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도련님의 일급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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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도련님의 일급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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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도련님의 일급비밀
2022.08.27.
흡!
저를 부르는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던 재인은 순간, 숨을 멈춰버렸다.
도혁이 상기된 얼굴로 저를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칫하면 코끝이 스칠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화들짝 놀란 재인은 다시 푹 고개를 숙였다.
“왜……요?”
간신히 내뱉은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팀장님, 대체 무슨 말을 하시려고요?
흐음.
도혁이 길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서재인 씨, 계속 이대로 있을 건가?”
“네?”
“손을…… 풀어줘야 내가 움직이지.”
“……!”
그제야 재인은 여전히 두 팔로 도혁의 목을 꼭 끌어안고 있음을 깨달았다.
“꺄아악! 죄송해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재인은 황급히 깍지 낀 손을 풀었다.
이미 그녀의 머릿속은 블랙아웃 상태였다.
도혁은 당황해하는 재인을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풋.
짧은 웃음소리와 함께 뒷문이 닫혔다.
‘내가 왜 이러지?’
두근두근.
재인의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제멋대로 날뛰었다.
후우. 후-우.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는데도 가슴이 갑갑하던 그때.
갑자기 반대편 뒷문이 벌컥 열리더니 도혁이 들어와 옆자리에 앉았다.
재인 쪽으로 쓰윽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서재인 씨, 발목은 좀 어때?”
“괘, 괜찮아요.”
흠칫 놀란 재인은 몸을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픈 데는 발목뿐인가?”
“……네, 왼쪽이 조금…….”
재인은 자꾸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겨우 끄집어냈다.
“잠깐 실례할게.”
무슨 실례?
물어볼 새도 없이 도혁이 재인의 두 발목을 조심스레 들어 올려 제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덕분에 재인은 뒷좌석에 옆으로 다리를 쭉 뻗고 반쯤 누운 자세가 됐다.
벌어진 코트 사이로 스타킹을 신은 그녀의 다리가 무릎 위까지 드러났다.
“아얏!”
통증보다 부끄러움이 앞섰다.
자칫 잘못 움직이면 옷이 쓸려 올라갈까 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팀장님, 저기……!”
도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재인의 발목을 유심히 살폈다.
소중한 것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섬세한 손길이었다.
그의 손끝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에 재인은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이윽고 도혁은 재인의 다리를 살며시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행히 심하지는 않군. 근육이 놀라서 그런 것 같으니 조금 쉬면 괜찮을 거야.”
“감사합니다.”
순간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새도 없이 눈길을 피했다.
“…….”
“…….”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재인은 그 무게에 깔려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아, 도망칠 수도 없고……. 역시 방법은 그것뿐인가?’
재인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아무말대잔치를 시작했다.
“근데 팀장님, 제 발목이 괜찮다는 걸 어떻게 아세요?”
뜻밖의 질문이었는지 도혁이 피식 웃었다.
“옛날에 테니스 칠 때 많이 삐끗했거든. 그래서 딱 보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와.”
“우와! 대단한데요. 그때 다른 일은 없었어요?”
“어깨가 빠졌는데 혼자 끼운 적도 있어.”
“우와! 굉장한데요. 또요?”
“테니스공에 맞아서 눈이 멍들기도 했고.”
“우와! 아팠겠는데요. 또요?”
“…….”
갑자기 도혁이 말을 멈추고 한쪽 눈썹을 씰룩 올렸다.
재인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물었다.
“왜, 왜요?”
“서재인 씨 리액션에 영혼이 없어.”
아, 티가 났구나.
“죄송합니다.”
재인이 순순히 인정하자 도혁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서재인 씨, 참 재밌어.”
재밌다고? 칭찬인가?
분위기상 그런 것 같으니 그냥 넘어가자.
재인도 멋쩍게 따라 웃었다.
잠시 후, 도혁은 재인의 발을 조심조심 의자에 올려놓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트렁크에서 담요를 꺼내 와 재인의 몸 위에 덮어주었다.
“놀랐을 텐데 한숨 자.”
“전 괜찮은데…….”
“도착하면 깨울게. 편하게 자.”
편하게?
농담도, 참.
재인은 콧방귀를 뀌며 못이기는 척 눈을 감았다.
