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비즈니스 빼면 시체인 사이 (27/129)


27화. 비즈니스 빼면 시체인 사이
2022.09.03.



“가, 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거 봐, 말 더듬는 거. 그거 너잖아.

헉!

재인은 머리가 쭈뼛 곤두서고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유라의 목소리에서 강한 확신이 느껴졌다.


‘침착해. 그냥 대충 찍은 것뿐이야. 아직 유라는 확증이 없어.’

재인은 이미 끊어진 정신줄을 간신히 붙잡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흠흠. 일단 차분하게 우겨보자.


“다짜고짜 팀장님이랑 같이 사는 사람 물으니까 황당해서 그랬지.”

―재인 재인, 지금 확실한 증거가 없다고 잡아떼는 거야?

어, 맞아.

잘 알고 있네.

그냥 좀 넘어가면 안 될까?


“잡아뗄 게 뭐 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그만해.”

―그래? 일단 만나서 얘기해.

“아니야! 나 방금 집에서 나왔어! 다음에 보자. 알았지?”

―잘됐네. 지금 너네 집 앞이니까 내려와.

“……!”

 

 
재인은 전화기를 붙든 채 돌처럼 굳어버렸다.

입은 있되 할 말을 잃은 그녀의 귀에 서늘한 음성이 꽂혔다.


―서재인, 넌 큰 실수를 했어.

큰 실수?


―어제 나랑 통화한 지 10분 만에 세비야에 도착했거든? 그런데 어떻게 최소 20분 거리에 있는 회사에 휴대전화를 놓고 올 수가 있지? 휴대전화가 순간 이동을 한 것도 아닐 테고.

쩌억!

재인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쪼개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차 팀장님이 광화문까지 데려다주는데 그러면서 차에 놓고 내렸겠지. 호빵이 선물 무거울까 봐 내가 가겠다고 해도 계속 마다했고. 그때부터 수상했어. 왜? 넌 지금 너네 집에서 안 사니까.

이런! 갑작스러운 도혁의 출현에 당황해서 그 부분을 놓쳤다.


“그, 그건…….”

―저번에 너네 회사 강 대리가 불편한 남자 집에서 어쩔 수 없이 산다고 했었지?

“그, 그래, 맞아! 강나희.”

―너 설마. 강나희라고 우기면 내가 그냥 곧이곧대로 믿을 줄 알았어? 확증 잡을 때까지 기다렸을 뿐이야.

호빵이 선물 보따리도 확보해둬야 했겠고.

최유라, 내 친구지만 무섭다.

적이었으면 뼈도 못 추렸겠네.


―정리하자면, 네가 그 강나희였고, 같이 사는 상대는 차 팀장님이라는 거지. 내 말이 맞지?

더는 아니라고 우겨도 믿을 유라가 아니고.

게다가 어제는 팀장님과 명함까지 교환했으니 여차하면 직접 전화해서 물어볼지도 모른다.

재인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내가 졌다.”

―그동안 잡아떼느라 고생했어.

유라의 목소리에서 승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응. 많이 힘들었어.”

―재인아, 이 언니 한번 마음먹으면 끝장 보는 거 알지? 자,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 테니까 다 말해봐.

은근한 회유와 협박이 뒤섞인 유라의 말에 재인은 마음이 마구 흔들렸다.

순순히 넘어갈 유라도 아니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다 말해버릴까?


“유라야, 있잖아…….”

재인은 그동안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어 답답했던 속을 아주 시원하게 비워냈다.


―뭐? 차 팀장님이 대산그룹 후계자라고?

휴대전화 너머에서 유라의 괴성이 들려왔다.


“목소리 좀 낮춰! 절대, 절대 비밀이니까 너만 알고 있어.”

―후계자가 왜 팀장으로 있어? 뭐, 경영수업 같은 건가?

“그런 거겠지.”

―경쟁세력은 또 누구고?

“팀장님 작은아버지인 사장님인 것 같아. 알면 더 얽힐까 봐 자세히 묻지도 않았어.”

―오케이! 다 이해했어. 그러니까, 넌 그 대가로 일본제과제빵학교 전액장학금을 받는 거란 말이지?

“응.”

―흐음……. 재벌가 권력 싸움에 억울하게 말려든 거네.

“그렇다고 봐야지. 하하.”

사실은 도망칠 수도 있었는데.

아쉬워서 내 발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는 얘긴 죽어도 못 해.


―그 와중에 미모의 차 팀장님이 너한테 관심 있다, 이건데…….

재인은 유라가 혼잣말하듯 읊조리는 소리에 기겁했다.


“무, 무슨 헛소리야!”

