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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그 기분, 뭔지 내가 안다 (35/129)


35화. 그 기분, 뭔지 내가 안다
2022.10.01.



 
다음 날 아침 출근길, 재인은 유라의 전화를 받았다.

어젯밤 재인이 택배 상태는 어떤지 물어보려고 유라에게 몇 번이나 전화했지만 계속 연결이 되지 않았다.

재인은 전화를 받자마자 다급히 물었다.


“최유라! 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됐어? 반찬 상태는 괜찮아?”

―야, 넌 친구가 연락이 안 되는데 반찬 걱정만 했니?

뜨끔.

어리굴젓이 몹시 신경 쓰이긴 했다.

유라의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재인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유라야, 정말 고마워. 어제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무슨 일? 엄청난 일이 있긴 했지.

엄청난 일이란 말에 재인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뭔데? 혹시 옥탑방에 새로 온 사람 이상하든? 막 반찬 까먹고 그런 거 아냐?”

그러자 유라가 귀청이 떨어지게 소리를 질렀다.


―서재인, 나 지금 반찬 타령할 때가 아니거든!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단 말이야!

“아우, 귀 아파. 뭔데 그래?”

―재인아, 이 언니가 드디어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것 같다.

달콤한 꿈을 꾸는 듯 몽롱한 목소리였다.

사뭇 진지한 유라의 고백에 재인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운명 같은 소리하고 있네.


“최유라, 또야? 너 운명 타령하는 거 공식적으로 들은 것만 세 번은 될걸?”

비공식적인 건…… 말을 말자.


―아니야! 이번엔 진짜란 말이야.

“매번 같은 말을 들었었지. 결혼식장 들어갈 때까진 안 믿어. 그나저나 어리굴젓은 상태 괜찮든?”

―아주 싱싱하다 못해 팔딱팔딱 뛰더라! 남은 심각해 죽겠는데 진짜 너무하네. 내가 다 먹어버린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것 같다.

어리굴젓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재인은 유라를 살살 다독였다.


“아, 미안해. 그나저나 우리 유라가 드디어 만났다는 운명의 상대가 누굴까?”

―됐어.

“얘기해봐. 누군데?”

유라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뜻밖의 말을 툭 내뱉었다.


―……옥탑방 남자.

“뭐어?”

재인은 예상치 못한 전개에 입이 딱 벌어졌다.

택배 찾으러 보냈더니…….

세상에 이런 일이!


“어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게…….

재인이 회사 로비에 도착할 때까지 유라는 운명적인 만남의 과정 하나하나를 세세하게 늘어놓았다.

옥탑방 남자가 옷을 입으러 들어간 부분에서 잠시 아쉽다는 듯 하, 하고 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아무튼, 사정을 얘기한다는 게 어쩌다 말이 길어져서 1시간 넘게 얘기를 나누게 됐어.

“그 밤에 1시간이나? 둘 다 초면에 서로 실례가 많았네.”

―그런데 말이야, 말이 잘 통해도 너무 잘 통하는 거야. 그렇게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남자는 난생처음이었어.

“말 잘 통하는 사람 만나는 건 드문 일이긴 하지.”

―게다가 키도 훤칠하고, 조각 같은 몸에, 또 얼굴은 어찌나 지적으로 잘생겼는지. 차 팀장님 저리 가라 할걸?

풋. 재인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유라야, 콩깍지가 씐 건 알겠는데 그건 너무했다. 팀장님 미모 이길 사람이 어디 있니?”

어이없어하는 재인에게 유라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좀 수상한데…….

“뭐가?”

―왜 그 말이 내 귀엔…….

“응?”

―서재인이가 차 팀장님한테 지대한 관심이 있다는 얘기로 들릴까?

“과, 관심은 무슨! 그냥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 거지.”

무의식중에 속내를 고백해버린 재인은 재빨리 사태 수습에 들어갔다.


“그나저나 그 옥탑방 남자 대단하다! 그렇게 박식한데 외모도 출중하다니.”

―내 말이. 지금까지 만난 남자들이랑은 비교 자체가 안 된다니까. 휴우우우우.

신이 나서 맞장구를 치던 유라가 갑자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웬 한숨? 그렇게 괜찮으면 만나보면 되잖아.”

“…….”

유라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재인아, 내가 남자 볼 때 제일 먼저 고려하는 게 뭐지?

“그야…… 경제력?”

―맞아. 다음은?

“직업.”

