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팀장님이 좋아할 확률 99퍼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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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팀장님이 좋아할 확률 99퍼센트
2022.09.13.
재인의 앞에 키가 훤칠하고 체격이 좋은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나희가 목을 길게 빼고 누군지 확인하려 했지만, 뒷모습뿐인 데다 그마저도 금세 인파에 묻히는 바람에 실패했다.
‘어머 서재인, 애인이 있었어? 전혀 그런 기미가 없었는데 누구지?’
나희는 재인의 뒤를 쫓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우진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나희 씨, 곧 시작하는데 어디 가시려고요?”
“아, 화장실에 좀…….”
“네? 조금 전에 다녀오셨잖아요.”
“맞다. 깜박했네요, 호호.”
당황한 나희는 할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계속 재인과 같이 있던 남자가 신경이 쓰여 우진의 말에 집중할 수 없었다.
평소 궁금한 건 알아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희였다.
‘아이참, 궁금해 죽겠네. 모솔 서재인이 누굴 만나는 거지? 그때 소개팅이 잘 안된 것 같더니 내숭이었어?’
나희는 입사 동기인 재인이 늘 눈엣가시였다.
자신에게 전혀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업무적으로 큰 도움을 주는데도 그랬다.
특히 매사에 여유 있는 듯한 재인의 태도가 거슬렸다.
뭔가를 열심히 하면서도 티를 내지 않고 잠자코 있는 게 나희에게는 위선같이 느껴졌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화려하게 단장한 자신 앞에서 기죽지 않는 것도 약이 올랐다.
아무튼, 나희는 재인이 기가 죽는 꼴을 꼭 한 번 보고 싶었다.
‘남자 키가 꽤 크던데, 꼭 팀장님처럼…… 설마 진짜 팀장님은 아니겠지?’
그러나 도혁이 유독 재인에게만 냉랭하게 대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흥,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지.’
나희는 제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아니지? 만에 하나 그런 거라면? 그러고 보니 팀장님이랑 서재인 회식 때도 좀 이상했어.’
“나희 씨, 무슨 일 있어요?”
옆에서 우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깨문 채 생각에 잠겨 있던 나희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갑자기 심각해 보여서 걱정했습니다.”
“심각할 게 뭐가 있겠어요. 괜찮아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참, 나희 씨, 다음 주에 저희 부모님께 인사를 드려도 될까요?”
“다음 주요?”
나희는 가슴이 철렁했다.
‘아직 만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벌써?’
서로 조건을 앞세워 만나긴 했지만, 너무 빠른 전개였다.
“네. 저희 어머니께서 나희 씨가 너무 궁금하다고 빨리 만나보고 싶다며 하도 성화를 하셔서요.”
“아…… 그러셨구나…….”
내가 혼수를 얼마나 해 갈 수 있는지가 궁금하신 거겠지.
나희는 주선자에게 전해 들어, 우진의 어머니가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너무 빠른가요? 불편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우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나, 참. 싫다고 하면 첫인상부터 찍힐 게 뻔한데, 어쩐다.’
부동산으로 벼락부자가 된 나희의 부모님은 전문직 사위가 염원이었다.
그래서 의사인 우진과의 맞선을 몹시 흡족해하셨다.
우진이 높은 벼슬을 지낸 조상들이 많은 선비 집안인 것도 큰 플러스 요인이었다.
나희도 훈훈한 우진 정도면 남들 보기에 그럴듯한 그림이 그려질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 순간마저도 돌부처 같은 도혁이 머릿속에서 떠날 줄 몰랐다.
‘이러다 꼼짝없이 이 집안에 잡히게 생겼네. 안 되겠어. 팀장님한테 좀 더 적극적으로 접근해봐야지.’
세련된 메이크업과 명품으로 무장한 화려한 미모로 그동안 넘기지 못한 남자가 없었던 나희였다.
유일하게 넘어오지 않은 남자가 바로 도혁이었지만, 그건 전력을 다하지 않았을 뿐이니까.
‘차도혁, 두고 봐. 반드시 넘어오게 만들 테니!’
“나희 씨? 괜찮으세요?”
주먹을 불끈 쥐며 의지를 다지던 나희는 우진의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아, 죄송해요. 잠깐 딴생각을 했네요.”
