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이미 알고 있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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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이미 알고 있는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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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이미 알고 있는 맛
2022.09.24.
“흉내 낼 수 없는 특제 소스가 들어간다고 해서 요새 SNS에서 핫한 곳이에요. 아침에 일찍 줄을 서도 못 살 때가 많은 곳인데 팀장님은 어떻게 사셨을까요? 대단하신데요.”
몹시 궁금하다는 듯 눈동자를 굴리는 연지였다.
재인의 입술이 자꾸만 달싹거리려 했다.
전화 한 통이면 끝났을 거야, 날 믿어.
곧 대표님이 되실 건데 뭔들 안 되겠어.
나, 참, 이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도 아니고.
재인은 간질거리는 입을 샌드위치로 막았다.
한입 베어 물자 신선한 연어와 진한 치즈, 아보카도를 앞세운 신선한 채소의 완벽한 조합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특제 소스라더니 과연 혀에 감기는 풍미가 뛰어났다.
“진짜 맛있다!”
그런데, 잠깐만.
재인이 이미 알고 있는 맛이었다.
어쩐지 로고가 익숙하다 했더니.
DS 호텔 샌드위치의 독특한 소스의 맛을 보는 순간, 재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설마, 그런 거였어?’
재인은 큰 눈을 깜박거리며 굳게 닫힌 팀장실 문을 쳐다보았다.
.
.
.
몇 주 전.
재인이 언제나처럼 야근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그날 역시 야심 차게 칼퇴를 노렸으나,
정확히 퇴근 3분 전에 도혁에게 콕 찍혀서 신제품 관련 자료를 정리해 넘겨야 하는 신세가 됐다.
그날 의사와 선을 본다며 아침부터 유난을 떨던 나희가 나가면서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서 주임, 어떡해요? 팀장님이 서 주임을 너어어무 아끼셔서 연애할 틈을 안 주네요.”
“아끼긴, 무슨요. 난 괜찮아…….”
“아, 연애해본 적이 없어서 괜찮으려나?”
재인은 하마터면 잡고 있던 볼펜을 부러뜨릴 뻔했다.
강나희, 따로 과외라도 받는 거니?
얄밉게 말하는 법이 아주 수준급이야.
재인은 머릿속으로 살인도 면한다는 참을 인(忍) 자 세 개를 그렸다.
밉상 나희에 이어 팀원들도 하나둘 ‘또야?’, ‘안 됐다’라는 시선을 날리며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재인은 서러움과 짜증이 울컥 올라왔다.
‘아우, 왜 또 나야? 나쁜 팀장, 미모가 아깝다, 아까워! 야근시킬 거면 제발 미리 얘기하라고!’
괜히 헛된 희망 품게 하지 말고.
아예 ‘칼퇴’라는 글자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자.
그게 정신 건강에 바람직하겠어.
재인은 최대한 빨리 끝내고 갈 생각에 저녁도 거르고 일에 열중했다.
그러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책상 위에 무언가 놓여 있었다.
2등분 된 길쭉한 호밀빵 샌드위치와 커피였다.
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샌드위치에 온기가 남아 있었다.
포장지에 붙은 해바라기 모양의 로고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누가 가져다 놓은 거지?’
재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때마침 팀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 도혁과 눈이 딱 마주쳤다.
“저, 팀장님 혹시……?”
“뭡니까?”
도혁은 유난히 차갑게 긴장된 표정이었다.
말 붙이기 무서울 정도로.
“아, 아니에요.”
“서 주임…….”
“네?”
이 사람이, 또 무슨 일을 시키시려고?
이미 일에 깔려 죽기 직전인 재인은 도혁이 부르자 덜컥 겁부터 났다.
“아닙니다.”
도혁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뜸을 들이더니 팀장실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휴, 괜히 긴장했네.”
팀장실 문이 닫히자 재인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도 안 돼. 저런 사람이 이런 배려심 넘치는 일을 했을 리가 없지.’
재인은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그때, 문밖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인아, 너 또 저녁 안 먹고 일하지?”
옆에 있는 상품기획 2팀 민우였다.
“아, 민우 선배. 선배도 야근해요?”
“우리 팀은 다 끝나서 이제 들어가. 재인아,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잘 챙겨 먹으면서 일해.”
민우가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아하, 민우 선배가 사다 준 거였구나.’
그렇다면 말이 되지.
민우는 예전에도 야근할 때 팀원들 간식을 챙기면서 종종 재인의 것까지 챙겨주곤 했었다.
재인은 샌드위치를 들어 보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마워요, 선배!”