―헛소리 아닌데? 어제 보니까 팀장님이 널 보는 눈빛이 엄청 다정하더라.

“다정은 무슨! 맨날 멋대로 버럭 했다, 입 닫았다, 사람 불편하게나 하는데.”

―아니던데. 아주 꿀이 뚝뚝 떨어지던데? 규민이 볼 때는 눈에서 어마어마하게 질투가 터져 나왔고.

“네가 잘못 본 거겠지. 꿀은 무슨. 그리고 질투가 아니라 감시야, 그건. 계약 조항 중에 ‘계약 기간 중에는 보안을 위해 이성을 사귀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거든.”

―그거 너무 억지 아니니?

유라가 기가 막힌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내 말이. 근데 원래 연인 사이에는 비밀이 없으니까 불안해하는 걸 이해는 해.”

―그건 그렇다 쳐. 근데 광화문까지는 왜 데려다줘?

“짐이 무거우니까.”

―야, 관심이 없으면 팔이 떨어지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고! 옷 벗어 준 것도 차 팀장님 맞지?

“그때는 춥다고 해서 그냥 벗어 준 거라니까.”

―아우, 답답해! 차라리 벽을 보고 얘기하고 말지. 이러니 네가 여태 모솔인 거야.

“내가 뭐 어떻다고…….”

재인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됐어. 근데 넌 그 잘생긴 차 팀장님한테 조금도 관심 없어?

“야, 무서운 소리 하지 마.”

―왜? 어마어마하게 잘생겼잖아! 게다가 재벌! 상식적으로 안 끌리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네가 같이 안 지내봐서 그래. 그 엄청난 잘생김을 순식간에 잊게 만들어.”

―아, 그러고 보니 중요한 질문이 빠졌다.

“뭔데?”

―둘이서 한집에 있는데, 별일 없었어?

그윽한 유라의 목소리에 재인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별일은 무슨! 죽도록 일만 했거든. 어제도 낮에 일 못 했다고 새벽 1시까지 시키더라.”

―다른 건 없었고?

“그냥 먹고 자는 거 빼면 일만 했다니까! 팀장님이랑 나, 진짜 비즈니스 빼면 시체인 사이야.”

―정말이야? 흐음.

유라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차 팀장님 말이야…… 역시 그쪽으로 무슨 문제가 있나?

“그쪽? 무슨 쪽?”

―아, 그쪽 있잖아.

“그러니까 그쪽이 뭔데?”

갑갑하다는 듯 유라가 버럭 소리 질렀다.


―아우우, 혹시…… 남자를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그 순간, 재인은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 같았다.


“남…… 남자……?”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분명 너한테 호감이 있어 보였는데 둘만 있을 때도 일만 시켜. 여자한테 관심 자체가 없는 거 아니야?

“시끄러워! 팀장님과 나는 더도 덜도 말고 그냥 계약 관계라 한집에서 지낸다, 그게 다야!”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우기는데, 그런 거로 치자. 앞으로 두고 보겠어.

“두고 보긴 뭘 두고 봐. 암튼 진짜 비밀이니까 꼭 너만 알고 있어야 해. 알았지?”

―알았어. 근데 너, 규민이는 어떻게 할 거야?

갑자기 규민의 이야기가 나오자 재인은 어안이 벙벙했다.


“친군데 어떡하긴 뭘 어떻게 해?”

―지금까지 내 화려한 연애사를 걸고 말하는데, 규민이가 너 좋아하는 게 확실해! 혹시나 해서 어제 지켜봤는데 티가 팍팍 나더라.

“뭐……?”

―나한테 연락했을 때도 너 사귀는 사람 있는지부터 확인했어.

“그, 그럴 리가…….”

―뭐, 둘이 알아서 할 문제지만 아무래도 네가 전혀 눈치를 못 채는 것 같아서 귀띔해주는 거야.

웃음기 하나 없는 유라의 목소리에 재인은 말문이 막혔다.

한 번도 규민을 남자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그저 당혹스럽기만 했다.


―말이 나와서 말이지, 너 규민이 잡으면 복 터진 거야.

“……말도 안 돼.”

―내가 어제 가면서 은근슬쩍 물어봤는데 집안이 그 지역에서 알아주는 유지래. 집안 좋아, 인물도 좋아, 성격은 더 좋아. 이상적인 남편감 그 자체지.

확실히.

규민은 제3자의 눈으로 봐도 뭐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친구였다.

재인은 지금껏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규민의 마음을 알고 나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나저나 한규민, 믿는 구석이 있어서 팀장님과 그렇게 신경전을 벌였던 거야?

