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다른 사람 만나는 건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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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다른 사람 만나는 건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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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다른 사람 만나는 건 싫어
2022.10.08.
연지가 도혁을 보며 툴툴댔다.
“오빠, 같이 오자고 했더니 치사하게 먼저 가?”
“너 차에 태운 거 회사 사람이 보면 내가 신입 사원한테 수작 부리는 줄 안다.”
“치, 핑계는!”
연지는 도혁의 무심한 반응에 입술을 삐죽였다.
고모 차주영의 딸인 이연지는 도혁과 마찬가지로 경영에 참여하기 전, 신분을 숨기고 대산F&G에서 경영수업을 받고 있었다.
경쟁의식이 팽배한 진혁과 달리 연지는 도혁을 순수한 마음으로 잘 따랐다. 도혁이 온 가족을 통틀어 가장 편하게 여기는 이도 연지였다.
“도혁아, 연지 일 잘하고 있니? 너 믿고 거기 보낸 거니까 트레이닝 제대로 시켜줘야 해.”
“네, 걱정 마세요.”
차주영의 당부에 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연지가 앓는 소리를 했다.
“엄마, 말도 마세요. 저 맨날 오빠한테 깨지는 게 일이에요. 회사에서 유격훈련 받는 기분이라니까요.”
“제대로 배우고 있구나? 하하.”
“엄마는 알지도 못하면서! 뭐, 그래도 요즘엔 회식도 같이하고, 간식도 사 주고, 오빠가 많이 유해져서 살 만해요.”
“정말? 너무 일만 해서 걱정이었는데 다행이다.”
오빠 인환이 세상을 떠난 뒤 일찍 철이 든 도혁이 늘 안쓰러운 차주영이었다.
주영의 진심 어린 말에 도혁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그걸 본 연지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도혁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근데 갑자기 사람이 바뀌면 뭔가 있다던데, 오빠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
예상치 못한 기습에 도혁은 놀란 눈으로 연지를 쳐다보았다.
연지는 도혁이 낮에 회사에서 재인을 쳐다보다 딱 걸렸을 때와 똑같이 고개를 기울여 생긋 웃고 있었다.
다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설마 했는데…… 역시 그때 눈치챈 건가?’
도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차분히 말했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갑자기 달라진 이유가 뭘까? 혹시 연애?”
“너 진짜……!”
도혁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자 차주영이 걱정스레 물었다.
“도혁아, 무슨 일 있니?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참, 아버지한테 들었는데 도혁이 너 혼담이 오간다며?”
“할아버지!”
도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차 회장을 쳐다보았다.
다른 가족들도 놀랐는지 일제히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지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오빠, 그게 정말이야?”
“정말이고말고.”
도혁이 입을 열기도 전에 차 회장이 대답했다.
“상대는 누군데요?”
“연지 넌 같은 모임이니 잘 알겠구나, 서진물산 윤세정 양이라고.”
“세정 언니요?”
맙소사!
연지의 입이 딱 벌어졌다.
도혁은 굳은 얼굴로 딱 잘라 말했다.
“할아버지, 전 결혼 생각 없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나는 이미 세정 양을 손자며느리로 점찍었으니 그리 알아라.”
“전 싫습니다.”
“나도 이것만은 절대 양보 못 한다.”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듯 물러서지 않는 두 사람 사이에 차정환이 끼어들었다.
“도혁아, 서진물산이면 지분도 많고 아주 든든한 백이 될 텐데 왜 마다하는 거냐? 아주 전략적인 선택인데.”
“그런 거 관심 없습니다.”
은근히 뼈가 있는 차정환의 말에 도혁은 어이가 없었다.
정환 자신이야말로 돈줄이나 다름없는 MF파트너스 장문수 대표의 딸과 진혁의 결혼을 뒤에서 몰래 추진하고 있으면서.
정환은 합병이라는 그럴듯한 명목 아래, 대산F&G를 비롯한 대산그룹의 주요 계열사들을 MF파트너스에게 매각해 우호지분을 확보하려는 중이었다.
대산그룹을 도혁에게 넘기느니 차라리 회사를 말아먹더라도 크게 한몫 챙기는 쪽을 택한 것이리라.
처음엔 도혁도 이 모든 사실을 차 회장에게 알리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섣불리 얘기했다가는 믿지도 않을 게 분명했거니와.
무엇보다 심장이 좋지 않은 차 회장이 충격을 받고 쓰러질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도혁은 더는 뻔뻔스러운 차정환을 상대하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아버지, 죄송하지만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벌써? 내 말이 못마땅해서 시위하는 게야?”
차 회장이 섭섭해하자 도혁은 애써 웃어 보였다.
“아니에요. 내일까지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어서요.”