“그래. 힘내!”
민우가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형제가 없는 재인은 늘 친오빠처럼 챙겨주는 민우가 고마웠다.
재인이 기분 좋게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려 할 때였다.
갑자기 팀장실에 있는 도혁이 마음에 걸렸다.
그날따라 사무실에 단둘이 남아 일을 하는데 혼자만 먹는 게 미안해졌다.
자고로 먹는 걸로 치사하게 굴면 안 된다고 엄마가 누누이 말했었다.
‘한 조각 권해볼까?’
재인은 샌드위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앉았다.
‘에이, 저 성격에 드세요, 한다고 그럼 그럴까요, 하고 순순히 먹겠어? 됐습니다, 이런 말 나올 게 뻔해.’
괜히 민망한 상황을 자초할 필요가 없었다.
무엇보다 도혁과는 샌드위치를 나눠 먹을 만큼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밥 한 번 같이 먹은 적도 없었으니까.
이런저런 고심 끝에 재인은 결론을 내렸다.
혼자 먹자.
신속하게!
은밀하게!
재인은 행여 도혁이 나올까 봐 팀장실을 곁눈질하며 샌드위치를 먹었다.
‘나 참, 무슨 첩보 작전 벌이는 것도 아니고…….’
얼마나 지났을까?
주위가 고요해도 너무 고요했다.
불안해진 재인은 샌드위치를 입안 가득 베어 문 채 빼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렸다.
언제 왔는지 도혁이 맞은편에 서서 재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혼자 먹다 딱 걸렸어!’
민망한 나머지 재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티, 팀장님!”
입안을 가득 채운 샌드위치 때문에 제대로 말도 하기 힘들었다.
당황한 재인에게 도혁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서 주임, 맛있습니까?”
아…….
‘혼자 먹으니까 맛있냐?’라는 뜻이구나.
“저기, 엄청 맛은 있는데…… 그러니까…… 이건 제가 산 게 아니고…… 나 팀장님이 주셨어요.”
순간, 도혁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나 팀장?”
아…….
‘나 팀장이 내 건 안 주고?’라는 뜻이구나.
도혁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호, 혹시 서운해하는 건가?’
재인은 황급히 한 조각 남은 샌드위치를 권했다.
“드, 드실래요?”
“됐습니다.”
도혁은 싸늘한 대답만 남기고 쌩하니 나가버렸다.
‘저거 봐. 역시 됐다고 하잖아. 근데 설마…… 삐진 건 아니겠지?’
재인은 도혁이 신경 쓰여 그가 나간 방향을 멍하니 쳐다봤는데…….
.
.
.
그랬었는데.
그때 그 샌드위치를 준 게 팀장님이었다니.
재인은 두 손으로 뜨끈뜨끈해진 제 볼을 감쌌다.
그래서 그때 기분이 나빠 보였던 거구나.
고맙다고 할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이 준 것으로 오해해서.
그다음 날도 저기압이라 엄청 눈치 봤었는데.
자기가 줬으면 그렇다고 얘길 하지.
다음 순간,
재인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가만, 그럼? 그때 이미 나한테 마음이 있었다는 얘기야?’
재인은 비로소 마지막 퍼즐을 맞춘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것도?’
지금 내릴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추론은 늦잠을 자서 아침을 거른 재인을 위해 준비했다는 것.
자상한 차도혁이라니, 이런 불협화음이 다 있나.
그때, 연지가 재인에게 살며시 속삭였다.
“서 주임님, 요새 팀장님 좀 이상하지 않아요?”
“응? 뭐가?”
재인은 제풀에 찔려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갑자기 안 하던 행동을 하시잖아요.”
“그, 그러게…….”
“그리고 이건 제 추측인데요, 팀장님 누구랑 같이 사는 것 같아요. 아마도 여자랑.”
순간 재인은 너무 놀라 샌드위치를 떨어뜨릴 뻔했다.
숨이 턱 막히면서 심장박동이 급격히 빨라지기 시작했다.
“……왜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추측을 했을까?”
“회식 때 강아지라고 둘러대는 거 딱 티 났어요. 팀장님은 애완동물을 키우실 분 같지 않거든요.”
아아. 그랬구나.
거기서 티가 났구나.
이런!
부모님이나 친구도 있는데.
재인은 하필이면 강아지를 둘러댔던 자신을 탓했다.
연지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팀장님이 전보다 부드러워지셨거든요. 분명 여자 때문일 거예요.”
“그, 그래?”
“네, 그냥 제 촉이 그래요.”
