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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진정한 고수는 누구? (31/129)


31화. 진정한 고수는 누구?
2022.09.17.


재인은 도혁에게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눈빛을 보냈다.


‘팀장님, 제발! 곧이곧대로 얘기하시면 안 돼요!’

도혁의 굳게 닫힌 입매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가 뜸 들이는 몇 초가 마치 몇 시간같이 느껴져 재인은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한쪽 눈썹을 끌어올리며 도혁이 입을 열었다.


“강 대리, 갑자기 그건 왜 묻습니까?”

“제가 팀장님을 본 것 같아서요. 혹시 어제 4시 반쯤 광화문 시네마월드에서 <프로젝트 M> 보지 않으셨어요?”

나희의 입에서 <프로젝트 M>이라는 말이 나오자, 규민의 눈이 재인에게로 옮겨 갔다.

의아함이 가득한 눈초리로.

맙소사! 어제 일을 규민이 알게 된다면.

자신과 도혁의 사이를 이상하게 생각할 게 분명했다.


‘팀장님, 아니라고 해요! 제발요!’

재인은 애절한 눈빛으로 도혁을 쳐다보았다.

괜히 섣불리 나섰다가는 오해를 살 것 같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미칠 노릇이었다.

도혁이 곧장 대답하지 않자 나희가 불안한 목소리로 거듭 물었다.


“팀장님……이 맞아요?”

진실을 파헤치려 들 땐 언제고, 혹시라도 제 추측이 맞으면 어쩌나 덜컥 걱정된 모양이었다.

그런 나희를 무심히 바라보며 도혁이 말했다.


“맞습니다.”

 


‘아아아아아아악!’

재인은 속으로 절규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그녀의 심장박동은 이미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럼 서 주임이 같이 영화 봤다는 사람, 진짜 팀장님이었어요?”

나희가 한 맺힌 귀신같은 얼굴로 재인을 째려보며 되물었다.

다른 팀원들도 입을 딱 벌린 채 재인을 쳐다봤다.

눈앞이 캄캄해진 재인과 달리 도혁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너무나도 편안해 보이는 그 모습에 부글부글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재인이었다.

차도혁 씨, 이렇게 눈치가 없는데 그동안 사회생활 어떻게 했어, 어?

아아, 그래. 무려 후계자님이시니 사회생활을 할 필요가 없었겠구나.

아우, 내 팔자야. 상대가 차도혁이라는 걸 간과했다.

하지만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는 법.

찰나의 순간,

재인은 뇌 속 회로를 풀가동해서 필사적으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다.

어떻게든 이 위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미친 듯이 찾아 헤맨 끝에, 드디어 한 가지 방법이 반짝, 하고 떠올랐다.

이름 하여, ‘딱 잡아떼기’.

재인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크게 외쳤다.


“어머, 팀장님도 그때 거기 계셨어요? 어쩜 이런 우연이 다 있죠?”

“우연?”

도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네! 저도 어제 거기서 데이트했거든요. 친구가 소개해준 남자랑요. 조현준 씨라고 있어요.”

급한 대로 둘러댄다는 게 록밴드 BOC의 보컬 이름이었다.

이름은 괜히 말했나 잠시 후회했지만, 제 말에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더한 것도 할 수 있었다.

도혁과 같이 산 뒤로 켕기는 게 많아져서 그런지 나날이 연기력이 늘어만 가는 재인이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나희가 의심의 눈초리로 재인과 도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정말이고말고요! 강 대리님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요? 팀장님이랑 나랑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영화를 왜 보겠어요? 그죠, 팀장님?”

재인은 도혁을 질책하듯 열심히 눈동자를 굴렸다.


‘이 정도로 했으면 그만 눈치채고 협조 좀 합시다!’

풋.

갑자기 도혁이 코웃음을 쳤다.

도혁의 웃는 모습은 가뭄에 비 오듯 드문 일이었기에 모두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웃음도 잠시,

도혁은 이내 표정을 굳히며 무심히 말했다.


“아, 서 주임도 거기 있었군요. 데이트하느라.”

“……네.”

도혁이 굳이 ‘데이트’를 강조하는 게 찜찜하긴 했지만.

그래그래, 데이트.

