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팀장님이 대체 왜 이러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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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팀장님이 대체 왜 이러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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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팀장님이 대체 왜 이러시지?
2022.09.10.
액션영화답게 <프로젝트 M>은 첫 장면부터 강렬한 자동차 추격 신으로 시작되었다.
펑펑 폭탄이 터지고 차들이 뒤집어져 나가떨어졌다.
옆자리에 편안하게 누운 도혁 때문에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 같았는데 어느새 재인도 영화에 몰입해 있었다.
스파이로 적국에 파견된 여자.
알고 봤더니 이중스파이였던 적국의 사령관인 남자.
두 주인공이 합심해 테러집단을 소탕한다는 줄거리였다.
영화가 흘러 흘러 중반부로 접어들 무렵. 서로를 의심하면서도 주체할 수 없이 서로에게 끌리던 두 주인공이 결판을 내는 장면이 나왔다.
- “어디까지 알고 있지?”
- “아니야! 오해하지 마.”
부정하는 여자의 팔목을 남자가 거칠게 쥐었다. 그러고는 여자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말했다.
- “그걸 순순히 믿을 것 같아?”
- “어떻게 하면 믿어줄 건데?”
여자는 올찬 표정으로 남자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두 입술이 서로를 갈구하듯 벌어졌다.
- “그럼 증명해봐, 몸으로.”
기다렸다는 듯 두 입술이 겹치고 정신없이 서로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재인은 생각했다.
‘아니, 의심하면 고문을 해서 진실을 밝혀내야지, 왜들 이러는 거야?’
어쩜 그렇게 한결같이 개연성이 없는지.
재인은 사표를 던지러 도혁의 방에 들어갔다가 오해받은 상황이 떠올랐다.
「좋아. 그럼 스파이가 아니란 걸 증명해봐. 몸으로.」
처음 도혁의 말을 들었을 때는 무슨 수작인가 싶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수작에 말려 지금 같이 영화까지 보고 있다.
‘인생 참,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가 없네.’
이제 겨우 일주일 지났는데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사표를 던지기로 결심하기 전까지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전개였다.
싱숭생숭한 기분에 재인은 도혁을 곁눈질하다 화들짝 놀랐다.
도혁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크린에서는 여전히 두 주인공들이 열정적으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화면이야 안 보면 그만이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재인의 얼굴이 아예 새빨갛다 못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나마 극장 안이 어두워서 얼굴색을 들키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에 반해 도혁은 심중을 헤아릴 수 없는 얼굴로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재인은 몸 둘 바를 몰라 그의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제야 도혁도 다시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렸다.
‘팀장님이 대체 왜 이러시지?’
재인의 맥박이 급속도로 빨라졌다.
멋대로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그때까지 어떻게 버텨야 할지 난감했다.
자몽에이드를 다 마신 데다 바짝 긴장까지 한 탓인지, 재인은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그래, 화장실도 들를 겸 잠시 나갔다 오자.’
재인은 도혁에게 몸을 기울여 작게 속삭였다.
“팀장님,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말을 마친 재인은 재빨리 밖으로 빠져나갔다.
* * *
화장실에서 나올 때 세면대 거울로 확인하니 다행히 얼굴빛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밖으로 나온 재인은 의자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은 그럴 필요를 못 느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이제는 아무리 둔한 재인이라도 더 이상 모른 척 넘어갈 수 없었다.
분명 조금 전 저를 바라보던 도혁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고 보니 전에도 몇 번이나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눈빛을 보냈었다.
‘팀장님, 요새 진짜 왜 그러시는 거예요? 신경 쓰이게…….’
지난 며칠간 도혁의 행동은 전과 판이하게 달랐다.
평소에는 냉정하리만치 이성적이고 칼 같은 성격에 심중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이 트레이드마크였던 그가, 요즘에는 어쩐지 허술해진 것 같았다.
심지어 치사하게 친구 만나는 데 따라오기까지 하고.
서슬이 시퍼렇고 무시무시했던 그 차도혁이!
계약 전과 후의 갭이 너무 커서 <우리 팀장님이 달라졌어요>라도 찍어야 할 판이었다.
재인은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 같은 머릿속을 차근차근 정리해보기로 했다.
지난 사건들을 돌이키며 차도혁 팀장님의 이상 행동을 하나씩 짚어나갔다.
