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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매달려 봐, 내 목에 (24/129)


24화. 매달려 봐, 내 목에
2022.08.23.



 
토요일 늦은 오후.

장장 3시간에 걸친 불편한 식사 자리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지하주차장에서 작별 인사를 나눴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얼마 안 나와서 제가 내려고 했는데.”

규민의 뼈 있는 인사에 도혁의 눈썹이 꿈틀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비즈니스적인 미소로 돌아왔다.


“식사 대접은 당연히 내가 해야죠. 그래도 윗사람인데.”

또야?

아, 피곤해!

스트레스가 쌓일 대로 쌓인 재인은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었다.

식사하는 내내 도혁과 규민의 은근한 신경전이 계속됐다.

재인은 재인대로 도혁이 계속 신경 쓰였다.

욱하는 마음에 그의 도발을 맞받아치긴 했지만, 정작 내내 굳어 있는 그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편치 못했다.

마치 태풍 전야의 고요함 같다고나 할까.


‘흥! 팀장님이 먼저 건드렸잖아. 계약사항 잘 지키나 괜히 사람 떠보고 말이야. 아, 몰라. 자기가 가라고 했으니까 자기 말에 책임지겠지.’

그렇게 재인은 불안한 마음을 혼자서 달랬다.


‘아, 집에 가서도 팀장님 얼굴을 또 봐야 하는구나.’

그 사실이 오늘따라 유독 서글픈 재인이었다.

이 와중에 단 한 명, 행복한 얼굴을 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도혁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보는 유라였다.


“차 팀장님, 정말 감사했어요! 그리고 제 친구라서가 아니라 재인이 참 좋은 애예요. 앞으로도 우리 재인이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은 무슨. 이미 늦었어!’

재인은 오늘의 참사에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유라를 째려봤다.

그러든가 말든가 유라는 아직 할 말이 많은 것 같았다.


“차 팀장님은 이제 뭐 하세요?”

“회사에 일이 남아 있어서 가봐야 합니다.”

“어머, 주말인데 또 회사를 가세요? 피곤하시겠어요.”

“괜찮습니다.”

별걱정을 다 한다. 젤 좋아하는 거 하러 가시는 거야.

재인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재인이 넌 집에 바로 가지?”

규민이 물었다.


“아, 응. 그래야지.”

“내가 데려다줄게. 집이 어디랬더라?”

“아, 우리 집은……!”

집이 어디냐고 묻는 말에 재인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규민이 말한 집은 그녀가 원래 살던 고양시 끝자락의 옥탑방을 말하는 거니까.

유라가 버젓이 보고 있으니 엉뚱한 곳을 댈 수도 없었다.

광화문에서 집까지 자동차로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1시간쯤.

지금 사는 여의도 회사 근처 도혁의 집까지는 20분이 걸린다.

문제는 재인의 원래 집에서 도혁의 집까지 대중교통으로 1시간 반이나 걸린다는 데 있었다.

가뜩이나 주말이라, 버스를 기다리고 갈아타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2시간 이상 잡아야 하는 거리였다.

정리하자면, 20분이면 끝날 것을 자칫 3시간 넘게 길바닥에서 보낼 수 있는 위기 상황이었다.

가뜩이나 피곤한데 빙 돌아갈 생각을 하니 재인은 벌써부터 멀미를 할 것 같았다.


‘안 되겠어. 그냥 따로 간다고 얘기해야지.’

재인이 말을 꺼내려는 찰나, 유라가 재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규민아, 미안한데 나도 부탁해. 동생이 여자친구 만난다고 내 차 몰래 가져가 버린 거 있지. 우리 집은 재인이 내려주고 조금만 더 가면 돼.”

재인은 저항할 틈도 없이 형사에게 연행되는 죄수처럼 규민의 흰색 SUV 뒷좌석으로 끌려 들어갔다.

규민도 도혁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운전석에 앉았다.


‘최유라 너 오늘 정말 왜 이러니?’

재인은 오늘이 정말 길게 느껴졌다.

이제 꼼짝없이 원래 집까지 가야 하는 상황.

당황한 재인은 다급히 창문 너머로 도혁을 쳐다보았다.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에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순간.

재인에게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내리쬐었다.

아직 빠져나갈 방법이 딱 하나 남아 있었다.

다급하게 뒷좌석 창문을 내린 재인은 도혁이 들으라고 일부러 크게 말했다.