“그래, 바쁘면 어서 가봐야지. 또 보자꾸나.”
차정환이 사람 좋게 웃으며 도혁의 등을 떠밀었다.
도혁은 아쉬워하는 차 회장에게 짧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등을 돌렸는데도 제 등에 꽂히는 차정환의 싸늘한 시선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 * *
“역시 재벌은 급이 다르구나! 궁궐이 따로 없네.”
유라가 펜트하우스를 둘러보며 감탄했다.
도혁이 없는 틈을 타 재인이 유라를 불러온 것이었다.
“궁궐은 무슨. 사람 사는 데가 다 똑같지.”
“뭐야, 이 시큰둥한 반응은? 하긴, 막상 살면 좋은지 잘 못 느끼긴 하겠다.”
“내 것도 아닌데, 뭐. 난 수감자나 다름없는 신세라니까.”
“됐고. 자, 여기 네가 그토록 기다리던 반찬. 갑자기 네 예전 집에 갔다 오라고 하는 바람에 엄청 고생했다는 것만 알아둬.”
유라가 커다란 초록색 보랭 가방을 건넸다.
“고마워, 유라야!”
엄마의 정성이 가득 담긴 반찬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재인은 군침을 꿀꺽 삼켰다.
제일 고대하던 어리굴젓을 맛볼 때는 탄성이 터졌다.
“정말 맛있다! 아, 행복해!”
“행복의 기준이 참, 소박하다. 이렇게 소박한 애가 재벌 3세랑 엮이다니 불가사의한 일이야.”
“어차피 두 달 뒤면 엮일 일도 없네요.”
“…….”
갑자기 유라가 재인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재인아, 너 정말 차 팀장님한테 아무 감정도 없어?”
“가, 감정은 무슨! 그런 거 아니라니까 왜 자꾸 그래.”
“하늘에 맹세코?”
“당연하지!”
재인은 괜스레 찔려 더 펄쩍 뛰었다.
그러자 유라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이다. 그럼 내가 도혁 씨 만나도 괜찮은 거지?”
유라의 폭탄선언에 재인은 심장이 철렁했다.
도혁 씨? 갑자기 얘가 왜 이래?
“너 아침에 옥탑방 남자가 운명의 상대라고 했잖아?”
“네가 정신 차리라며. 그래서 깨끗이 접었어. 잘했지?”
잘하긴 했는데.
네가 언제 내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니?
재인이 기가 막힌 얼굴로 쳐다보자 유라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경제력이랑 직업 놓고 보면 도혁 씨 같은 사람이 또 어디 있니? 게다가 얼굴까지 잘생겼잖아.”
“……그렇긴 하지.”
“실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딱 내 스타일이었는데 네가 마음에 걸려서 포기했거든. 근데 아무 사이도 아니라니까, 한번 도전해보려고. 괜찮지?”
그랬던 거구나!
어쩐지 그때 팀장님한테서 살갑게 굴더라니.
여태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유라의 진지한 표정에 재인은 불안이 엄습했다.
“그치만…… 팀장님이 나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다며?”
“생각해보니 아닌 것 같아. 설령 그렇다 쳐도 넌 도혁 씨 안 좋아하니까 상관없잖아? 그리고,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게 돼 있어.”
“……으응.”
“아, 내친김에 도혁 씨한테 내일 만나자고 문자 보내야겠다.”
“뭐?”
재인이 말릴 틈도 없이 유라가 잽싸게 문자를 보냈다.
잠시 후.
지이잉, 하며 휴대전화 진동이 울렸다.
“어머, 도혁 씨도 내일 시간 괜찮대.”
“팀장님이?”
재인이 믿기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자 유라가 해맑게 웃으며 문자를 보여줬다.
[저도 유라 씨 한 번 더 만나보고 싶었는데 잘됐군요. 내일 괜찮습니다.]
발신인은 분명, ‘차도혁’이었다.
재인은 열이 훅 올라왔다.
‘차도혁 씨, 그렇게 가벼운 남자였어? 어? 날 번쩍 안을 때는 언제고! 혹시 아무한테나 다 그러는 거 아냐?’
타들어 가는 재인의 속도 모르고 유라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신나게 말했다.
“도혁 씨랑 잘 되면 네 덕분에 만난 거니까 크게 한턱낼게. 알지? 나 한번 마음먹으면 끝장을 보는 거.”
“……!”
화려한 연애사를 자랑하는 유라는 승률 90퍼센트의 연애 고수였다.
나머지 10퍼센트도 실패한 게 아니라, 애인 있는 사람이 솔로인 척 속였다가 들켜서 유라한테 한 방 얻어맞고 나가떨어진 케이스였다.