연지는 추리를 끝낸 탐정처럼 개운한 표정으로 생긋 웃었다.
연지 씨, 돗자리 깔아도 되겠다.
재인은 행여 연지에게 들킨 건 아닌지 간이 콩알만 해졌다.
* * *
Rrrrrrr.
Rrrrrrr.
그날 밤, 개운하게 씻고 머리를 말리는데 재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사랑하는 엄마]
“엄마!”
―재인아, 밥은 먹었니?”
“네. 엄마, 가게는 좀 어때요? 옮길 곳은 찾아보셨어요?”
―안 그래도 그래서 좋은 소식이 있어서 전화했지. 내년에 우리 화순 외곽에 베이커리 카페를 열기로 했어.
“그게 정말이에요? 너무 잘됐어요!”
―건물주가 사람이 좋아서 아주 좋은 조건으로 계약했어. 원래 카페였던 곳이라 자재비도 거의 안 들고 가진 돈 안에서 할 수 있을 것 같아. 완전 횡재나 다름없어.
재인은 안도감이 들었다. 엄마의 목소리에 행복이 듬뿍 묻어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것뿐만이 아니야. 재건축한다고 나가라고 해서 한바탕 뒤집힌 뒤에, 하늘도 불쌍하게 여기셨는지 갑자기 근처 사회복지센터에서 단체주문이 들어왔지, 뭐야.
“단체주문이요?”
―드문 일이었지. 근데 그 뒤로 소문이 잘 나서 요양병원이랑 보육원 같은 시설에서 주문이 하나둘 늘어나더니, 아예 정기적으로 계약을 맺자고 하더라고. 단골손님들도 많이 늘어서 하루 매출이 세 배가 넘었다니까.
세상에! 기적 같은 이야기였다.
재인은 기쁜 나머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요? 너무 잘됐어요! 이제 잘 풀리려나 봐요.”
―그러게. 진작 잘 풀렸으면 네가 고생해서 모은 돈 날릴 일도 없었을 텐데.
갑자기 엄마의 목소리가 수그러들었다.
―재인아, 엄마 아빠가 정말 미안해.
“또 그러신다. 괜찮아요. 장학금 받게 돼서 돈 쓸 일도 없어졌다니까요.”
―그 학교에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 암튼 재인아, 유학 준비 잘해. 엄마 아빠가 네 돈 돌려주려고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까.
“안 주셔도 되니까 건강 잘 챙기시면서 일하세요.”
―내 걱정 말고 너나 건강 잘 챙겨. 아, 내 정신 좀 봐. 반찬은 냉장고에 잘 넣어뒀니?
“……네?”
반찬?
재인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엄마가 요즘 너무 바빠서 택배 보내놓고 얘기한다는 걸 깜박했어. 오늘 저녁에 도착한다던데 잘 받았지?
맙소사!
그렇다는 것은 택배가 재인의 원래 집으로 배송됐다는 얘기였다.
자칫 잘못하면 엄마에게 들킬 위기이기도 했다.
“다, 당연히 잘 넣어뒀죠.”
―어리굴젓은 담그자마자 보낸 거니까 신선할 때 빨리 먹어.
“네. 그럴게요.”
꿀꺽.
제철 맞은 어리굴젓은 재인이 정말 좋아하는 반찬이었다.
재인은 상상만으로도 매콤하게 착 감기는 부드러움이 입안에 느껴지는 것만 같아 군침이 절로 돌았다.
―재인아, 아이스박스 안에 바지락 까서 얼린 거 들어있든? 보냈나, 안 보냈나 헷갈리네.
“네? 그게…….”
―얘가, 너 택배 제대로 확인한 거 맞아?
재인은 간이 철렁했다.
“그, 그럼요! 바지락도 있었어요.”
―다행이다. 암튼 부지런히 먹어. 다 떨어지면 얘기하고.
“네,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엄마.”
―고맙긴. 하나밖에 없는 내 딸 챙기는 건데.
재인은 엄마의 사랑이 느껴져 새삼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통화를 마친 재인은 시간을 확인했다.
밤 10시를 막 넘긴 시각.
원래 살던 집에 다녀오려면 새벽 1시를 훌쩍 넘기게 생겼다.
게다가 재인은 내일 오전에 도혁에게 신제품 개발 중간보고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보고서가 마무리 단계이긴 하지만 택배 찾으러 갈 여유는 없는데 이를 어쩐다…….’
턱을 괸 채 고심하던 재인은 갑자기 짝, 하고 손뼉을 쳤다.
‘맞아, 유라가 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