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한가하게 영화나 볼 사이
(28/129)
28화. 한가하게 영화나 볼 사이
(28/129)
28화. 한가하게 영화나 볼 사이
2022.09.06.
“저기…… 팀장님, 여긴 왜 오셨어요?”
재인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요일 오후. 재인과 도혁은 사람들로 가득 찬 베이커리 카페 안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먹음직스러운 몽블랑과 타르트, 생초콜릿 등이 놓여 있었다.
바로 어제, 재인이 힘들 때마다 찾는다고 얘기했던 ‘베이크 문’이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도혁이 무심히 답했다.
“여기 맛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긴 한데, 시장조사라면서요? 저희 제품 판매처나 경쟁사들 돌면서 조사하는 거 아니었어요?”
“이, 이것도 시장조사의 일환이지. 다음에 디저트를 기획할 수도 있으니까.”
“창사 이래 한 번도 한 적 없는 디저트 기획을요?”
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자, 도혁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흠흠. 사업이 어떻게 확장될지 누가 알겠어.”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건지.
석연치 않은 재인의 표정을 본 도혁이 한쪽 눈썹을 끌어올렸다.
“……싫으면 그냥 갈까?”
“아니요! 시킨 건 먹고 가야죠. 아까우니까.”
재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잽싸게 포크를 들었다.
사실 ‘팀장님과 함께’라는 것만 빼면 아주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래, 오고 싶어도 바빠서 못 왔었는데 이게 웬 횡재야!
“근데요, 팀장님. 이런 건 미리 좀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깜짝 놀랐잖아요.”
“……깜짝 놀라면 더 커진다고…….”
당황한 도혁은 아침에 김 실장이 한 말을 혼자 되뇌었다.
「혹시 이벤트를 한번 해보는 건 어떻습니까? 여자들은 깜짝 놀라면 감동이 더 커지니까요.」
‘서재인 씨가 좋아할 줄 알고 일부러 왔는데. 혹시 김 실장님 말이 틀렸나?’
고심하는 도혁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재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커지긴 뭐가 커져요? 눈이요? 화병이 커지겠죠!”
재인은 툴툴대며 제 앞에 놓인 몽블랑을 한 입 먹었다.
진한 밤 향기가 입안 가득 퍼지는가 싶더니 금세 사르르 녹으며 자취를 감췄다.
‘으음! 역시 천상의 맛이야. 맛있으니까 이번만 봐준다.’
그때였다. 테이블에 올려놓은 재인의 휴대전화가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한규민]
누가 먼저라고 할 새도 없이 재인과 도혁의 시선이 마주쳤다.
‘어떡하지? 받았다가 괜히 팀장님한테 오해 사는 거 아니야?’
게다가 유라의 말대로 규민이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 게 맞다면?
정말 그렇다면, 친구일 뿐인데 왜 의심하냐며 도혁에게 큰소리치는 것도 양심에 찔리는 일.
재인은 이런저런 생각에 전화를 받지도 못하고 도혁의 눈치만 살폈다.
그러나 도혁은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받지 그래?”
“아, 네에.”
재인은 그제야 멋쩍게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재인아! 나야, 규민이.
듣기 좋은 쾌활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응, 무슨 일이야?”
―다음 주 토요일에 <프로젝트 M> 보러 가는 거 물어보려고. 일산 영화관에서 1시 반에 있던데 어때?
“1시 반? 괜찮아.”
―점심도 같이 먹을래? 내가 11시까지 데리러 갈게.
순간 어제의 악몽을 떠올린 재인은 펄쩍 뛰며 규민을 뜯어말렸다.
“아니야! 그날 아침에 들를 곳이 있으니까 영화관으로 바로 갈게.”
―알았어. 그럼 12시에 영화관 앞에서 봐.
“그래.”
―재인아, 지금 뭐 해? 밖인 거 같은데…….
“응?”
재인은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심장이 철렁했다.
“규민아, 미안한데 내가 지금 좀 바빠서 끊을게. 내일 보자!”
황급히 전화를 끊은 그녀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서늘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그래서, 정말 영화를 보러 가겠다는 건가?”
도혁이 팔짱을 낀 채 재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네, 약속했으니까요.”
어젯밤 기세등등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잔뜩 주눅이 든 재인이었다.
규민이 제게 사심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면 당당하게 받아쳤을 텐데.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던 도혁이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만 갈까?”
