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딱 걸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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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딱 걸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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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딱 걸렸어!
2022.08.30.
순간 파전을 집으려던 도혁의 젓가락이 삐끗, 어긋났다.
꿈틀하는 그의 눈썹을 본 성준이 눈치 빠르게 대신 답했다.
“도련님은 학업과 일에 몰두하느라 요리를 배울 여유가 없으셨습니다.”
와, 대단해!
할 줄 아는 요리가 없다는 걸 저렇게 포장할 수도 있구나.
재인은 새삼 비서실장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하긴, 도련님이시니 말만 하면 다 준비해줘서 직접 할 필요가 없었겠지.
잠시 후 식사를 마친 도혁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먹었습니다. 10시부터 잠깐 밀린 업무를 보는 걸로 하죠.”
“네. 알겠습니다.”
성준이 깍듯이 대답했다.
도혁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재인이 속삭이듯 말했다.
“김 실장님도 팀장님 보필하시기 정말 피곤하시겠어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빠져 사시니까요.”
“괜찮습니다. 그래도 요새는 서재인 씨가 계셔서 조금 편해졌습니다.”
지난 일주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 시름이 깊어지는 재인이었다.
“제가 매일 열심히 시달리긴 했죠.”
“김 실장님은 팀장님과 같이 지낸 지 오래되셨어요?”
“네. 저희 아버지가 회장님을 모실 때부터 봐왔으니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가는군요.”
“어머, 20년이나요?”
“도련님이 열두 살 때 처음 뵈었는데…….”
옛일을 떠올리는지 성준의 눈빛이 허공을 향했다.
“……참 귀여웠습니다.”
재인은 성인 도혁의 얼굴을 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흠칫 놀랐다.
차도혁 씨의 꼬맹이 때라.
상상이 안 되네.
“그때도 성격이 괴팍…… 흠흠, 지금 같으셨나요?”
지금 같다, 에 참 많은 의미가 들어 있지.
“정말 순수하고 눈물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그 말에 재인은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에이, 안 믿어요! 엄청 반항아였을 것 같은데요?”
“그런 기질도 있으셨죠. 중학교 때 할아버님께 혼나서 가출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성준은 그때가 생각났는지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찾지 말라고 편지까지 써놓고 나갔다 일주일 만에 돌아오셨는데, 아주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죠.”
일주일이나?
재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많이 힘드셨겠네요.”
차 회장님이 까탈스러운 손자 키우시느라.
“네, 도련님이 정말 많이 힘들어하셨습니다.”
옛일을 회상하는 성준의 눈에서 안쓰러움이 묻어났다.
팀장님이?
대체 도혁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지던 찰나, 성준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재인에게 물었다.
“그런데 실례지만, 아까 현관을 정리하다 보니 서재인 씨 구두가 한 짝뿐이던데요. 혹시 어디서 잃어버리셨나요?”
탁!
재인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생각지도 못한 성준의 질문에 너무나도 놀란 나머지 그만.
다음 순간, 도혁에게 와락 안겼던 일이 눈앞에서 촤라락 슬라이드 사진처럼 펼쳐졌다.
그 엄청난 일을 성준의 등장으로 잠시 잊고 있었다.
“그, 그게 맨홀 뚜껑에 굽이 끼였는데 빠지지가 않아서…….”
정확히 말하자면, 뺄 생각 자체를 못해서요.
“저런. 어디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괜찮아요.”
“다행입니다. 어딘지 말씀하시면 제가 가서…….”
“아, 아니에요! 김 실장님, 신경 쓰지 마세요!”
재인이 기겁하며 소리치자, 성준이 미소를 지으며 물러섰다.
“정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맨발로 걸어오시느라 힘드셨겠어요.”
“……네에.”
발바닥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걸어온 걸로 하자.
재인은 빨개진 얼굴을 들킬까 봐 푹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넘어져서 당황했다고 해도 깜박할 게 따로 있지.
어쩜 둘 다 구두를 까맣게 잊어버렸던 건지.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누가 들으면 일부러 그런 줄 알겠네.’
응?
일부러?
불현듯 차에서 내릴 때 도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서재인 씨, 신발 없잖아.」
어?
팀장님? 설마?
내 구두 한 짝 놓고 온 거, 알고 있었어요?
‘에이, 팀장님도 오다가 생각났겠지. 설마 일부러 구두를 안 챙겼겠어? 팀장님이 뭐 하러?’