―딩동댕. 우리 부모님이 두 가지는 꼭 갖춘 남자를 데려오라고 어렸을 때부터 누누이 강조하신 거 알지?

“응, 알지.”

유라의 집은 대대로 변호사와 의사를 두루 배출해 지역에서는 나름 명망 있는 집안으로 통했다.

그런 집안 분위기에 휩쓸려 어렸을 때부터 엄청난 사교육을 받은 유라였다.

당연히 명문대와 대학원을 나와 대기업 연구소에 들어간, 소위 말하는 엄친딸.

그러다 보니 이제껏 만났던 남자들도 나름 까탈스러운 기준을 통과한 이들이었다.


―그런데 큰일이 나버렸다고.

“큰일?”

―큰일도 보통 큰일이 아니야.

“왜? 그 옥탑방 남자 조건이 별로야?”

―별로인 정도가 아니야.

“너무 따지지 마. 제 밥벌이 잘하고 사람만 괜찮으면 됐지, 뭘 그래?”

―야…… 나이는 서른다섯인데, 백수란 말이야!

맙소사!

유라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고민 맞네.


“잠깐 쉬면서 구직 중인 거겠지.”

―아니. 다니던 회사가 망하고서 3년째 쭉 놀고 있대. 앞으로도 회사 다닐 생각 없고. 자유로운 영혼이라 조직 사회와 맞지 않다나?

“그래도 집에서 뒷바라지는 해주시나 보네.”

―무슨. 그동안 벌었던 돈 다 까먹고 이제 손가락 빨게 생겨서 아르바이트나 해볼까 생각 중이래.

바닥에 끌릴 듯 축 처진 유라의 목소리는 절망적이기까지 했다.


“옥탑방 남자, 아주 박식하고 출중한 외모를 자랑하는…… 백수구나.”

―재인아, 나 어떡하지?

“어떡하긴? 절대 안 되지. 네 부모님 알면 뒷목 잡고 쓰러지실걸?”

―호적에서도 파버릴 거야. 그래서 나도 생각 안 하려고 노력하는데, 계속 그 남자가 생각나.

그 기분, 뭔지 내가 안다.

도혁 때문에 며칠째 잠을 설치고 있는 경험자로서 재인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때였다.

회사 로비에서 익숙한 옆모습이 재인의 눈에 들어왔다.


“어머, 김 실장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서재인 씨?”

재인이 반갑게 손을 흔들자 성준은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 주변에서 혹시라도 팀장님 정체가 들킬까 봐 경계하시는구나.

재인은 주위를 살피며 성준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소리가 너무 컸죠. 죄송해요. 팀장님 만나러 오셨어요?”

“네. 급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러셨군요.”

그때, 아직 끊기지 않은 전화 속에서 유라의 우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재인아, 듣고 있어? 나 접어야겠지?

“아, 미안. 당연히 접어야지! 만나면 분명 후회하게 될 거야.

―그렇겠지? 안 되겠다! 진짜 후회하나 보게 한 번만 더 만나봐야겠어.

“미쳤어? 정신 차려!”

―재인아, 고마워. 끊는다.

“야! 최유라!”

재인의 안타까운 외침과 동시에 휴대전화에서 뚜-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자코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성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신가 봅니다?”

“말도 마세요. 친구가 서른다섯 살 백수한테 첫눈에 반했다며 운명이니 어쩌니 해서요.”

“이런. 그럼 안 되죠.”

“그렇죠? 뜯어말리긴 했는데 얘가 아직 미련이 많이 남은 것 같아요.”

“잠깐 만났는데 미련이랄 게 뭐 있겠습니까. 금세 잊으시겠죠.”

김 실장의 말에 재인은 고개를 저었다.


“쉽진 않을걸요. 제 친구지만 집념이 강한 애거든요. 한 번 마음먹은 건 해치워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라 걱정이에요.”

“…….”

“어, 이러다 지각하겠다! 김 실장님, 어서 가요.”

“먼저 가시죠. 전 잠깐 들를 곳이 있어서.”

“네, 그럼 다음에 봬요.”

재인은 잽싸게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성준이 아주 복잡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 * *

대산F&G 25층의 비밀 회의실.

여느 때와 달리 이른 아침부터 도혁을 찾아온 성준이 굳은 표정으로 보고를 하고 있었다.


“도련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일전에 말씀드렸던 사모펀드, MF파트너스가 차 대표님께 다시 호의적으로 돌아섰다고 합니다. 차 대표님 측에서 다급했는지 무리수를 둔 것 같습니다.”