아, 드디어 집에 가는구나!
재인은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별 탈 없이 넘어간 것 같지?’
저벅저벅.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서나가는 도혁의 등을 보며 재인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 * *
‘내가 차도혁 씨를 너무 만만하게 봤지.’
재인은 지금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멀티플렉스 영화관 시네마월드’의 로비 한복판에 서 있었다.
당연히 집으로 갈 줄 알았던 도혁이 멋대로 끌고 온 것이었다.
“팀장님, 여긴 또 왜 오셨어요?”
“영화 보려고.”
그럼 팝콘 먹으러 왔겠어? 라는 듯, 도혁은 당연한 질문을 왜 하냐는 표정이었다.
재인은 참을 인(忍) 자를 꾹꾹 눌러 쓰며 말했다.
“그러니까, 왜 저랑요?”
이보세요, 우리가 한가하게 영화나 같이 볼 사이는 아니잖아요?
재인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하며 올려다보자 도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갑자기 꼭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는데, 서재인 씨 혼자 두는 건 불안하니까.”
“불안하긴 뭐가 불안해요! 저 스파이 아니라니까요!”
재인이 버럭 하는데도 도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매표소를 향해 걸어갔다.
재인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근처에 앉았다.
주말이라 그런지 여기를 봐도 연인, 저기를 봐도 연인.
온 사방에서 하트가 뿅뿅 떠다녔다.
‘좋겠다. 주말에 일하다 상사랑 극장에 온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야.’
재인은 도혁과 지낸 고작 며칠이 마치 몇 달처럼 느껴졌다.
“서재인 씨, 팝콘은 먹나?”
매표를 마친 도혁은 재인을 이끌고 스낵코너 앞에 섰다.
“팀장님, 지금 팝콘이 문제예요?”
“주문하시겠습니까?”
직원의 묻자 도혁은 진지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보며 말했다.
“흠. 팝콘 L 사이즈요.”
“맛은 고소한 맛, 캐러멜, 어니언, 갈릭 중에서 두 가지 선택하실 수 있는데 어떤 맛으로 드릴까요?”
“아무거나 주시죠.”
그때, 재인이 황급히 끼어들며 정정했다.
“캐러멜이랑 어니언이요. 음료는 자몽에이드로 주시고요.”
이왕 먹는 거 맛있게 먹어야지.
지금 팝콘이 문제냐고 했던 재인의 취향은 확고했다.
도혁은 피식 웃으며 재인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잠시 후, 팝콘 통을 한 아름 안아 들고 재인이 물었다.
왠지 모를 찜찜한 기분에 돌다리를 두드리는 심정으로.
“팀장님, 저 다음 주에 <프로젝트 M> 보기로 한 건 기억하시죠?”
“알아.”
“다행이네요. 근데 팀장님, 무슨 영화 끊으셨어요?”
“<프로젝트 M>.”
이 사람이 진짜!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하는 도혁 때문에 재인은 입이 딱 벌어졌다.
불길한 예감은 어째서 틀리는 법이 없지?
“팀장님, 저 다음 주에 <프로젝트 M> 보기로 했다니까요! 보러 가라고 등까지 떠미셨잖아요.”
“그랬지.”
“근데 그 영화를 보면 어떡해요?”
“보고 싶으니까.”
“그 마음은 잘 알겠는데요, 다른 영화로 바꿔요.”
“어떡하지? 그거 아니면 보고 싶은 영화가 없는데.”
도혁이 얄궂은 미소를 지었다.
재인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참았다.
계약 위반을 들먹이며 보러 가지 말라고 했는데.
그게 안 되니까 골탕 먹이는 거야? 설마?
“팀장님, 이거 어떤 영화인지 아세요?”
“여기에 쓰여 있군.”
도혁이 극장 벽에 붙어 있는 대형 포스터를 가리키며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렸다.
“<프로젝트 M>. 숨 막히게 펼쳐지는 국제첩보전. 상상초월, 허를 찌르는 역대급 반전을 기대하라.”
“생각해보세요, 팀장님. 상상초월, 허를 찌르는 역대급 반전이라는데, 미리 알면 재미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무척, 재미가 없겠지. 다시 보고 싶지 않을 만큼.”
‘무척’에 힘을 주어 말하는 도혁의 얼굴에 미안한 기색이라고는 단 한 줌도 없었다.