“저희 어머니 만나러 가는 건…….”
“궁금하시다니 당연히 뵈러 가야죠. 조만간 날짜를 잡아보기로 해요.”
우진의 얼굴이 비로소 환해졌다.
나희는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뭐, 일단 보험은 들어둬야 하니까.’
* * *
월요일 아침.
칼바람을 뚫고 출근길을 걸어온 재인은 따뜻한 사무실에 들어가자 온몸이 노곤해졌다.
나희와 다정하게 믹스커피를 마시던 박 과장이 재인을 반기며 말했다.
“서 주임, 어째 주말만 지나면 더 피곤해 보이네? 다크서클이 장난이 아니고. 어제 밤이라도 새운 거야?”
몹쓸 오지랖이지만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어머, 과장님! 저도 같은 생각했는데. 서 주임, 무슨 일 있었어요?”
강나희, 어째 요즘 잠잠하다 했다.
“일은 무슨 일이요. 별일 없었어요.”
무슨 일이라면 하나밖에 없지.
네가 잘 보이고 싶어서 난리인 차도혁 씨가 나한테 관심 있다는 거?
연지가 다가와 재인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주임님, 그냥 무시하세요. 그런데 좀 피곤해 보이시긴 하네요. 어제 못 주무셨어요?”
“으응, 그럴 일이 있어서.”
.
.
.
99퍼센트,
차도혁이 서재인에게 호감이 있다는 확신.
나머지 1퍼센트,
차도혁이 아주 특이한 별종이라 누구에게나 그렇게 행동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결국, 재인은 어젯밤 내내 이불킥을 하느라 잠을 설쳤다.
바로 차도혁 때문에!
어제, 저녁을 먹고 뒷정리를 할 때 접시를 건네는 도혁과 잠깐 손끝이 스쳤는데, 화들짝 놀라 접시를 떨어뜨렸다.
다행히 깨지진 않았지만, 어이없어하는 도혁과 눈이 딱 마주쳤다.
마주치고 말았으면 다행인데, 그만 흠칫 놀란 티까지 내버렸다.
더불어 얼굴도 홍당무가 돼서.
급기야 눈을 마주 보는 것도 어색하고, 심지어 같이 밥을 먹을 때 입을 벌리는 것조차 신경이 쓰였다.
‘서재인, 정신 차려! 지금까지처럼 모른 척하겠다며? 자꾸 이러면 엄청나게 의식하고 있다고 광고하는 것 같잖아!’
재인은 도혁의 앞에 서면 자꾸만 행동이 굳어버리는 자신을 탓했다.
그동안은 도혁과 같이 있는 게 무섭긴 했지만, 이렇게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들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도혁의 행동이 하나하나 의식되어 몸 둘 바를 모르겠어서, 재인은 하릴없이 밤새 이불만 차댔다.
.
.
.
재인이 앞으로 두 달을 어떻게 더 버틸지 답답해하던 그때, 나희가 큰 소리로 물었다.
“서 주임, 어제 영화관 갔었죠? 시네마월드.”
“네에?”
재인은 저도 모르게 더 큰 소리를 내버렸다.
“놀라긴. 서 주임 영화 보고 나가는 거 봤어요. 웬 남자랑 같이 있던데 누구예요?”
“남자?”
팀원들이 일제히 휘둥그런 눈으로 재인을 쳐다보았다.
지난 3년간 어떠한 스캔들도 일으키지 않고 일과 혼연일체가 된 듯 지내온 재인이 남자를 만났다니.
“서 주임, 그게 정말이야?”
박 과장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 그게…….”
재인은 사색이 된 얼굴로 버벅거렸다.
이미 머릿속은 전력이 끊긴 컴퓨터처럼 먹통이 되어버려 대응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재인은 자꾸만 가빠지려는 숨을 가다듬으며 생각했다.
‘진정해. 그러니까, 어제 극장에서 내가 팀장님과 같이 있는 걸 봤다는 거지? 누구냐고 묻는 걸 보면 팀장님인 줄 아직 모른다는 건데…….’
그렇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강 대리가 팀장님인 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거라면?