“어머, 어쩌지? 팀장님 하시는 일 같이 마무리해야 하는 걸 깜박했네.”

재인은 이런 내 정신머리 좀 봐, 라는 표정을 지으며 냉큼 차에서 내렸다.

뒤따라 내린 규민이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재인아, 꼭 오늘 해야 하는 일이야?”

“어어, 지난 프로젝트 결과 보고서에 보완할 사항이 있어서.”

“그럼 나도 같이 가.”

“아니야! 네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리고 유라가 기다리잖아. 난 괜찮으니까, 어서 가.”

제발.

아쉬워하는 규민을 뒤로하고 재인은 도혁을 향해 생긋 웃었다.


“팀장님, 같이 가시죠. 저도 도울게요.”

그러자 도혁이 기다렸다는 듯이 재인에게 다가왔다.

마치 위기에 처한 공주를 구하러 오는 흑기사처럼.

그런데 웬걸?

재인의 옆으로 다가온 도혁은 규민의 자가용 뒷좌석 문을 열더니, 매너 넘치는 손동작으로 그녀의 등을 다시 떠밀었다.


“……어, 어!”

털썩.

재인은 다시 유라의 옆에 앉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얼빠진 재인의 귓가로에 도혁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 주임, 고맙지만 나 혼자서도 괜찮아요. 주말인데 들어가서 편히 쉬어요.”

“……!”

친절하게 차 문까지 닫아 주는 그의 얼굴에는 보기 드문 환한 미소까지 걸려 있었다.

스르륵 창문이 올라가고 규민의 차가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아갔다.

재인은 멀어져가는 도혁의 등을 보며 남몰래 투덜거렸다.


‘차도혁 씨, 이러기야? 치사하게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다니!’

 

* * *

저녁 어스름이 깔린 오래된 다세대 주택가 골목에 흰색 SUV가 멈춰 섰다.

재인은 친절하게 집 앞까지 데려다준 규민에게 복잡한 심경으로 인사를 건넸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이제 더 먼 길을 가야 하지만.

재인이 차에서 내리자 규민도 따라 내렸다.


“여기가 재인이 집이구나.”

“응. 여기 옥탑방.”

지금은 다른 데 살지만.

다시 2시간이나 버스를 갈아타 가며 되돌아갈 생각을 하니 한숨만 나왔다.


“재인아, 다음 주에 영화 보러 가기로 한 거 잊지 않았지? 토요일 어때?”

“괜찮아.”

“그럼, 알아보고 연락할게. 푹 쉬고 월요일에 봐.”

“응. 운전 조심해서 가.”

유라가 조수석으로 옮겨 앉으며 해맑게 말했다.


“재인아, 잘 들어가! 차 팀장님한테 안부 꼭 전해주고!”

“1시간 전에 헤어졌는데 안부는 무슨!”

“차 팀장님 듣던 것보다 좋은 분 같던데? 일 돕겠다는데도 주말이니 쉬라고 하고.”

“……가라, 어서.”

네가 내 썩어 들어가는 속을 어찌 알겠니.

재인은 멀어지는 차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한숨만 푹 내쉬었다.

규민의 차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 재인에게는 최소 2시간은 잡아야 할 귀가 코스와 도혁에 대한 원망만이 남아 있었다.


‘차도혁, 두고 보자! 아까도 가만히 있었으면 될 것을 치사하게 복수를 하고 말이야!’

재인이 두 주먹을 불끈 쥔 순간,

귓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늦었군.”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집어넣은 도혁이 골목 안쪽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아우, 깜짝이야!”

재인은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왜 이렇게 늦었어?”

채근하는 듯한 도혁의 말투에 재인은 울컥 짜증이 치밀었다.

이게 누구 때문인데!


“팀장님! 제발 부탁인데요, 예고 좀 하고 나타나실래요? 제가 팀장님 때문에 심장마비로 진짜 저세상 갈 것 같거든요!”

“…….”

“근데 회사 가신다더니 여기는 왜 오셨어요? 여기 주소는 또 어떻게 알고요?”

도혁은 재인의 질문을 깨끗이 무시하고 다짜고짜 물었다.


“그래서, 영화는 정말 보러 가기로 한 건가?”

뜻밖의 질문에 재인은 기가 막혔다.


“네? 지금 그게 중요해요?”

“가기로 한 거야?”

“네.”

