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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풀어야 따뜻하잖아 (36/129)


36화. 풀어야 따뜻하잖아
2022.10.04.


떠보는 듯한 도혁의 말투에 재인은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뜨끔했다.

사실 오늘 아침 출근 준비를 할 때 고데기로 머리를 말고 화장도 평소보다 공을 들인 재인이었다.

왜 그랬는지 저도 이해할 수 없지만.

재인은 애써 태연한 척 받아쳤다.


“아쉽긴요. 전혀요.”

“그래? 방금 엄청나게 아쉽다는 표정을 지은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본 건가?”

“아, 그건…… 초밥 때문이에요, 초밥!”

“초밥?”

“어제 뭐 좋아하냐고 물어보시길래 혹시 오늘 초밥 먹으러 가는 건가 해서 기대했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얼굴에 티가 났나 봐요.”

이번에는 도혁의 얼굴에 실망하는 기색이 스쳤다.

나이스! 재인은 속으로 외쳤다.

아주 적절한 임기응변이었어.

졸지에 초밥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버린 도혁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흠. 미안하게 됐군.”

“괜찮아요. 살다 보면 갑자기 일도 생기고 그런 거죠, 뭐.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또 이상한 소리 하기 전에 빨리 도망가야지.

재인이 잽싸게 문으로 걸어갈 때였다.

이어지는 도혁의 목소리가 재인의 발목을 붙잡았다.


“서재인 씨, 원래 회사에서는 머리를 묶고 다니지 않았나?”

“……!”

네, 라고 대답하면 끝나는 간단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 말이 제풀에 찔린 재인의 귀에는 “누구한테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풀고 왔나?”로 들렸다는 게 문제였다.


“이, 일부러 풀고 나온 게 아니라…… 머리를 감았는데 덜 말라서 풀고 온 것뿐이에요!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드라이하다가는 지각할 것 같았거든요. 제가 머리숱이 워낙 많아서……. 이제 다 마른 것 같아서 묶으려던 참이었어요.”

재인이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머리를 묶으려 하자 도혁이 다급히 말했다.


“묶지 마.”

“네?”

 

 
서로를 마주 본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순간적으로 도혁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쳤다. 제가 말해놓고도 놀란 모양이었다.

재인은 머리를 한데 모아 쥔 손을 슬그머니 내리며 물었다.


“왜……요?”

“…….”

두근두근.

도혁은 계속 아무 말이 없었다.

재인은 괜스레 긴장되어 마른침을 삼켰다.

오늘은 일부러 머리도 풀고 나왔는데 좀 예뻐 보여요?

머리에 신경 쓴 거, 티 나요?

그래도 공들인 보람이 있다며 흐뭇해하는 재인의 귀에 뜻밖의 말이 날아들었다.


“머리…… 풀어야 따뜻하잖아. 겨울이라 날씨도 추운데.”

“네? 아…….”

재인은 맥이 탁 풀렸다.

어느새 도혁은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일에 몰두한 상태였다.

잠시 후, 팀장실을 나와 자리로 돌아온 재인은 머리를 하나로 모아 단단히 묶었다.


“어? 서 주임님, 오늘 머리 웨이브 예뻤는데 왜 묶으세요?”

연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재인이 씁쓸하게 대답했다.


“더워서.”

차도혁 씨가 그렇게 보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줄을 미처 몰랐네.

괜히 헛물만 켠 재인은 팀장실을 향해 흥! 콧방귀를 뀌고는 투다다닥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런 재인을 블라인드 틈으로 지켜보던 도혁은 눈썹을 끌어 올리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묶지 말랬더니…… 사무실이 덥나?’

 

* * *

같은 날 정오 무렵,

차대산 회장의 집 앞에 차 한 대가 멈춰 서더니, 성준이 내렸다.

성준은 집사의 안내에 따라 정원과 긴 복도를 지나 차 회장의 서재로 들어갔다.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생신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김 실장.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해.”

“아닙니다, 회장님. 저도 뵙고 싶었습니다. 그간 편안하셨습니까?”

올해 여든다섯인 백발의 노인은 나이는 들었어도 스무 살 청년처럼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지금은 비록 명예 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나 있지만, 현역 시절에는 그를 본 모두가 혀를 내두를 만큼 엄청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

마치 지금의 도혁처럼. 혹은 도혁을 능가하는.


“그럭저럭 잘 지냈지. 자네는 어땠나?”

“저야 늘 성심성의껏 도련님을 보필하고 있습니다.”

“고맙네, 김 실장. 자네가 도혁이 옆에 있으니 내가 두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어.”