애써 자신을 납득시킨 것도 잠시.
도혁의 품에 폭 안겼던 순간이 계속 재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명치를 간지럽히는 이상야릇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 * *
“서재인 씨, 깨울까요? 벌써 9시인데.”
일요일 아침.
아침 식사 준비를 마친 성준이 물었다.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도혁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서재인 씨 생각만 하면 기분이 좋아지나 보군.’
어제 집에 들어왔을 때부터 어딘지 모르게 들떠 보였던 도혁이었다.
구두 얘기가 나오자 당황해하는 재인을 보고, 분명 그 일과 관련이 있음을 직감했다.
요즘 성준은 비밀스러운 취미 하나가 생겼다. 무표정이 90퍼센트 이상이었던 도혁의 생소한 표정을 관찰하는 것.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는 성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도혁이 헛기침을 했다.
“흠흠. 놔두세요. 어제 늦게 자서 피곤할 텐데.”
그럴 만도.
졸린 눈으로 크게 하품을 하던 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난밤 결국, 새벽 1시가 되어서야 일이 끝났고, 성준은 할 일이 남아서 손님방에 머물렀다.
“도련님, 어서 드시죠.”
성준이 준비한 아침 메뉴는 과일샐러드를 곁들인 에그베네딕트와 아보카도 오픈샌드위치였다.
유명한 브런치 카페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비주얼이었다.
“김 실장님, 감사합니다. 여러모로.”
진심이 담긴 도혁의 인사에 성준은 씩 웃고는 넌지시 말을 꺼냈다.
“어제 볼일은 잘 보셨습니까?”
“뭐…….”
어제, 토요일 오후.
도혁과 성준은 원래 업무 스케줄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도혁에게 연락이 와, 급한 일이 생겼다며 저녁으로 일정을 미룬 것이었다.
역시나.
재인과 함께 있을 거라 예상한 성준의 생각대로였다.
“지난 금요일에 말씀하셨던 건 어떠신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자상함’을 잘 실천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었을 뿐인데.
빤히 쳐다보고 있는 성준의 눈길을 피하는 도혁이었다.
“……짐도 들어주고, 차로 데려다주고, 물건도 찾아주긴 했는데…….”
“그러셨군요.”
번거롭고 귀찮은 건 딱 질색인 차도혁이?
제가 한 조언인데도 도혁이 잘 따랐다는 게 신기하기만 한 성준이었다.
성준은 저녁을 준비할 때 재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솔직히 처음엔 팀장님이 무섭고 불편하기만 했거든요. 근데 지금은 익숙해져서 그런지 막 무섭진 않아요.」
전보다 편안해 보이는 재인의 표정을 미루어 보아, 꽤 효과가 좋은 것 같았다.
“그런데……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더군요.”
내심 흐뭇해하고 있던 성준은 깜짝 놀랐다.
무엇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자상함이 흘러넘치는 행동인데?
서재인 씨, 대체 왜?
“그럴 리가 없는데……. 혹시 긴장해서 그러신 게 아닐까요?”
“그런가…….”
“아! 갑자기 안 그러던 사람이 잘해주면 놀라서 그럴 수도 있죠. 역으로 생각하면 좋은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좋은 신호?”
도혁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생각해보세요.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가게에서 이벤트로 빵을 나눠 줘요. 그럼 다음에 그 가게 앞을 지나갈 때 어떻겠습니까?”
“아, 그때 빵 줬던 가게다, 그렇게 생각하겠죠.”
성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바로 그거예요! 빵을 의식하기 시작한 거죠. 아마 그렇게 서재인 씨도 도련님의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성준이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덧붙였다.
“남자로.”
“……!”
갑자기 망망대해 같았던 도혁의 가슴에 안도와 희망의 물결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재인이 자신을 의식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속에서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성준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도혁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실례지만 서재인 씨의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드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순간, 도혁의 눈썹이 움찔했다.
“죄송합니다. 원래 이런 사적인 얘기는 물어보는 게 아니지만, 다른 분들 만날 때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아서 말입니다.”
오랫동안 도혁의 곁을 지켰던 성준이었기에, 도혁에게 접근하는 여자들을 수도 없이 봐왔다.
그의 배경만으로도 혹할 텐데, 심지어 외모까지 준수하니 당연한 이치였다.
다들 무반응인 도혁에게 몇 번 들이대다가 제풀에 나가떨어졌지만.