천하의 차도혁이라도 넘어가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불현듯,
재인의 눈앞에 무시무시한 장면이 펼쳐졌다.
꼭 껴안은 채 입맞춤을 하려는 듯 서로에게 다가가는 도혁과 유라의 모습이.
“안 돼! 절대 안 돼!”
재인이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친 순간,
유라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왜? 내가 차 팀장님 만나는 거 싫어?”
“아니, 그게…….”
“진즉 이렇게 나올 것이지. 괜히 쇼까지 하게 만들고 말이야.”
“쇼?”
“내가 여기 오기 전에 유민이 전화번호를 ‘차도혁’으로 바꿔서 입력했다, 으이그. 유민이한테 용돈 주면서 문자 보내면 바로 답하라고 얘기도 해뒀었거든.”
“아……!”
뭘 그렇게까지.
최유라, 역시 무서운 집념의 소유자.
입은 있되 할 말을 잃은 재인에게 유라가 확인사살을 했다.
“너 차 팀장님 좋아하지?”
“그, 그건 아니야!”
“아니라고?”
“응. 근데…… 팀장님이 너 만나는 건 싫어.”
“나만? 내가 친구라서?”
“……아니. 다른 사람 만나는 것도 싫어.”
재인의 솔직한 심경이었다.
뭔가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들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처음 겪는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는 재인을 보며 유라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철벽 서재인이 이 정도면 많이 발전했다.”
혼자 늙어 죽진 않겠어.
흐뭇하게 웃던 유라가 갑자기 배를 움켜쥐었다.
“재인아, 배고픈데 족발 시킨 건 언제 와?”
“아, 20분쯤 뒤에 도착할 거야. 일단 뭐 좀 먹고 있자.”
재인은 예쁜 찻잔에 홍차를 따르고 후식으로 사온 빵을 내주었다.
“음. 이제 좀 살 것 같다. 근데 차 팀장님은 언제 오셔?”
“본가에 가셨으니까 아마…….”
재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인터폰에서 은은한 클래식이 흘러나왔다.
족발이 벌써 도착했을 리도 없고.
순간 상황파악이 안 된 재인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지금?”
“뭐? 나 여기 온 거 팀장님이 알면 계약위반이라 큰일 난다며?”
유라의 말에 재인은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맞아! 유라야, 어서 숨어!”
재인은 황급히 주방에 딸린 다용도실 미닫이문을 열고 유라를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에 인터폰을 확인했다.
인터폰 화면에 나타난 익숙한 얼굴은,
“김 실장님이 여긴 어쩐 일이세요?”
뜻밖에도 성준이었다.
재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도련님이 급히 부탁하신 자료가 있어서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 네.”
도혁의 서재로 향하던 성준은 식탁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실례지만 누가 계시나요? 찻잔도 두 개에, 현관에 신발도 두 켤레고…….”
아! 이런, 바보!
재인은 마음이 급해 유라의 흔적을 미처 못 치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책해도 이미 늦은 상황.
할 수 없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김 실장님, 실은 제 친구가 와 있어요.”
“네? 친구라면……?”
성준의 눈이 커지자 재인이 마음을 졸이며 말했다.
“금방 갈 건데요, 팀장님이 아시면 큰일 나거든요? 죄송하지만 비밀로 좀 해주세요!”
재인의 간곡한 부탁에 성준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김 실장님!”
재인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던 그때였다.
띡.
띡띡띡. 띡.
문밖에서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집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올 사람은 딱 한 사람뿐.
차도혁이었다.
.
.
.
“왜 문이 안 열렸던 거지?”
도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집 안에 들어왔다.
“가, 가끔 그럴 때가 있더라고요.”
재인은 손목을 주무르며 멋쩍게 웃었다.
도혁이 못 들어오게 막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손잡이를 잡아당겼던 탓인지 재인은 손목이 욱신거렸다.
“일찍 오셨네요? 이제 겨우 8시 넘었는데…….”
“그렇게 됐어.”
재인을 보자 굳어 있던 도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재인은 저도 모르게 도혁을 따라 배시시 웃었다.
‘내 눈 참, 정직하네. 어떻게 이 간 떨리는 상황에서도 잘생긴 게 눈에 들어오냐.’
남의 떡이 될 뻔해서 그런가?
유라의 농간 때문인지 오늘따라 도혁의 외모가 더욱 빛나 보였다.
제 방을 향해 걸어가던 도혁이 몇 걸음 못 가 되돌아섰다.
“참, 김 실장님은 왔다 갔나?”
“아, 저한테 서류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여기요.”
그 자리에서 재인이 내민 서류를 살펴보며 도혁은 심각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꺼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세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어서 김 실장님한테 직접 물어보려고.”
“아, 안 돼요!”
재인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