차 회장의 진심이 느껴져 성준은 고개를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자네를 보면 자네 아버지가 생각나. 그만한 사람이 없었는데……. 인환이가 저 세상에서도 자네 아버지가 있어서 외롭지 않을 거야.”

차 회장은 15년 전 있었던 비극적인 사고가 생각났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아버지 얘기가 나오자 성준도 숙연해졌다.

도혁의 아버지인 차인환 대표와 그의 비서였던 성준의 아버지는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역주행하는 음주운전 차량에 부딪혀 세상을 떠났다.

그 뒤로 차 회장은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 일체를 지원하며 성준과 그의 어머니를 돌봐주었다.

성준이 도혁을 열심히 돕는 것도 그 고마움에 대한 보답이었다.


“그래, 도혁이는 요새 어떤가?”

“잘 지내고 계십니다.”

“혹시 만나는 여자는 없나?”

꿰뚫어 보는 듯한 차 회장의 눈빛에 성준은 속으로 흠칫 놀랐다.

혹시 재인의 정체를 알고 떠보는 건가 싶어 간이 철렁했다.

다행히 차 회장의 표정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어찌 됐든 곧이곧대로 진실을 밝힐 수는 없는 법.


“없습니다. 늘 업무에 파묻혀 계셔서 도련님의 건강이 걱정될 정도인데요. 오로지 후계자 승계를 위한 준비에만 열중하고 계십니다.”

성준은 말을 하면서도 재인의 얼굴이 떠올라 몹시 양심에 찔렸다.


“그래야지, 암. 차 대표한테는 내년 초에 후계자 승계 차질 없이 마무리 지으라고 거듭 얘기해뒀네.”

“그러셨군요. 다행입니다.”

차 회장은 작은아들인 차정환 대표의 음모를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성준은 나중에 차 회장이 진실을 알게 되면 쓰러지는 건 아닐지 벌써부터 걱정이었다.


“내 오늘 김 실장을 부른 것은,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라네.”

“뭐든 말씀해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역시 자네밖에 없구만.”

허허허. 차 회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 지난번에 병문안 온 서진물산 윤세정 양 기억하나?”

“네.”

“내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지. 도혁이가 윤세정 양이랑 맺어지게끔 자네가 좀 도와줄 수 없겠나?”

“……!”

성준이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지분이 큰 서진물산과 손을 잡는다면 도혁이가 경영권을 확고히 하는 데 큰 힘이 될 걸세.”

“그렇긴 합니다만…….”

서진물산은 대산처럼 대를 이어 내려오는 재벌가였다.

유서 깊은 두 재벌가가 사돈을 맺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적인 결합이었다.

게다가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세정은 재계에서 탐내는 이들이 줄을 선 나무랄 데 없는 신붓감이었다.

그런 세정을 손주 며느리로 삼고자 하는 차 회장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는 됐다.

하지만.


「전 행복하지 않은 결혼 따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도혁이 차 회장의 병실에서 작고한 부친을 언급하며 대답했던 그날, 그의 날 선 표정이 성준은 눈앞에 선했다.

도혁이 왜 그렇게 정략결혼에 부정적인지 성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늘 각자의 일로 바빴던 도혁의 부모님.

냉랭한 집안 분위기.

도혁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옛 애인과 재혼해 미국으로 떠난 어머니.

도혁이 여자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어쩌면 어머니에 대한 불신 때문이리라.

그랬던 그가 처음으로 관심을 가진 대상이 바로 서재인이었다.

성준은 차 회장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길 바라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도련님은 정략결혼을 꺼리는 것 같던데 무리하게 밀어붙이시는 건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런 어린애 같은 생각일랑 집어치우라고 하게. 도혁이 녀석, 강하게 키운 줄 알았는데 물러터진 구석이 있어서 큰일이야.”

차 회장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덧붙였다.


“결혼도 전략이야. 이 세계에서는 다들 계산기 두드려서 결혼하는 게 당연한데, 새삼스럽게 굴긴.”

“…….”

“게다가 요새 세상에 세정 양 같은 요조숙녀가 어디 있나? 굴러들어 온 복을 발로 걷어차도 유분수지! 안 그런가?”

“네. 회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당사자인 도혁이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게 문제지만.


“김 실장, 내 자네만 믿네. 일단 도혁이 녀석이 세정 양과 만나는 자리를 갖도록 도와주게.”

차 회장의 눈빛이 너무나 간곡했다.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성준이지만 차 회장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네, 회장님. 노력해보겠습니다.”