어찌 됐든 재인은 비로소 식은땀을 닦아낼 수 있었다.

위험 수치를 훌쩍 넘어섰던 심장박동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이제는 다 끝났구나,

하며 안도하던 재인은 규민과 눈이 마주쳤다.

규민이 씁쓸하게 웃으며 눈길을 피했다.

자신과 보기로 했던 영화를 다른 남자와 본 걸 알게 됐으니 기분이 나쁜 것도 당연했다.


‘휴우, 어쩔 수 없지. 나중에 잘 설명하자.’

하지만 어떻게?

팀장님한테 억지로 끌려가서 영화를 봤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고.

또 다른 고민에 재인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때, 아직도 성에 안 차는지 나희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그럼 팀장님은 영화 누구랑 보셨어요?”

“내가 대답해야 합니까? 사생활인데.”

도혁이 단호하게 선을 긋자 나희의 기세가 팍 꺾였다.


“아니, 전 그게 아니라…….”

이때다 싶어 재인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럼요, 사생활은 서로 존중해야죠. 강 대리님도 하도 만나자고 매달려서 귀찮아 죽겠다는 의사랑 어제 데이트한 거 캐물으면 기분 좋지 않잖아요. 그렇죠, 강 대리님?”

그 순간 나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재인은 화들짝 놀라며 손으로 제 입을 가렸다.


“어머, 그것도 사생활인데 내가 실수했네! 죄송해요, 강 대리님.”

실수는 무슨.

당연히 일부러 그랬다.

그러게 가만히 있는 사람을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강나희, 지나치게 진실을 추구하다 네가 남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망각했구나.

재인은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았다.


“저, 저기 팀장님, 어제 만난 사람은…….”

“회의 안 할 겁니까? 쓸데없는 데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도혁은 나희의 변명을 뚝 자르고 회의실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쭈뼛쭈뼛 도혁의 눈치만 살피던 박 과장도 뒤따라 들어가며 덧붙였다.


“강 대리, 팀장님이 아니라고 하시잖아. 자, 자, 다들 그만하고 들어가지.”

하나둘 회의실로 향하는 데도 나희는 얼빠진 얼굴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쓸데없는…… 낭비…….”

“강 대리님, 괜찮아요?”

재인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조심스레 나희를 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나희가 재인을 노려보며 매섭게 쏘아붙였다.


“서 주임, 두고 봐요!”

그러고는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챙겨 들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어쩌지? 하나도 안 무서운데.

재인은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 주임님, 존경합니다.”

내내 말없이 지켜보던 연지가 엄지를 추켜올렸다.


“아니, 뭘. 우리도 어서 들어가자.”

재인이 씩 웃으며 앞장을 서자 연지가 그 뒤를 따르며 물었다.


“근데 팀장님도 영화 볼 때 팝콘 드세요?”

“어.”

응?

재인은 그 자리에 선 채 돌이 되고 말았다.

재인을 지나치며 연지가 배시시 웃는 얼굴로 혼잣말을 했다.


“그렇구나. 팀장님은 무슨 맛을 좋아하시려나?”

아무거나.

아무거나 달랬어.

재인은 깨달았다.

이 사무실에서 가장 단수가 높은 사람은 사원인 연지라는 것을.

월요일 아침부터 아주 스펙터클하네.

* * *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난 시각.

사무실에는 규민과 재인 그리고 도혁만 남아 있었다.

프로젝트 진행 상황에 대한 검토가 끝나자, 규민이 재인에게 나직이 말했다.


“재인아, 시간 되면 잠깐 밖에서 얘기 좀 할까?”

“응. 괜찮아.”

오늘따라 밀려드는 업무를 처리하느라, 규민에게 아침 소동에 대해 따로 설명할 새가 없었다.

내내 어두운 얼굴로 말이 없던 규민이 계속 신경 쓰여서 재인도 얘기할 타이밍을 노리고 있던 차였다.

재인은 굳게 닫힌 팀장실 문을 슬쩍 쳐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 재인과 규민은 회사 로비에 있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규민아, 아침에는 당황했지?”

“조금 놀라긴 했어.”

“미안해. 그 영화 같이 보러 가기로 했으면서 먼저 봐서.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규민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꺼냈다.