[1] 퇴근길에 우연히 만난 민우 선배가 밥을 먹자고 했던 날, 멋대로 못 가게 막고는 5성급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맛있는 음식을 사 줬다, 무려 로브스터와 한우 안심스테이크를!
→ 상사가 밥을 사줄 수도 있지만, 왜 하필 그런 고급 레스토랑에서?
[2] 민우 선배가 서연 언니한테 줄 프러포즈 목걸이를 사려고 했던 날, 팀장님이 갑자기 규민이 환영 회식을 잡았고, 회식 후에는 내가 산책하는 데까지 따라와 춥다고 하니까 코트까지 벗어 줬다.
→ 춥다고 했으니 옷을 벗어 줄 수도 있지, 라고 말했다가 유라한테 욕만 먹었다.
[3] 강나희의 강아지 물품 때문에 유라 만나러 나갈 때, 호빵이 선물 보따리가 무겁다면서 광화문까지 팀장님 차로 데려다줬다.
→ 그때, 차를 멈추더니 뭔가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서재인 씨…….” 다음에 이어질 말은 뭐였을까?
[4] 우리 집 앞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고, 내가 넘어지니까 도와줬다.
→ 맨홀에 끼인 구두 한 짝을, 그거 일부러 놓고 온 건 아닐까 의심도 들었다. 만약 일부러 그랬다면 이유는? 나를 집까지 안고 가려고?
[5] 오늘은 ‘베이크 문’에도 같이 갔다.
→ 바로 어제 내가 좋아하는 곳이라고 말했는데. 단 하루 만에 ‘시장조사’라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면서 나를 베이크 문으로 데려갔다.
[6] 어제 규민이가 영화 얘기했을 땐 가만있는 나를 도발하더니, 막상 오늘 약속을 잡으니까 팀장님이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
→ 팀장님, 왜 힘들게 제 무덤을 파서 이 고생을 하세요? 어라,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건…… 질투?
‘아, 그런 거였구나!’
재인은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애써 아니라고 부정해왔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그동안의 일들을 하나씩 되짚어 보니, 도혁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행동 하나하나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 와중에 미모의 차 팀장님이 너한테 관심 있다, 이건데…….」
유라야,
아무래도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언제부터 그런 거지?
사표 던지기 전? 그 후?
이성을 사귀지 말라는 계약 조항도 그래서 들어간 건가?
도혁의 태도가 눈에 띄게 바뀐 것은 사표를 던진 후였지만, 마침내 재인의 촉이 알려주고 있었다.
왠지 그전부터였던 것 같다고.
재인의 얼굴이 금세 발갛게 변했다.
‘맙소사! 이제 어떡해!’
재인은 두 볼을 감싸며 부끄러움에 몸부림쳤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팀장님이랑 진짜 사귀기라도 할 셈이야?’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섰다.
도혁이 싫어서 소름 끼치는 것이 아니었다.
뭔가 이상야릇한 감정이, 재인이 난생처음 느껴보는 감정이 전신을 휘감았기 때문이었다.
‘차도혁과 사귄다.’
의지와 상관없이 떠오른 생각이지만, 도무지 말도 안 된다.
단 한 번도 도혁을 이성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도혁의 입사 첫날.
보기만 해도 황홀해지는 그의 비주얼에 감탄하긴 했지만, 곧장 업무로 산산이 부서지는 바람에 사적인 감정이 피어날 틈이 없었다.
도혁이 던지는 일에 깔려 압사할 것 같았기에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을 뿐.
게다가 재인은 꿈을 위해 머지않아 일본으로 갈 계획이다.
고이 모아뒀던 학비를 부모님 가게 옮기는 데 몽땅 털어 넣은 지금, 유일한 희망은 도혁이 약속한 장학금뿐이었다.
행여 그와 사적인 관계로 얽혔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재인의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상황이었다.
‘정신 차려, 서재인! 지금 한가하게 감정에 휩쓸릴 때가 아니야. 계약했던 대로 두 달만 잘 버텨서 유학 가야지.’
재인은 마음을 다잡으며 혼란스러운 감정을 애써 잠재웠다.
일본제과제빵학교를 다니는 것이야말로 재인이 오랫동안 염원해온 소중한 꿈이었다.
‘그래, 한순간의 실수로 꿈을 망칠 수는 없어.’
생각은 정리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난감했다.
