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날 이렇게 만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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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날 이렇게 만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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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날 이렇게 만들다니
2022.09.20.
아니, 왜 얘기가 그쪽으로 흐르는지?
마음을 떠보는 듯한 도혁의 말에 재인은 맥박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제 그의 마음을 어렴풋이 눈치채고도 모른 척 넘어가기로 다짐하지 않았던가.
재인은 일부러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어머, 그거야말로 쓸데없는 걱정이죠. 팀장님과 저는 앞으로도 쭈욱 아무 사이도 아닐 거니까요. 부디 그런 걱정일랑 안 하셔도 돼요.”
“…….”
“그리고 저랑 팀장님이 계약한 거 남들이 알게 되면 발칵 뒤집힐 거 아니에요? 괜히 팀장님 하시는 일에 지장이 가면 어떡해요.”
그러니까 절대 넘어오지 마세요.
“…….”
“오해 살 만한 행동은 피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재인은 간절한 바람을 담아 쭈욱 선을 그었다.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돌리며 도혁이 말했다.
“그렇긴 하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침묵이 흘렀다.
재인은 모니터 너머로 슬쩍 도혁을 쳐다보았다.
언제 딴짓을 했었냐는 듯 도혁은 금세 일에 몰두해 있었다.
재인의 말을 잘 알아들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타닥타닥. 탁. 타닥.
또다시 건조하게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왜 허전한 기분이 드는 건지.
빨리 끝났기만 바랐던 롤러코스터가 막상 멈춰 섰을 때처럼.
마음이 놓이면서도 왠지 내리기 아쉬운 기분이랄까?
표정 없는 도혁의 얼굴에서 쉽사리 눈을 뗄 수 없는 재인이었다.
‘정신 차려! 애초에 그 롤러코스터를 타지 말았어야 했다고!’
위험해, 그런 거.
재인은 정신이 번쩍 들도록 세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 * *
“서재인 씨, 그만 일어나지?”
도혁이 재인의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서재에 자료를 찾으러 다녀온 사이, 재인이 식탁에 엎드려 있었다.
도혁은 아기처럼 새근새근 잠든 재인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럼…… 무슨 사이면 어떻게 되는 거지?」
「어머, 그거야말로 쓸데없는 걱정이죠. 팀장님과 저는 앞으로도 쭈욱 아무 사이도 아닐 거니까요. 부디 그런 걱정일랑 안 하셔도 돼요.」
그 말을 하는 재인의 표정이 너무 단호해서 조금 마음이 상했다.
‘대체 뭐가 문제지?’
어제 영화관에서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했을 때, 시작이야 어떻든 꽤 괜찮은 분위기였다.
당황해서 새빨개진 얼굴로 방방 뛰는 재인도 사랑스럽기만 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자꾸 짓궂게 굴고 싶어졌다.
그런데, 왜 재인은 자꾸 멀어지는 것만 같은지.
자신을 무서워하는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나름대로 배려하려고 노력하는데도 뭔가 자꾸 엇나가는 것 같았다.
가장 큰 문제는 재인이 다른 남자와 있을 때 화가 치밀어 선을 넘고 마는 자신에게 있었다.
지나고 보면 자괴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어떠한 일에도 이성적인 판단과 냉철함을 잃은 적이 없었는데.
‘날 이렇게 만들다니. 끝까지 책임을 묻겠어, 서재인.’
도혁은 콧김을 훅 내뿜으며 몸을 숙였다.
그러고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익숙한 동작으로 재인을 번쩍 안아 들었다.
포옥 품에 안긴 재인에게서 달콤한 향기가 물씬 풍겼다.
후우.
그 향기에 끌려 도혁은 저도 모르게 재인의 얼굴 근처까지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재인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도혁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서재인 씨, 혹시 안 자?”
잠시 기다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하긴. 일어났으면 벌써 내려놓으라고 펄쩍 뛰고 난리가 났겠지.”
도혁은 피식 웃으며 재인의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저벅저벅. 저벅저벅.
‘휴우, 하마터면 들킬 뻔했네. 방은 왜 이렇게 먼 거야? 혼자 살면서 쓸데없이 집은 넓어가지고!’
재인은 행여 자신이 깨어 있다는 것을 도혁이 눈치챌까 걱정돼 숨죽이며 속으로 툴툴거렸다.
도혁의 뜨거운 숨결이 얼굴에 와닿았을 때는 너무 놀라 번쩍, 눈을 뜰 뻔했다.