“재인아, 너 어제…… 팀장님이랑 같이 영화 본 거 맞지?”

“……!”

규민은 이미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곧장 아니라고 반박해야 하는데, 재인은 너무 놀란 나머지 그만 박자를 놓쳐버렸다.

규민이 역시, 라는 표정을 지었다.


“듣자마자 알았어. 조현준은 네가 좋아하는 록밴드 멤버 이름이잖아.”

규민이가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니!

재인은 너무 놀라 입이 쩍 벌어졌다.


“첫날부터 좀 이상했어. 토요일에 팀장님이 갑자기 나타나서 긴가민가했는데, 오늘 아침에 영화관 얘기 듣고 확신이 들더라. 재인이 너 팀장님과 몰래 사귀고 있는 거야?”

“무, 무슨 소리야!”

제 목소리에 놀란 재인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재인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그런 오해를 할 수 있는 상황이란 건 충분히 아는데, 팀장님과 나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럼 영화는 왜 봤어?”

“그, 그건…….”

아우, 답답해!

질투에 눈이 먼 팀장님이 멋대로 끌고 갔다고 사실대로 얘기할 수도 없고.


“규민아, 지금 자세히 얘기할 순 없지만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어. 비밀 업무 협약 같은 건데 어차피 두 달 뒤면 끝나니까, 그때까지만 비밀 좀 지켜줘. 부탁할게.”

“너 정말 팀장님과 아무 사이도 아닌 거지?”

“응. 상사와 부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혹시 팀장님을 좋아한다거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같이 있으면 불편하기만 한데.”

재인이 펄쩍 뛰자 규민은 진지한 얼굴로 그녀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규민은 길고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구나. 다행이다! 재인아, 그럼 약속대로 주말에 영화 보러 가는 거지?”

“<프로젝트 M>은 이미 봐버렸는데 어쩌지?”

“괜찮아, 다른 거 보면 되지. 어차피 구실일 뿐이니까.”

“구실?”

규민은 대답 대신 빙긋 웃으며 거듭 약속을 확인했다.


“재인아, 그럼 토요일에 보는 거다. 알았지?”

“으응, 그래.”

재인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구실’이라는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연관 검색어처럼 유라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지금까지의 내 화려한 연애사를 걸고 말하는데, 규민이가 너 좋아하는 게 확실해!」

다시 생각해도 난감했다.


‘유라 말이 사실이면 어떡하지?’

모르겠다. 일이나 하자, 일!

재인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애써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타닥타닥.

그날 밤도 역시, 도혁의 집 거실에서는 적막 속에서 키보드 소리만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도혁과 재인은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이제는 당연한 일과인 초과근무를 하는 중이었다.


“에취!”

도혁이 재채기를 하자 화들짝 놀란 재인이 티슈를 상자째 건넸다.

도혁은 멈칫, 하며 눈을 크게 떴다.


“나도 손 있는데.”

“아, 바, 바이러스가 날아다니면 어쩌나 싶어서…….”

“그렇게 걱정됐나? 미안하군.”

“아, 아니에요! 생리 현상인데요, 뭘. 얼마든지 마음껏 하세요.”

재인은 제멋대로 움직여 버린 제 손을 탓하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어제 도혁의 마음을 눈치챈 뒤로 제집처럼 편안하게 지내보겠다는 다짐이 무색해졌다.

이미 온 신경이 도혁에게 쏠려 있었으니.

운동장같이 넓은 집에 단둘뿐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를 푹 숙이고 모니터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재인이었다.

도혁은 그런 그녀를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서재인 씨, 내일 날이 춥다니 아침에 태워줄게.”

“아, 아니에요! 누가 보면 괜히 오해해요. 오늘 아침처럼요.”

“오해?”

“네. 아침에 강 대리님 때문에 팀장님이랑 무슨 사이인 것처럼 괜히 오해 살 뻔했잖아요. 들키는 줄 알고 간 떨려서 혼났다고요.”

재인이 기겁하며 마다하자 도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불쾌했나?”

“불쾌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겠어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그냥 억울한 거죠.”

그러자 도혁은 눈을 내리깔며 넌지시 물었다.


“그럼…… 무슨 사이면 어떻게 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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