도혁은 운전석으로 옮겨 앉아 차에 시동을 걸었다.
드디어 재인은 기나긴 하루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향했다.
몸은 피곤한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조금 전 도혁에게 안겼던 일이 자꾸만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재인은 잡념을 털어내 버리려는 듯 마구 고개를 저었다.
‘정신 차려, 서재인! 그럼 부하 직원이 넘어졌는데 도와줘야지, 길바닥에 버리고 가겠어? 그래, 아무것도 아닌 일이야.’
도의적으로 당연한 행동이었을 뿐.
제멋대로 날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재인은 억지로 잠을 청했다.
* * *
“서재인 씨, 그만 일어나지.”
“……으음. 음…….”
재인은 잠결에 제 팔을 흔드는 손을 밀쳐냈다.
“2시간 지났어. 이러다 여기서 밤새우겠어.”
“네?”
재인은 눈을 번쩍 떴다.
주위를 둘러보니 주차장이었다.
그때, 딸깍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차 안이 환해졌다.
갑작스러운 불빛에 눈이 부셔 눈살을 찌푸리던 재인은 무심한 눈빛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도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재인은 뒷좌석에서 아주 편안하게 누워 자고 있었다.
흠칫 놀라며 시간을 확인해보니 이미 저녁 7시 반이 넘은 시간.
도착해서도 1시간 넘게 잤다는 얘기였다.
“왜 안 깨우셨어요?”
“왜 안 깨웠을 거라고 생각하지?”
도혁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었다.
“혹시, 깨웠는데 제가 안 일어났나요?”
“…….”
“아, 죄송해요!”
“아주 편하게 잘 자더군.”
편하게 자라면서요. 시키는 대로 해야지.
재인은 정말 깊게 꿀잠을 잤다.
히터를 얼마나 틀었는지 차 안이 따뜻했다.
넘어질 때의 충격으로 발목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쑤셨는데, 한숨 푹 자고 일어났더니 한결 가뿐해졌다.
차도혁 씨, 의외로 섬세한 구석이 있으시네.
“제가 자는 동안 팀장님은 뭐 하셨어요?”
재인의 물음에 도혁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깊은 반성과 자책.”
“왜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왜 서재인 씨한테 편하게 자라고 했을까. 괜찮다고 할 때 그냥 놔둘걸. 다 내 잘못이다.”
“뭐라고요?”
재인은 부끄러워서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도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발목 한번 돌려봐.”
재인은 앉은 채로 천천히 발목을 돌렸다.
두세 번 빙그르르 돌리는데도 다행히 통증이 없었다.
“괜찮은 것 같군.”
“덕분이에요.”
“가지. 배고플 텐데.”
그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재인의 배 속이 꼬르륵꼬르륵 소란스러웠다.
“뭐든 빨리 먹어야 해.”
“네?”
“오늘, 같이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시원스레 미소 짓는 도혁을 보자 재인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멜로영화였다면 사랑이 깊어지는 대사겠지만, 차도혁 입에서 나온 말인걸?
순수하게, 처리할 일이 엄청나게 많다는 뜻이겠지.
밥 먹고 빨리 들어가도 9시인데 대체 몇 시까지 부려먹으려고?
어째 그 좋아하는 일을 하루 종일 등한시한다 했어.
에휴, 내 팔자야.
그때였다.
뒷좌석 문이 벌컥 열리더니 도혁이 불시에 재인을 끌어당겨 가뿐히 안아 올렸다.
“꺄악!”
재인은 본능적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도혁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엉겁결에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움찔.
순간 도혁의 몸도 놀라는 게 느껴졌다.
꺅.
재인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티, 팀장님…… 왜 이러세요?”
“서재인 씨, 신발 없잖아.”
아, 그러고 보니!
맨홀 구멍에 끼인 구두 한 짝을 깜박했다.
입이 딱 벌어진 재인을 보며 도혁이 나직이 말했다.
“꽉 잡아.”
도혁은 재인을 단단히 끌어안고 성큼성큼 힘차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 * *
도혁은 집에 도착해서야 재인을 내려주었다.
“감사합니다.”
“음.”