‘정말 위험했어. 이럴 거였으면 팀장님 말대로 그냥 내려놓으라고 펄쩍 뛰고 난리 칠 걸 그랬어.’
사실 조금 전.
재인은 잠결에 도혁이 깨우는 소리를 들었다.
어머, 제가 잠이 들었었나 봐요? 하며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니, 그렇게 말할 새도 없었다.
재인의 몸이 깃털처럼 공중에 붕 떠올랐기 때문에.
‘꺄아악! 꺄악!’
재인은 순식간에 잠이 싹 달아나 버렸지만, 도혁의 품에 안겨 있다는 충격에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렇게 말할 타이밍을 놓친 재인은 잠든 척하는 쪽을 택한 것이었다.
‘잘 알아들으신 줄 알았더니 이게 뭐야! 지난번에도 이렇게 팀장님이 안아서 침대에 눕혀준 거였어?’
짐작은 했지만 애써 덮어두었던 일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으려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누굴 탓하랴. 졸음을 참지 못하고 엎드린 내 탓이지.’
애초에 재인이 이불킥 하느라 잠 못 들게 만든 책임은 도혁에게 있었지만.
얼마나 지났을까?
풀썩.
재인은 드디어 침대에 무사히 안착했다.
‘자, 팀장님. 이제 그만 안녕히 가세요.’
재인은 숨죽이며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도혁은 그대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뻗어 재인의 얼굴을 가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흡!
재인은 숨이 턱 막혔다.
고작 머리카락일 뿐인데,
이런 기분은, 마치…….
두근두근.
두근두근.
심장박동 소리가 어찌나 큰지 도혁의 귀에 들리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잠깐만, 지금 이거 로맨스 영화나 순 만화에나 나올 법한 상황 아니야?’
높은 확률로 키스 신으로 넘어가기 직전.
불현듯 불안이 엄습해왔다.
‘팀장님, 설마…… 아니죠?’
재인의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선 그때.
깊은 한숨을 내쉬며 도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재인에게 이불을 덮어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기 전,
나직한 음성이 재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서재인 씨, 잘 자.”
탁.
문이 닫히고 도혁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그제야 몸을 일으켜 앉은 재인은 도혁이 사라진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 평범한 인사가 뭐라고,
계속 머릿속에 맴돌아서.
* * *
출근 시간, 1층 로비 엘리베이터 앞에는 언제나처럼 북새통이 벌어졌다.
회전문을 빠져나온 재인은 긴 줄의 끝에 서서 가쁜 숨을 골랐다.
찬바람을 뚫고 뛰어오느라 숨이 턱까지 찬 데다 손과 볼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재인아, 좋은 아침!”
민우가 반갑게 인사하며 옆에 섰다.
“아, 선배! 좋은 아침이에요.”
“왜 이렇게 숨차해? 얼굴도 빨갛고.”
“뛰어와서요.”
“네가 타는 버스, 바로 이 앞 정류장까지 오는 거 아니었어?”
아뿔싸.
재인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그게…… 요즘 다이어트하느라 두 정거장 전에 미리 내려요.”
민우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재인은 적당히 보기 좋은 키에 살짝 마른 축에 속했다.
게다가 평범한 하얀 블라우스를 입혀놔도 명품처럼 보이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네가 무슨 다이어트야? 그런 거 안 해도 되니까 건강이나 신경 써.”
“네, 그럴게요.”
“그나저나 엄청 피곤해 보이는데 어제 잠 못 잤어?”
“조금 설쳤는데 티 많이 나요?”
어젯밤, 재인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자꾸만 도혁의 숨결과 손길이 생생하게 떠올라서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심지어 직접 보지도 않은 그의 얼굴 생김새 하나하나까지 다 떠올랐다.
어느 실험에서인가 참가자들한테 원숭이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니, 계속 원숭이 생각만 했다는 딱 그 상황이었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아! 왜 자꾸 팀장님 생각만 나는 거야! 이럴 바엔 아예 돌에 새겨라, 새겨!’
재인은 폭주하는 생각을 잡을 길이 없어 자괴감이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우자 민우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고민이 있는 건 아니지?”
“그런 거 아니에요.”
“그렇다면 다행이고. 참, 지난주에 지나가다 규민이 만났어. 그 녀석 오랜만에 봤는데도 여전하더라.”
“규민이한테 얘기 들었어요.”
“서연이도 무척 반가워하면서 다음에 다 같이 식사하재.”
“좋죠. 언니 본 지 너무 오래돼서 보고 싶어요.”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재인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 맞다! 선배 크리스마스이브에 프러포즈하죠?”