문득 규민을 잡아먹을 것처럼 쳐다보던 도혁의 싸늘한 눈빛이 떠올랐다.

그때.


―왜 말이 없어? 너 지금 차 팀장님 생각하고 있었지?

와, 최유라 너 독심술이라도 하는 거니?

정곡을 찌르는 유라의 기습에 재인은 간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아니야.”

―아니긴. 나 같아도 고민이 되긴 하겠다. 차 팀장님과 한규민, 둘 다 너무 괜찮잖아.

“됐어. 팀장님과 엮는 것 좀 그만할래? 나한테 아무 관심 없다니까 그러네.”

―…….

유라가 또 말이 없었다. 무섭게.


―서재인, 다른 사람이 그랬으면 내숭이라고 욕을 바가지로 했겠지만, 너니까 이해한다. 그래, 그런 거라 치고 밤에 문이나 잘 잠가.

“그런 거 아니라니까! 어서 집에 들어가. 날도 추운데.”

―나? 내 방 침대에 누워 있는데?

유라의 심드렁한 대답이 재인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뭐? 우리 집 앞이라며?”

―순진하긴. 그냥 떠본 건데 제대로 걸려들었지. 넌 아직 이 언니한테 멀었어.

킥킥킥. 마귀할멈 같은 웃음소리를 끝으로 전화가 뚝 끊겼다.


“최유라, 너어어어어!”

휴대전화를 움켜쥔 재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제대로 당했다!’

 

* * *

오전에 일을 마치고 성준이 해준 맛있는 비빔국수를 점심으로 먹고 난 뒤였다.

갑작스레 도혁이 말을 꺼냈다.


“자, 오늘 일은 여기서 마무리하죠. 수고 많았습니다.”

재인은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차도혁이 그 좋아하는 일을 그만하겠다고? 그렇게 얘기한 거야?

이럴 거면 마음 편히 밥 먹게 먹기 전에 얘기하지,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이게 웬 횡재냐!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김 실장님,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집어넣는 재인의 손놀림이 경쾌했다.

저도 모르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예전 같으면 주말 내내 뒹굴어도 성에 차지 않았을 텐데.

고작 반나절의 자유에 엄청난 행복감을 느끼게 된 재인이었다.

오랜만에 뒹굴뒹굴 쉴 생각에 들떠 있던 그때.

식탁에 앉아 있던 도혁이 갑자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서재인 씨……?”

그릇을 잡은 재인의 손이 움찔 놀랐다.

그 소리가 마치 공포영화의 전주곡 같아서.


“……네?”

“…….”

자기가 불렀으면서.

도혁은 재인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니, 이분이 왜 이러시나?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바짝 긴장한 재인은 빛의 속도로 설거지를 마무리했다.

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제 방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잠깐만.”

도혁이 또 재인을 불러세웠다.

팀장님, 진짜 간 떨리게 왜 그러세요!

재인은 마음을 졸이며 물었다.


“……왜요?”

“…….”

도혁은 입술만 달싹일 뿐 여전히 말이 없었다.

성준이 답답하다는 듯 쳐다보자, 도혁은 한쪽 눈썹을 끌어올리며 눈길을 피했다.

보다 못한 성준이 말을 꺼냈다.


“햇살이 좋으니 두 분 바람이라도 쐬고 오시죠. 모처럼 일도 일찍 끝났는데.”

“아, 아니에요! 팀장님도 피곤하실 텐데 푹 쉬셔야죠. 맨날 부는 바람이 뭐 대수라고. 그럼 전 이만.”

질겁한 재인이 등을 보이며 잽싸게 도망치려는 찰나.

무뚝뚝한 음성이 덥석, 뒷덜미를 붙들었다.


“나가지.”

“네? 아니……,”

도혁이 길쭉한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라면 도혁에게 말려들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황금 같은 일요일 오후를 도혁과 보낼 수는 없었다.

재인은 정신을 다잡고 단호하게 의사를 밝혔다.


“팀장님, 저는 너어어무 피곤해서 오늘 집에서 쉬겠습니다.”

“그건 곤란한데……. 시장조사라.”

시장조사?

그럼 그렇지. 웬일로 쉬나 했다.

망연자실한 재인은 다급히 성준을 쳐다보았다.


“저기 그럼, 김 실장님도 같이 가시는 거죠?”

“죄송합니다. 전 급한 일이 있어서요. 너어어무 아쉽지만 두 분이서 오붓하게 다녀오시죠.”

고개 숙여 사과하는 성준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오붓하게?

재인은 성준에게 원망 섞인 눈빛을 보냈다.

김 실장님, 이러시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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