재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았다.
“팀장님, 오늘은 사 주시니까 잘 먹긴 하겠는데요,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세요. 이런 비싼 음식 부담스럽습니다.”
차를 입으로 가져가던 도혁의 손이 멈칫했다.
“……사 준다고는 안 했는데?”
“네?”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재인은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본 도혁이 쿡쿡 낮게 웃었다.
그제야 상황파악이 된 재인은 약이 올라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팀장님, 저 놀리는 거 재밌으시죠? 근데 당하는 전 하나도 재미없거든요?”
“내가 언제 놀렸지?”
와, 저 결백한 표정 좀 보게.
재인은 기가 막혀서 손가락까지 오므려가며 따졌다.
“전에 호텔 레스토랑에서도 그렇고, 이사 갔던 첫날도 그랬었고, 회식했던 날 산책할 때도 그랬고, 아, 일요일에 영화관에서 화장실로도…….”
말을 멈춘 재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변했다.
생각해보니 그 오해, 아직 안 풀렸네.
그렇다고 다시 끄집어내자니 긁어 부스럼만 될 것 같다.
“아, 암튼 기억나는 것만 이 정도예요. 간 떨어질 뻔했던 것까지 다 세보려면 발가락까지 보태도 모자랄 거예요.”
“미안하군.”
도혁은 슬쩍 재인을 쳐다보고는 다시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곧이어 자완무시를 시작으로 직원이 하나씩 하나씩 음식을 내왔다.
하나같이 환상적인 맛이라 재인은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어쩜, 너무 맛있어요!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는 것 같아요.”
“전부터 생각한 건데, 서재인 씨는 먹을 때 가장 행복해 보이는군.”
재인이 감탄사를 연발하자 도혁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그려졌다.
“제 신조가 ‘있을 때 먹자. 이왕이면 맛있게 먹자’거든요. 전요, 좋은 사람들이랑 맛있는 거 먹을 때가 가장 행복해요.”
그 말에 도혁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나랑 먹는 건 어떻지?”
풋!
도혁의 기습 질문에 재인은 코로 밥알이 넘어갈 뻔했다.
이렇게 비싼 음식을 먹여주니 예의상으로라도 ‘너무 감사하고 행복해요’ 내지는 ‘정말 즐거워요’ 같은 말을 해야 할 텐데.
생각만으로도 닭살 돋는 아부성 발언이라 목에 걸려서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재인은 고심 끝에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참 좋아요. 음식에 집중할 수 있어서.”
도혁의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갔다.
“그건…… 나를 없는 사람으로 취급한다는 뜻?”
오, 우리 팀장님 문해력이 꽤 높으시네?
재인은 씩 웃으며 그럴 리가요, 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때마침 직원이 새 접시를 가져왔다.
“어, 오토로다! 팀장님, 어서 드셔보세요.”
도혁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든가 말든가.
기름진 참치 살이 입안에서 살살 녹는 이 순간만큼은 아무 잡념 없이 행복한 재인이었다.
도혁은 먹는 것도 잊은 채 부드러운 눈길로 그런 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귀신 때문에 놀란 건 이제 괜찮은 것 같군.”
“귀신이요?”
아.
유라랑 김 실장님을 깜박 잊고 있었다.
“팀장님, 저 화장실 좀 잠깐.”
재인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옮겨 갔다.
화장실 문이 닫히자마자 유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라는 벨이 울린 지 한참이 지난 뒤에야 너무나도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 재인아!
“유라야, 괜찮아? 미안해. 갑자기 팀장님이 오시는 바람에…….”
―됐어. 어쩔 수 없지, 뭐. 근데 너 어디 간 거야?
“……!”
뜨끔.
재인은 친구를 어두컴컴한 다용도실에 밀어 넣고 혼자만 맛있는 초밥을 먹는다는 게 양심에 찔렸다.
“어어. 팀장님이 차 마시면서 일 얘기 좀 하자고 하셔서……. 넌 집에 가는 중이지?”
―아니. 아직 집 안에 있는데?
“뭐?”
당연히 밖으로 나갔을 줄로만 알았는데.
재인의 예상이 빗나갔다.
“여태 거기서 뭐 해? 김 실장님은?”
―옆에 계시지.
“잘됐다. 죄송하다고 좀 전해드려. 다음에 식사 대접 크게 한다고. 그리고 늦었는데 어서 집에 가.”
―알았어, 족발만 먹고 갈게.
아, 맞다. 족발도 시켰었지.
“족발을 거기서 먹겠다고?”
―방금 왔어. 이왕 시킨 거 먹고 가야지. 배고파서 집에 갈 기운도 없단 말이야. 깨끗이 치우고 갈게.
“그냥 가져가!”
―안 돼. 성준 씨랑 같이 먹어야지. 먹는 것 가지고 치사하게 굴면 안 되잖아?
“성준 씨? 야, 너 김 실장님한테 이상한 소리하면 안 돼!”
―재인아, 걱정 마. 암튼 배고프니까 나중에 얘기하자.
뚝.