재인은 가슴을 졸이며 나희를 쳐다보았다.
‘몹시 궁금하다.’라고 얼굴에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단순한 나희는 얼굴에 속내가 다 드러나서 알기 쉬웠다.
‘휴, 다행이다. 모르는 거 맞네.’
또 하나 다행인 것은 규민과 도혁이 사무실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빨리 수습하면 더 크게 번지는 것은 막을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였다.
지금 이 순간 넘어갈 방법은 딱 하나.
“실은 친구가 누굴 소개해줘서요, 사귀는 건 절대 아니고 가볍게 영화 한 편 본 것뿐이에요. 하하.”
거짓말이 서툴러 티가 팍팍 나는 재인으로서는 최선의 변명이었다.
나희가 팔짱을 낀 채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요? 난 또 뒷모습이 팀장님 같아서 깜짝 놀랐었네.”
파지직.
그 순간, 재인은 돌조각처럼 몸이 굳었다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위, 위험해!’
조금 전, 순수하게 진실을 갈구하던 강 대리의 표정은 포커페이스였단 말인가?
그때, 구세주처럼 박 과장이 끼어들었다.
“에이, 강 대리, 그게 말이 돼? 팀장님이 왜 서 주임이랑 영화를 보시겠어?”
‘나이스, 박 과장님! 계속 말씀하세요.’
재인은 나희의 말을 부정하는 박 과장의 한마디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그동안 박 과장에게 서운했던 일들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재인의 소망이 통했는지 박 과장은 더욱 목청을 올렸다.
“팀장님이 그렇게 한가하신 분이야? 그리고, 눈은 또 얼마나 높으신데. 그때 봤잖아. 톱스타 신연주 보고도 눈 하나 깜짝 안 하시는 거. 그런 팀장님이 서 주임이랑? 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있어!”
어째 잘나간다 했지.
침까지 튀면서 열변을 토하는 박 과장을 보며 재인은 깊은 빡침을 느꼈다.
‘그런 팀장님이 저랑 영화 본 거 맞거든요! 심지어 저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만!’
조금만 늦었더라면 이성이 뚝 끊겨 크게 외칠 뻔했다.
재인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박 과장님 말씀이 백번 옳아요. 팀장님이 왜 저랑 영화를 보시겠어요. 아우, 강 대리님은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을까. 그분 뒷모습이 팀장님과 많이 비슷했나 봐요. 하하.”
“나도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나희가 입을 쌜쭉 내밀었다.
‘그래, 됐어. 강나희, 이제 그만하자.’
재인은 이때다 싶어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박 과장님, 아침 회의 시작하셔야죠?”
“아, 아직 팀장님이랑 한 과장이…….”
“근데 뭐 하는 분이에요? 서 주임이 만나는 남자.”
박 과장의 말을 잘라먹으며 나희가 다시 진실을 갈구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강나희, 누군지 모르는 거 확실하네. 다행이다.’
재인은 일단 한시름 놨다.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죠, 뭐.”
“아하. 그렇구나.”
그 순간 재인은 보았다.
나희의 얼굴에 그려진 승자의 미소를.
나희가 몹시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난 어제 지난번에 선봤던 의사 만났거든요. 어찌나 만나자고 매달리는지 귀찮아 죽겠어요.”
“……!”
강나희, 귀찮아 죽으면 꼭 연락해라.
누가 얘 입에 지퍼 좀 채워주면 좋겠네.
가뜩이나 피곤한 월요일 아침, 회사에 오자마자 다시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재인이었다.
그때였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고 있었습니까?”
차분하고 듣기 좋은 중저음.
도혁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따라 규민까지.
두 사람의 등장에 재인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 팀장님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업무에 대한 고충을 나누던 중이었습니다. 근데, 어디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박 과장이 잘도 뻔뻔스럽게 둘러댔다.
“한 과장과 잠깐 들를 곳이 있었습니다. 자, 회의 시작할까요?”
도혁은 회의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등을 유심히 쳐다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강나희였다.
나희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팀장님, 혹시 어제 영화관 가지 않으셨어요?”
거침없는 발걸음이 멈칫하더니 도혁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그의 날카로운 눈과 미친 듯이 요동치는 재인의 눈이 딱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