차 회장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큰일이군. 서재인 씨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도혁도 도혁이지만 재인의 안위가 걱정이었다.

차 회장이 재인의 존재를 알게 되면 도혁에게서 떼어놓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테니까.

* * *



“생신 축하드립니다!”

“그래, 고맙다. 이렇게 다 모이니 정말 기분 좋구나.”

그날 저녁, 차 회장은 기다란 원목 식탁에 둘러앉은 자손들을 둘러보며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85세 생일을 맞아 오랜만에 둘째 아들 차정환, 김혜선 부부와 손자 차진혁, 딸 차주영, 이명호 부부 그리고 도혁이 한자리에 모였다.


“도혁이 형, 회사 일 혼자 다 하나 봐? 가족 행사에 통 얼굴을 비추질 않아서 얼굴도 까먹을 뻔했어.”

도혁의 건너편에 앉은 진혁이 이기죽거리며 시비를 걸었다.

올해 서른 살인 진혁은 대산그룹 계열사 중 하나인 대산기획 마케팅 부서에 이름만 걸어놓고 한량처럼 지내고 있었다.

사촌 도혁과 닮은 듯하지만, 훨씬 날카로운 인상에 낯빛이 어두웠다.

도혁은 일말의 동요 없이 무심한 얼굴로 받아쳤다.


“너야말로. 오늘은 밤마다 몰려다니는 친구들 못 봐서 아쉽겠네. 아, 끝나고 놀러 가나?”

“형이 인생의 재미를 모르고 사는 거지. 맨날 일에만 파묻혀 있는 거 지겹지 않아?”

“전혀. 오히려 재밌지. 일하는 시늉만 하는 넌 잘 모르겠지만.”

“뭐, 시늉?”

“진혁아, 그만해라. 오랜만에 보는 가족끼리 반기지는 못할망정 뭐 하는 거냐.”

차정환은 발끈하는 진혁을 나무라더니, 도혁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도혁아, 진혁이가 형이라고는 너 하나 있는데, 자주 못 봐서 섭섭했나 보다. 네가 이해해라.”

도혁은 굳은 얼굴로 살짝 고개만 숙였다.

도혁에게 회사를 넘기는 게 배알이 꼴린 차정환은 회사를 손아귀에 넣으려고 몹쓸 꿍꿍이를 벌이고 있었다. 사모펀드 MF파트너스를 이용하기 위해 사돈 관계까지 맺으려 하면서.

그러면서 앞에서는 점잖은 척 어른 행세하는 차정환이 가증스럽기만 한 도혁이었다.


“아버지는 왜 맨날 저한테만 그러세요?”

“맞아요. 당신 대놓고 도혁이만 위하는 거 티 나요.”

차정환의 처 김혜선이 진혁을 두둔하며 도혁에게 눈을 흘겼다.

쯧! 잠자코 지켜만 보던 차 회장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며 호통쳤다.


“너희들은 전생에 무슨 원수를 졌길래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 게야? 어릴 적부터 그러더니 언제까지 그럴 테냐!”

분위기가 냉랭해지자 쾌활한 성격의 차주영이 끼어들었다.


“그래그래, 할아버지 생신 축하하러 모였으니 사이좋은 모습 보여드려야지. 그나저나 우리 아버지 못 본 새에 더 젊어지신 것 같은데 뭐 좋은 거 숨겨 놓고 혼자 드시는 거 아니에요?”

“티가 나냐? 돈 들인 보람이 있네. 허허.”

덕분에 금세 차 회장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떴다.

주영이 티 나지 않게 손을 뻗어 옆에 앉은 도혁의 등을 살며시 토닥였다.

그제야 도혁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도혁이 제게 향한 작은집 식구들의 불편한 시선을 튕겨내며 더디 가는 시간만 탓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다다다다 슬리퍼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한 여자가 미끄러지듯 달려와 차 회장을 끌어안았다.


“할아버지이이이이! 생신 축하드려요!”

“오오, 우리 공주님 왔구나!”

“할아버지도 참, 저도 이제 스물넷인데 언제까지 공주님이라고 하실 거예요?”

“한 번 공주면 죽을 때까지 공주지. 내 눈엔 세상에서 젤 예쁜 공주님인걸.”

“역시 할아버지가 최고라니까!”

“얘, 넌 할아버지밖에 안 보이니? 삼촌 숙모랑 오빠들한테도 인사해야지.”

차주영이 딸의 옆구리를 찔렀다.


“안녕하세요!”

그제야 해맑게 인사하며 도혁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바로,

상품기획 1팀의 사원인 이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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