“응. 레스토랑 예약해놨어.”
민우가 쑥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목걸이 골라 달라고 했을 때도 갑자기 회식이 잡히는 바람에…….”
“괜찮아. 너 바쁜 것 같아서 어제 주얼리숍 직원이랑 상의해서 골랐어.”
“도와주고 싶었는데 미안해요.”
“뭘, 그동안 네 도움 많이 받았는걸.”
민우와 서연이 사귀게 된 것도,
두 사람이 무탈하게 오랜 세월을 함께해온 것도,
사실 재인의 공이 컸다.
동아리에서 앙숙 관계였던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재인이 술자리를 마련했는데, 바로 그날 둘 사이에 불꽃이 튄 것이었다.
사귀는 동안에도 티격태격할 때마다 재인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화해를 도왔다.
민우에게 재인은 후배이기에 앞서 사랑의 은인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며칠 전 엘리베이터에서 있었던 일부터 구내식당의 일까지.
행여 도혁 때문에 재인이 힘든 건 아닐까 계속 신경이 쓰였던 민우였다.
“재인아, 혹시 차 팀장이 힘들게 하면 꼭 얘기해. 내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도울 테니까.”
재인은 민우를 안심시키려 더 씩씩하게 대답했다.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팀장님이 잘해주신다니까요.”
아주 부담스러울 정도로요.
* * *
“무슨 일이야?”
사무실에 들어온 재인은 자리에 앉으며 연지에게 물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시끌벅적한 분위기였다.
“이것 좀 보세요.”
연지가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가리켰다.
딱 봐도 고급 재료로 만든 길쭉하고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와 생과일주스가 놓여 있었다.
보자마자 재인의 텅 빈 배 속에서 꼬르륵꼬르륵 반갑다고 반응을 했다.
“이게 뭔데?”
“팀장님이 사 오셨어요.”
“팀장님이?”
재인은 제 귀로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웬일로 생전 베푼 적 없던 친절을?
“네. 그것뿐만이 아니라 ‘다들 고생이 많습니다’라는 말까지 하셨다니까요.”
“팀장님이 진짜로?”
재인은 너무 놀란 나머지 큰 소리가 튀어나왔다.
연지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끄덕였다.
와, 차도혁 씨.
격려의 말도 할 줄은 아는 사람이었구나?
태어날 때부터 아예 기본으로 탑재가 안 된 줄 알았는데.
“하필이면 오늘따라 배가 부르네, 이거. 아침상은커녕 내다보지도 않던 와이프가 밥을 차려주길래 뭔 일인가 했는데, 팀장님까지 이러실 줄이야.”
박 과장은 투덜거리면서도 기분이 좋은지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서 주임은 아침 먹었나?”
“아뇨. 늦게 일어나서 못 먹었어요.”
“이런, 이런. 아침은 든든히 먹고 다녀야지. 나처럼.”
“…….”
오랜만에 받은 아침상이 꽤나 감동적이었나 보다.
재인은 의기양양한 박 과장에게 어색하게 웃음을 날리며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눈을 떠보니 출근 30분 전.
도혁 때문에 잠을 설친 탓에 그만 늦잠을 자버렸다.
알람을 여러 개 맞춰놨는데도 잠결에 다 꺼버린 모양이었다.
기겁하며 밖으로 뛰쳐나간 재인은 출근하려는 도혁과 마주쳤다.
도혁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딱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지각하면 시말서.”
다른 사람이 했다면 ‘에이, 농담도’라며 넘겼을 테지만.
다름 아닌 차도혁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정신이 번쩍 든 재인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10분 만에 채비를 마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내가 누구 때문에 잠을 설쳤는데!
달리면서 매정한 인간이라고 도혁을 얼마나 욕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도혁이 이렇게 나오다니.
재인은 아주 조금 양심에 찔렸다.
우리 팀장님이 사람을 아주 들었다 놨다 하시네.
일단 주는 거니까 감사히 먹자.
재인은 기지개를 크게 한번 켜고는 샌드위치에 손을 뻗었다.
그런데,
“어?”
어쩐지 샌드위치 포장에 찍힌 해바라기 모양의 로고가 눈에 익었다.
흔한 브랜드는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그때,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던 연지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주임님, 샌드위치 엄청 맛있어요. 이거 DS호텔에서만 특별히 판매하는 거예요.”
“그래?”
DS호텔이라면 저번에 도혁이 멋대로 끌고 갔던 대산그룹 계열의 5성급 호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