말을 말자.
상대가 차도혁인데 내 입만 아프지.
재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규민에게 다른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할 수도 없고.
이미 다 아는 내용을 모르는 척 놀란 척 연기하며 보게 생겼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치사하게 굴다니.
재인은 생각할수록 기가 막혔다.
‘좋았어!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차도혁 씨 보란 듯이, 규민이와 같이, 아주 즐거운 척 <프로젝트 M>을 보고야 말겠어!’
본 영화 또 보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결심을 굳힌 재인은 일부러 여유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팀장님, 제 취미가 뭔지 아세요?”
“뭔데?”
“본 영화 또 보는 거예요. 특히 이렇게 반전 있는 영화는요, 놓치는 부분이 많아서 보면 볼수록 새롭고 더 재밌거든요. 팀장님은 잘 모르시겠지만.”
순간 도혁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정말?”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도혁에게 이대로 당하기만 하면 억울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것 같은 재인이었다.
“정말이고말고요. 자, 들어가시죠.”
재인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앞장을 섰다.
그리고 기세 좋게 상영관 안으로 들어가 좌석을 확인하자마자.
재인은 그대로 돌이 되었다.
눕자마자 잠이 올 것 같이 푹신해 보이는, 새빨간 색이 심히 부담스러운 리클라이너 두 개가 딱 붙어 있었다.
심지어 중간에 팔걸이도 없이.
모솔인 재인은 생전 경험할 일이 없었던 프리미엄 상영관이었다.
‘여기에, 팀장님이랑 둘이, 앉아야 하는 거야?’
황급히 다른 좌석들을 둘러보니, 벌써 몇몇 커플이 리클라이너를 뒤로 눕혀놓고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고 얼굴이 덴 듯 화끈거렸다.
당황해하는 재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혁은 푹신한 좌석에 편안하게 기대앉았다.
“서재인 씨도 앉지?”
순간, 재인의 흔들리는 눈동자와 도혁의 무심한 눈동자가 마주쳤다.
재인은 재빨리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서재인, 정신 차려! 괜히 혼자 오버하고 있잖아.’
재인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하지만 누가 봐도 어색한 몸짓으로 의자에 앉았다.
벌서는 것처럼 의자 끝에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걸터앉은 모습에 도혁이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서재인 씨, 그러면 불편할 텐데?”
“괘, 괜찮아요. 저 영화 볼 때 원래 이렇게 봐요. 신경 쓰지 마세요. 하하.”
민망해진 재인은 괜스레 팝콘 통만 꼭 끌어안았다.
“팝콘.”
“네, 여기 있습니다!”
도혁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재인은 양손으로 공손히 팝콘 통을 내밀었다.
도혁은 씩 웃으며 팝콘을 입에 넣더니 입술을 달싹달싹 움직였다.
뭐라 말하는 것 같은데 사람들이 웅성웅성 들어오는 바람에 잘 들리지 않았다.
“네? 뭐라고 하셨어요?”
도혁이 천천히 같은 입 모양을 반복했다.
재인은 너무 궁금한 나머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나직한 음성이 그녀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편하게 누우라고. 계속 그 자세로 있으면 나를 의식하는 것으로 간주하겠어.”
동시에 도혁은 몸을 일으켜 앉아 재인의 리클라이너 버튼을 꾸욱 눌렀다.
지이이잉. 리클라이너가 펴지면서 그녀의 몸이 뒤로 넘어가 등받이에 폭 파묻혔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얼떨떨한 재인은 그저 눈앞을 가로지른 도혁의 팔만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갑자기 이러시면……!”
“편하게 봐.”
도혁이 속삭이듯 말했다.
눕혀진 재인의 위에서 두 팔로 버티고 있는 도혁은, 마치 금방이라도 그녀에게 내려올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재인은 숨이 턱 막히고 가슴이 방망이질 쳤다.
‘이러면서 어떻게 편하게 보라는 거야?’
재인이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해하는 가운데, 상영관 불이 꺼졌다.
도혁은 씩 웃더니 자기 자리에 등을 대고 누웠다.
그제야 재인은 잔뜩 굳어 있던 몸의 긴장을 풀 수 있었다.
하지만 뛰는 가슴까지 멈추게 할 수는 없어 팝콘 통만 꼭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