성준은 확신했다.
어제 유심히 지켜본 결과, 재인을 대하는 도혁의 태도는 다른 여자들을 대할 때와 확실히 달랐다.
언뜻 보기에는 말을 툭툭 던지는 것 같아도, 모든 것이 재인에게 맞춰져 있었다.
이따금 노트북 너머로 힐끔 그녀를 쳐다볼 때도 눈빛에서 애정이 넘쳐흘렀다.
지금처럼.
도혁은 재인을 떠올리는지 꿈꾸는 듯한 눈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윽고, 도혁이 쑥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냥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아져서……. 그렇게밖에 설명을 못 하겠네요.”
그 순간, 성준은 깨달았다.
도혁의 감정이 단순한 호감을 뛰어넘은 진짜 사랑임을.
미모, 집안, 스펙, 부족할 것 하나 없는 완벽한 여자들의 유혹에도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을 내주지 않던 도혁이었다.
그랬던 차도혁이 여자에게 푹 빠진 모습이라니.
성준은 그동안 삶의 재미를 느낄 새도 없이 일만 하며 사는 도혁이 내심 걱정이었다.
그래서 도혁의 변화가 더없이 반가웠다.
하지만 한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나머지는 내일 이어서 하죠.」
어젯밤.
일을 마무리할 때 도혁이 했던 말.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재인의 얼굴에 내려앉은 어두운 그림자.
워커홀릭인 도혁의 입장에서야 밤마다 주말마다 붙어서 일하는 것이 데이트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재인에게는 그냥 피곤한 일일 텐데.
성준은 차분히 말을 꺼냈다.
“오늘은 일을 일찍 끝내고 오후에 잠깐이라도 바람을 쐬러 나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네? 갑자기 무슨……?”
“자꾸 일만 하면 질려서 도망갈지도 모르니까요.”
……서재인 씨가요.
성준의 눈빛에 실린 날카로운 경고를 읽었는지, 도혁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 * *
Rrrrrrr.
Rrrrrrr.
이불 속에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온다.
더듬더듬.
침대 머리맡에서 휴대전화를 발견한 손이 얼른 벨 소리를 끈다.
그리고 다시 침대 속으로 쏙 들어가는데,
Rrrrrrr.
Rrrrrrr.
“누구야, 아침부터!”
재인이 짜증스레 획 이불을 젖혔다.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뜨고 시간을 확인하니 9시 10분.
유라의 전화였다.
더 자고 싶은 마음에 재인은 잠시 망설였다.
지난밤도 결국.
도혁의 일을 돕다 새벽 1시가 넘어서야 침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그것도 주말에 셋이서 식탁에 둘러앉아 머리를 맞대고 일만 계속하다 보니 짜증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차도혁, 이 지독한 인간!
이봐요, 팀장님, 약속이 다르잖아요.
10시부터 잠깐, 이라고 자기 입으로 말했으면서.
‘잠깐’의 기준이 이토록 관대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에휴, 그래도 밤샘 안 시킨 게 어디냐.
여전히 휴대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재인은 할 수 없이 잠을 물리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유라야.”
받자마자 유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는 거야!
“미안해. 정신이 없어서 전화한다는 걸 깜박했어. 근데 이른 아침부터 웬일이야?”
―재인아, 너 지금 어디야?
“어디긴. 집이지. 방금 네 전화 받고 일어났어.”
―그래? 지금 너네 집 가고 있으니까 어서 세수하고 잠 깨. 5분 뒤 도착이야.
5분 뒤?
재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유라야, 안 돼! 다음에 와!”
―왜? 집에 있다며.
“아아, 내가 실은 지금부터 어딜 나갈 거거든.”
―어디?
그러게.
이른 아침부터 갑자기 어딜 가야 할까.
“편……의점?”
고작?
재인은 제가 뱉어놓고도 어이가 없었다.
풋.
조소 띤 목소리로 유라가 말했다.
―열쇠 화분 밑에 놓고 갔다 와. 먼저 들어가 있을게.
“야, 안 돼!”
―아, 왜?
“우리 어제 봤잖아. 일요일인데 오늘은 푹 쉬고 다음에 보자. 응?”
―흠…….
불길한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이윽고 수화기 너머에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친구야, 지금 솔직히 말하면 정상참작 해줄게.
“뭐, 뭘?”
―차 팀장님이랑 같이 사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