거의 확신의 단계에 들어섰지만, 만에 하나 도혁이 자신에게 호감 있는 것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재인은 부디 자신의 예감이 틀렸기를 바랐다.
설령 사실이라 해도 재인을 이성으로 보지 않겠다는 계약 조항이 있었다.
후계자 승계를 결정짓는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라도 도혁이 섣불리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도혁의 입으로 직접 듣지 않았으니 계속 모르는 척하면 그만이었다.
“그래,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자. 그게 최선이야.”
재인은 스스로 다짐하듯 몇 번이고 혼잣말을 했다.
* * *
재인은 허리를 숙이고 조심조심 제자리로 돌아갔다.
영화는 절정 부분인 듯 치열한 육탄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테러단에 둘러싸인 두 주인공이 2대 100으로 싸우는, 정말 영화니까 가능한 장관이 펼쳐졌다.
재인이 자리에 앉자, 도혁이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잘 다녀왔나?”
“아, 네…….”
재인은 막상 도혁을 보니 긴장이 되어 어색하게 웃었다.
“잠깐치곤 꽤 오래 있었군. 화장실에서.”
“네, 화장실에…….”
응? 잠깐만.
도혁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었다.
순간 재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화장실에 간 사람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면……?
큰일을 본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간과했다.
재인은 다급히 도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팀장님이 생각하시는 그거 아니에요.”
“무슨 생각?”
도혁이 딴청을 부렸다.
이 사람이, 진짜!
“그거 있잖아요.”
“그게 뭔데?”
“아시면서 이러기예요?”
“전혀 모르겠는데.”
도혁의 입가에 얄궂은 미소가 걸렸다.
와, 진짜 억울하다. 내가 누구 때문에 늦게 들어왔는데!
이러다 정말 무고하게 누명……까지는 오버지만, 아무튼 낯 뜨거워서 오늘 밤 이불킥 백만 번 하게 생겼다.
“팀장님, 암튼 아니에요!”
“……서재인 씨?”
“네?”
“알았으니까 영화 좀 봅시다.”
도혁은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심히 말했다.
“팀장니임……!”
그때 뒷좌석에 앉은 사람이 쉿! 하는 제스처를 보냈다.
재인은 입을 딱 다물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이게 호감 있는 여자를 대하는 태도 맞아? 이렇게 약 올리고 민망하게 만드는 게?’
재인은 잠시나마 차도혁과 사귄다고 상상했던 자신의 머릿속을 지우개로 박박 지우고 싶었다.
* * *
드디어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고 상영관에 불이 환하게 들어왔다.
“꽤 재밌었어.”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도혁이 퍽 흡족한 표정으로 소감을 밝혔다.
“네, 네, 다행입니다.”
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영혼 없이 대답했다.
“서재인 씨는 화장실 다녀오느라 중요한 부분을 놓쳤는데 괜찮나?”
화장실을 또 강조하시겠다?
재인은 일부러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규민이랑 또 볼 건데 잘됐죠, 뭐. 다 알면 재미가 없잖아요?”
순간 도혁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기어이 가겠다?”
“약속했으니까요. 잊으셨어요? 팀장님이 가라고 등 떠미셨잖아요.”
오늘 미리 보면 약속 취소할 줄 알았던 거야? 너무 안일하셨네.
도혁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재인을 지나치며 상영관 밖으로 나가버렸다.
“같이 가요!”
그의 뒤를 쫓는 재인의 발걸음이 사뿐사뿐 가벼웠다.
* * *
“나희 씨, 영화 시간 다 됐어요. 가시죠.”
“네.”
나희는 우진의 뒤를 따라 상영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지난번 선을 본 의사 우진과 데이트를 하는 중이었다.
도혁에게 지대한 관심이 있는 나희지만, 좀처럼 넘어오지 않는 그만 쳐다볼 수는 없었다.
정형외과 의사인 우진은 외모는 도혁에게 한참 처져도 조건은 꽤 괜찮았다.
우진 또한 나희의 외모도 외모지만, 자신에게 병원을 차려줄 수 있는 나희 부모님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프로젝트 M>이 꽤 재밌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꼭 보고 싶었던 영화예요.”
나희의 눈이 간드러지게 휘었다.
좌석을 확인하고 막 자리에 앉은 그때였다.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같이 가요!”
무심코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본 나희는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재인이 막 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