도혁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계약서에 이성과 교제 금지 조항이 있는 걸 알면서 그래?”

이럴 줄 알았지.

역시 그 조항을 믿고 멋대로 사람을 시험하는 거였어.

재인은 순간 짜증이 솟구쳤다.


“팀장님이 그 영화 보러 가라면서요?”

“서재인 씨 특기인 반어법을 알아들을 거로 생각했지.”

재인은 일부러 활짝 웃으며 받아쳤다.


“아유, 어쩌나. 저는 그때 팀장님의 진심이 절절하게 느껴졌었는데. 죄송해요, 제가 오해했네요.”

“……!”

“어쩔 수 없죠. 저는 팀장님이 가라고 해서 가겠다고 약속한 것뿐이니까 지금 와서 딴소리하지 마세요.”

“그건 엄연한 계약 위반인데.”

“왜요? 규민이는 그냥 친구예요. 괜한 오해로 억지 부리지 마세요.”

“억지……?”

도혁의 굳게 닫힌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건드리시나?


“팀장님, 근데 설마 그거 물어보러 여기까지 오셨어요?”

“……!”

도혁의 눈 주변 근육이 미세하게 떨렸다.

진짜였나 보네?

골탕 먹이려고 먼 길 오게 해놓고는.

참 피곤하게 사신다.


“아무튼, 전 계약 위반한 거 아니니까 팀장님께 이런 소리 들을 이유 없어요. 그럼 전 갈 길이 멀어서 이만.”

대차게 말하고 돌아서는 재인을 도혁이 붙잡았다.


“내 차 타고 가.”

“버스 탈 거예요.”

“그러지 말고…….”

등 떠밀어 보낼 땐 언제고?

내가 밤새 걸어가고 말지.

차도혁 차는 치사해서 안 탄다, 이거야!


“됐습니다!”

재인은 당차게 외치며 도혁을 지나쳐 걸어 나갔다.

하지만,


“아악!”

몇 걸음도 못 가 그만 중심을 잃고 바닥에 고꾸라져 버렸다.

모처럼 신고 나온 하이힐 굽이 맨홀 구멍에 단단히 끼어 왼쪽 구두가 벗겨지고 만 것이었다.

빠르게 달려온 도혁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서재인 씨, 괜찮아?”

“아얏! 티, 팀장님…….”

재인은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넘어질 때 접질렸는지 눈물 쏙 빠지게 욱신거렸다.


“이 바보야, 조심했어야지!”

아픈 사람한테 바보라니!

창피함 반 서러움 반, 재인의 눈가에 눈물이 찔끔 맺혔다.


“팀장님, 정말 너무하세……!”

그때였다.

갑자기 몸을 숙인 도혁이 그녀를 사뿐히 들어 안았다.


 
어어라,

내 몸이 중력을 거스르네?

깃털처럼 가볍게 붕 떠오른다?

재인은 꿈을 꾸는가 싶은 착각에 빠졌다.

다음 순간,

정신을 차린 재인은 도혁의 가슴팍에 매달린 저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꺄아악!”

딸깍, 스위치를 켠 것처럼 재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내, 내려주세요.”

“…….”

도혁은 대답 대신 재인을 안은 채 성큼성큼 차까지 걸어갔다.

뒷좌석 문 앞에서 주춤하던 도혁이 말했다.


“매달려 봐.”

“네?”

재인의 눈이 커지자 도혁이 차분히 설명했다.


“손이 묶여 있어서 차 문을 열 수 없으니까, 내 목에 매달려 보라고.”

“아, 네!”

중요한 업무 지시라도 받은 것처럼 재인은 째깍 도혁의 목에 두 팔을 걸고 깍지를 꼈다.

그러자 도혁은 그녀를 바짝 끌어당기더니 한 손으로 단단히 감싸 안았다.

익숙한 그의 체향이 폐부 깊숙이 밀려들어 오자 재인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지만.

처음으로 남자의 품에, 그것도 불편해서 피하고 싶었던 도혁의 품에 안겨 있으려니 너무 낯 뜨거워 재인은 숨조차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이제 숙일게.”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딸깍, 뒷좌석 문이 열렸다.

도혁은 재인을 뒷좌석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괜찮아?”

“……네. 감사합니다.”

재인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꾸만 가빠지는 호흡을 가다듬으려 애쓰던 그때였다.


“서재인 씨?”

재인의 팔을 살며시 붙들며 도혁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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