재인은 불에 덴 것처럼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도혁을 피하고 싶어 황급히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마자,
맛있는 음식 냄새가 콧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는 거실에서는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주방에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성준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성준이 간을 보다 말고 나와 재인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김 실장님!”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재인은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도련님이 전화로 저녁 준비를 부탁하셨습니다. 어차피 일이 있어서 오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팀장님이요? 저한테는 한 마디도 안 하셨는데…….”
그때, 도혁이 그들 사이를 지나치며 무심히 말했다.
“일급비밀이라.”
그러고는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더니 다시 서재로 사라졌다.
“김 실장님, 방금 팀장님 그거, 농담이라고 한 거 맞죠?”
“네.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도 재미없거든요, 정말.”
제발 차도혁 씨가 사전 협의라는 걸 해주면 좋겠네.
성준은 툴툴거리는 재인을 보며 빙긋 웃었다.
“모르긴 해도 서재인 씨 덕분에 도련님은 재밌으셨을 것 같군요.”
“무슨요, 차만 타면 앞만 뚫어지게 보고 말이 없으세요.”
“그건 아마 오랜만에 운전하시느라 조금 긴장하셔서 그럴 겁니다. 서울 시내 운전은 난이도가 높으니까요.”
“네? 설마…….”
재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팀장님 초보운전이에요?”
“그건 아닙니다. 유학 시절에는 혼자 다니셨죠. 귀국하신 뒤로는 제가 수행했었습니다. 오늘처럼 가끔 식사도 같이하고요. 그런데 이번 주 월요일 저녁부터 갑자기 혼자 다니겠다고 하시더군요.”
이번 주 월요일이라면 계약서를 쓴 그날이었다.
도혁이 다짜고짜 DS호텔 스카이라운지로 끌고 갔던 날.
“덕분에 제가 좀 편해졌습니다. 아, 도련님께는 비밀입니다.”
“네.”
성준은 다시 음식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재인이 돕겠다고 했지만, 성준은 마무리만 하면 된다며 마다했다.
재인은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가며 그의 말을 떠올렸다.
“이번 주 월요일 저녁부터 운전을 다시 시작했다고?”
와, 아주 계약사항을 철저하게 이행하는 분이시네.
새삼 도혁의 치밀함에 입이 벌어지는 재인이었다.
재인은 편안한 트레이닝복으로 옷을 갈아입고 긴 머리를 질끈 높게 묶었다.
Rrrrrrr. Rrrrrrr.
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해 보니 유라였다.
전화를 받으려는 찰나, 밖에서 성준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식사하러 나오시죠.”
지금 나가 봐야 하는데 유라랑 통화하면 늦어질 게 뻔했다.
미안하다, 친구. 나중에 얘기하자.
재인은 휴대전화를 침대 머리맡에 놔두고 밖으로 나갔다.
성준이 준비한 음식은 해물탕과 파전이었다.
비주얼만 보면 요리 잡지에 나와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우와! 너무 맛있겠어요!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맛있게 드셔주시면 저야 기쁘죠.”
성준을 만날 때마다 감동에 감동을 더해가는 재인이었다.
재인은 해물탕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국물에 해산물이 푹 우러나 감칠맛이 나는 게 기가 막혔다.
“와! 정말 맛있어요! 김 실장님, 어쩜 이렇게 요리를 잘하세요?”
“혼자 오래 살다 보니 요리가 재미있어서요. 부끄럽지만 자격증도 땄습니다.”
재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요?”
“네. 5개 다 있습니다.”
“어머, 그럼 파스타 같은 것도 잘하시겠네요?”
“네. 제가 한 파스타 합니다.”
“양장피도 만들 수 있으세요?”
재인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며 성준은 목을 꼿꼿이 세웠다
“물론이죠. 양장피는 겨자소스의 배합이 중요합니다.”
“그럼, 회도 뜨세요?”
“당연하죠. 복어로 학도 그립니다.”
“우와!”
박수가 절로 나왔다.
성준은 재인의 폭발적인 반응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요리 잘하는 남자 너무 멋져요! 김 실장님과 결혼하는 분은 정말 행복하시겠어요.”
재인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어 그녀는 묵묵히 먹기만 하는 도혁에게 물었다.
“팀장님은 어떤 요리할 줄 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