“무리수요?”

도혁이 미간을 구기며 되물었다.


“네. 정보통에 의하면 MF파트너스의 지분을 과반수 가지고 있는 장문수 대표의 따님과 차 대표님 아드님의 혼사가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진혁이가 결혼을 한다고요?”

“아직 공식화되진 않았지만, 이번 달 내로 정식으로 결혼 발표를 할 것 같습니다.”

허.

도혁은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작은아버지답네요. 목적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게.”

“그렇게까지 나오실 줄은 전혀 예상도 못 했습니다.”

“작은아버지 입장에서는 골칫덩이 아들을 치워버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죠.”

도혁의 추측에 성준은 말없이 동의의 눈빛을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살 아래인 사촌 동생 진혁은 해외 유학을 다녀와 경영수업을 받고 있는 재벌 3세였다.

대외적으로는.

제법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지만, 차진혁은 집안에서 망나니로 통했다.

타고나길 공부에 뜻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계속 사고만 치고 다녀서 고등학교 때 떠밀리듯 해외로 유학을 떠났다.

어찌어찌 집안 빽으로 대학원까지 들어가긴 했는데, 1년 전 건강을 핑계로 중도 포기하고 돌아왔다.

그 뒤부터 진혁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밤 문화를 즐기며 말 그대로, 제대로 놀고 있었다.

쯧.

도혁은 한심하다는 듯 짧게 혀를 차고는 소매를 들쳐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들어가 봐야겠네요. 김 실장님, 계속 동태를 파악해주세요. 다른 움직임이 있으면 즉시 알려주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아침 일찍 오신 겁니까?”

“출근하는데 갑자기 차 회장님께서 부르셔서 낮에 뵈러 가야 합니다.”

“할아버지가 갑자기 왜요?”

의아한 표정으로 미간을 좁히는 도혁을 보며 성준이 빙긋 웃었다.


“저도 가봐야 알 것 같습니다. 참, 오늘 회장님께 드릴 생신 선물은 자연산 산삼으로 준비했습니다.”

생신 선물이라는 말에 도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오늘이었나요?”

“네? 저녁에 본가에서 다 같이 모이신다고 어제 말씀드렸는데…….”

마음이 서재인이라는 콩밭에 가 있느라 귓등으로 흘려들은 도혁이었다.


‘이런. 서재인 씨한테 저녁 식사 같이하자고 했는데 어쩌지?’

일 핑계를 대긴 했지만, 제 딴에는 어렵게 말을 꺼낸 데이트 신청이었다.

힘들게 재인과 저녁 약속을 잡았는데.

방해꾼 규민은 출근하자마자 억지로 출장까지 보내버렸는데.

그렇다고 할아버지 생신 축하 자리에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야죠. 잠깐 깜박했었네요.”

“네. 그럼 선물은 차에 옮겨놓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성준과 헤어진 도혁은 곧장 들어가지 않고 사무실 앞에 멈춰 섰다.

창문 너머로 연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재인의 옆모습이 보였다.

늘 질끈 묶고 다니던 머리를 길게 풀어 내린 재인은 더욱 사랑스러워 보였다.


‘오늘따라 더 예쁘네.’

하.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던 그때.

도혁은 때마침 고개를 돌린 연지의 레이더망에 딱 걸려버렸다.


 
흠칫 놀란 도혁의 눈이 커지자, 연지가 고개를 기울이며 생긋 웃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딱 걸렸어!’

 

* * *

그날 오전, 팀장실에서는 신제품 개발 상황에 대한 재인의 보고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정리하자면, 식재료 성분 분석 결과 아무런 문제가 없어 내일부터 설문 조사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다섯 가지 구성으로 다이어트 간편식 샘플 제작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수고했어요.”

“보고서 검토해보시고 더 필요한 사항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그러죠.”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재인이 돌아서려고 하는데 도혁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열었다 닫았다.


“팀장님, 뭐 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

“오늘 저녁 약속 말인데…….”

“아, 저녁이요…….”

업무의 연장선이긴 하지만 도혁과 단둘이 저녁을 먹는다는 생각에 재인은 괜스레 긴장이 되었다.


“갑자기 본가에 들어가 봐야 하니 다음에 하지.”

“네?”

순간적으로 재인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스쳤다.

그걸 놓치지 않고 곧장 도혁이 물었다.


“서재인 씨, 혹시 아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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