전화가 끊겼다.
걱정하지 말라는데 왜 더 걱정이 되는 걸까.
재인은 불안이 엄습해왔다.
‘설마 팀장님이랑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또 다른 걱정이 하나 더.
‘김 실장님, 무사하시겠지?’
유라가 또 운명 타령하는 일이 없기를, 재인은 간절히 바랐다.
* * *
“아! 성준 씨가 왜 낯이 익은지 생각났어요!”
유라가 상추 위에 족발을 올리며 소리쳤다.
유라에게 잡혀 울며 겨자 먹기로 자리를 채우고 있던 성준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제가 아는 사람이랑 많이 닮았어요!”
“……그러시군요.”
“어제 처음 만난 사람인데요, 성준 씨랑 눈 밑으로 이목구비가 비슷해요.”
“흠흠. 세상에 닮은 사람은 많으니까요.”
“실은 부끄럽지만, 너무 멋진 남자라 제가 첫눈에 반해버렸거든요.”
말을 마친 유라가 눈을 내리깔며 수줍게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위로 허리를 숙였다.
성준은 깜짝 놀라 앉은 상태에서 최대한 뒤로 몸을 뺐다.
성준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유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정말 많이 닮았네. 누가 보면 같은 사람인 줄 알겠어.”
”……!”
성준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었다.
“뭐, 그럴 리는 없지만.”
다시 자리에 앉은 유라는 상추쌈을 마저 싸서 입속에 쏙 넣었다.
“그럼요. 세상에 닮은 사람은 많으니까요.”
성준은 멋쩍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지난밤 유라와의 첫 만남을 되짚어 보았다.
.
.
.
“전 평상에 앉아서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하고 나오세요!”
뭐지? 마치 원래 알던 사이인 것처럼 태연한 저 목소리는?
난데없는 불청객 때문에 놀라 방 안으로 뛰어 들어온 성준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떻게 한다. 밖에 있는 여자가 서재인 씨 친구라니. 혹시라도 내가 여기 살고 있다는 게 서재인 씨 귀에 들어가면 곤란한데…….’
2주 전.
성준은 도혁의 부탁을 받고 재인의 옥탑방을 계약했다.
도혁이 재인의 옥탑방을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을 때, 성준은 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어머니로부터 최후의 통첩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결혼 안 할 거면 일주일 내로 짐 싸서 나가!」
자유로운 솔로의 삶을 즐기고 싶어 일찍이 비혼을 선택한 성준이었다. 홀로 되신 어머니를 모시고 계속 살 생각이었으나.
요즘 들어 친구들의 손주 자랑에 자극을 받은 어머니가 독립의 계기였다.
성준에게 손주 보고 싶다며 결혼하라고 달달 볶아대는 통에 벗어날 방법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막상 성준이 진짜 집을 나가버리면 어머니도 포기하시리라 예상하며.
그리하여 몇 달만 살다 갈 생각으로 재인의 옥탑방에 이사 온 성준은 고작 며칠 만에 뜻하지 않은 문제에 봉착하게 된 것이었다.
‘서재인 씨가 자기 일에 도련님이 관련되어 있다는 걸 눈치채면 일이 복잡해질 게 뻔해.’
중요한 프로젝트의 성패가 걸려 있는 상황에 도혁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모른 척 잘 마무리하는 수밖에.
성준은 정체를 숨기기 위해 버리려고 내놨던 후줄근한 초록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머리를 흐트러뜨린 채 밖으로 나갔다.
그가 나타나자 유라가 다소곳이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저 때문에 많이 놀라셨죠? 죄송해요.”
“뭐, 그럴 수도 있지. 잠시만 기다려요.”
열심히 꾸며낸 건들거리는 걸음걸이와 가벼운 말투의 성준은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만년 백수의 표본이었다.
성준은 들고 온 초록색 보랭 가방 안에 아이스박스의 내용물을 옮겨 담고 유라에게 건넸다.
“거, 또 넘어지지 말고 조심해서 들고 가십쇼.”
“어머, 감사합니다. 근데 말투가 좀 달라지신 것 같은데……?”
“내 말투가 어때서?”
퉁명스러운 성준의 반응에 유라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 가방은 다음에 꼭 돌려드릴게요.”
“괜찮아요! 어차피 버리려던 거니까.”
“그럼 고마워서 그런데 다음에 식사라도…….”
“됐어요. 요새 단식 중이라.”
“…….”
철벽도 이런 철벽이 없었다.
안색이 어두워진 유라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잘 가요.”
이제 다 끝났구나 싶어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갑자기 유라가 휘청거리더니 바닥에 주저앉았다.
성준은 황급히 유라에게 달려갔다.
“괜찮아요?”
“네. 근데 발목이…… 아얏! 아까 넘어질 뻔했을 때 접질렸나 봐요.”
“많이 아파요?”
“따뜻한 곳에서 잠깐 쉬면 괜찮을 것 같은데…….”
유라가 덫에 걸린 사슴 같은 눈망울로 슬쩍 옥탑방을 곁눈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